캐나다에서 일고 있는 북한의 인권문제와 그곳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소식을 전하는 캐나다는 지금 토론토에서 김계영기자입니다.
캐나다에서 생활하고 있는 탈북 난민들은 모두가 북한에서의 가슴아픈 사연을 갖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캐나다 토론토에 정착한 가명을 쓰는 이수은씨의 북한을 탈출하기 전 그가 겪었던 슬픈 사연을 전해드립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북한의 식량배급은 서서히 중단되었으며 북한 주민들은 월급도 제대로 받지 못해 매우 힘들게 생활했다고 이 씨는 전합니다. 또한 이 씨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힘없이 굶어죽어가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봤으며 먹을 것이 있는 가정은 전혀 찾아 볼수가 없었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씨의 가족도 끼니를 때우기 위해 산에가서 풀을 뜯어 풀죽을 먹으면서 겨우 배고픔을 달래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씨의 남편은 이 씨의 가족을 살리기 위해 여러방면으로 살길을 찾던 중 중국에 갈 수있는 기회를 알게 되었는데, 이 씨의 남편은 중국을 여러번 오가며 가족을 위해 먹을 식량과 입을 옷가지등을 구해와 이 씨의 가족은 그나마 그 어려운 시기를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남편이 중국을 여러차례 다녀왔다는 사실이 북한 당국에 노출이 되었고 이 씨의 남편은 중국에서 한국 사람을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바로 북한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그리고 15일이 지나서 정치범 수용소로 남편을 면회 하러 갔던 이 씨는 남편의 모습을 보고는 차마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과 슬픔을 느꼈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습니다.
이수은
: (저희 남편이) 정치범 수용소로 잡혀가게 됐는데,그때 그 상황이 제가 남편이 고문당하고 어떻게 하고 이것은 보지 않아도, 보여 줄수도 없고, 보지는 못했지만 그 상황에 대해서 정말 알 수가 있을 수 있도록 간단히 이야기 한다면요. 남편의 면회를 가게 됐는데 얼굴이 내가 생각했던 그 사람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두 주만에 힘든 고문을 당했기 때문에 사람의 잠을 안재우고 매를 맞고 하다보니까, 사람의 체중이 한 60kg 였는데 그때 내가 면회를 갔을때 그 사람의 체중은 거짓말없이 한 20kg은 줄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 남편인데도 그 얼굴을 알아 볼 수가 없더라구요. 그 만큼 고문당하고 그랬기 때문에. 그 앞에서는 제가 말 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도 그때 생각하면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죠.
이 씨의 남편은 결국 북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15년의 형을 받았습니다. 정치범 수용소는 일단 그곳으로 가게 되면 어느 누구도 빠져 나올 수 없고 살아 남을 수도 없는 곳으로 이렇게 가혹 곳으로 남편이 끌려간 후 이 씨는 남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었다고 전합니다. 그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일어나는 가혹한 고문과 강제노동을 생각하면 남편은 정치범 수용소에서15년 형을 다 채우기도 전에 그곳에서 생을 마감해 했을 거라며 그러한 남편을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아무말도 할수가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남편을 그렇게 떠나 보내고 이 씨는 북한을 탈출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는데요, 계속해서 이 씨의 이야기를 들어 봅니다.
이수은
: 북한에서는 더없이 계급에 대해서 너무나도 성분관계를 따지고 들기 때문에 저희 남편이 한국사람을 만났다는 이런 이유에서 그로인해 정치범 수용소로 갔기 때문에 우리 가족에게는 더 없이 출세할 수도 없고 그것으로 인해 동네방네 다 공개되었기 때문에 얼굴 들수도 없고 먹을것도 없고… 정말 사람이 죽으면 죽었지 어떻게 살겠는가 그렇게 허덕여 있을때 더 이상 북한에서 내가 있을 수 없다. 죽던가 살던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고, 사람은 한번은 가는 길이니까, 정말 그런 결심을 안고 북한을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이수은 씨는 지금 캐나다 정부로 부터 공식적인 난민지위를 인정받아 토론토에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이 씨는, 다른 나라에 대해서 전혀 알 수가 없는 북한에서 살았던 자신이 이렇게 캐나다에서 생활하는것이 천국같고 너무나 행복하다고 자유아시아 방송에 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