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냥 사랑해도 될까요?

사진은 강원 춘천시 삼천동 자유회관 웨딩홀에서 강원서부하나센터 주관으로 열린 '북한이탈주민 합동결혼식'.
사진은 강원 춘천시 삼천동 자유회관 웨딩홀에서 강원서부하나센터 주관으로 열린 '북한이탈주민 합동결혼식'.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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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자신의 전공을 살려 직업을 갖는 대신 결혼을 선택하는 여성들이 있습니다.

한국에선 우스갯소리로 그런 여성을 ‘취집녀’라고 부르는데요. ‘취직’과 ‘시집’을 합친 말이죠.

그만큼 좋은 직장 구하는 게 어려워진 현실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과연 ‘시집’은 좋은 직장보다 나을까요?

탈북여성들도 취직보다는 결혼을 먼저 생각한다고 하는데요. 여기는 서울입니다. 결혼을, 그리고 사랑을 선택한 탈북여성들의 사연을 들어봅니다.

이예진: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 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이예진: 탈북여성들을 만나보면, 참 쉽게 사랑에 빠진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또 그만큼 남자를 믿었다가 상처받는 탈북여성들이 많더라고요.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지방에 살고 있는 30대 후반 여성의 사례였는데요. 북한을 탈출하면서 알게 된 20대 남성과 서로 누나, 동생 하면서 가깝게 지내다가 하나원을 나와서 둘이 결혼하게 되었답니다. 얼마 뒤에 늦은 나이라고 생각도 못했는데 임신이 되었고 아기가 태어나게 되었답니다. 아기를 부양할 마음의 준비도 경제적 여력도 안되는 형편에서 무턱대고 기뻐만 할 일도 아니었다고 하네요.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겠죠. 게다가 남편은 변변한 일자리도 없이 일용직으로 살다보니 얼마 안 되는 생계비로 어렵게 살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혼자서 아기를 돌보면서 살림을 하는 아내의 고충은 생각도 못하고 쉬는 날에도 장가가기 전 하나원 동기생들인 친구들과 함께 하루 종일 뽈차기를 하는가 하면 밤늦도록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집에 들어올 생각을 안 한다고 합니다.

며칠 전에는 서울에 간다고 올라갔는데 전화도 없다면서 이런 사람을 어떻게 믿고 살아야 할지 막막한 마음에 전화를 걸었다고 했습니다. 이런 무책임한 사람인줄 알았으면 절대로 결혼은 안했을 거라고 하더군요. 서로가 결혼에 뜻을 같이하고 사랑해서 한 결혼인데 어느 일방만 문제가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여성에게 전화로라도 위로의 말을 해주면서 물론 아이를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고 외로울지는 잘 알고 있지만 본인 못지않게 남편의 마음도 이해하도록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돌아오면 아무리 맞는 말이라도 잔소리로 들릴 수 있기에 남편의 마음도 이해해 주면서 화목하게 살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해당지역의 전문상담사와 연결해주어 지역의 하나센터와 복지관 등에서 받을 수 있는 지원들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이예진: 네. 사실 아기도 계획적으로 돈을 모으고 키울 준비를 하고 낳잖아요. 남편도 준비가 안 되어서 더 그랬을 수 있겠네요. 어쨌든 앞으로 아이를 키우는 데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지 않을까 걱정되네요.

마순희: 그래서 결혼이나 출산은 현명하게 결정해야할 문제라고들 합니다만 정작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것인지 정답이 별로 없는 것 같더라고요. 누구나 그러하지만 특히 탈북여성들이 쉽게 놓칠 수 있고 후회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어려운 탈북의 과정을 거치면서, 혹은 중국이나 3국에서 목숨을 건 도피행각과정에서, 어려움과 외로움에 지치다보면 누구라도 서로 의지할 상대를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한국에 나와서도 쉽지 않은 정착을 하는 과정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누가 조금만 친절을 베풀어 주고 관심을 보여도 눈물이 나도록 감사한 생각이 들고 마음을 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잘 따져보지도 않고 서로에 대한 이해가 별로 없어도 그만한 정도면 함께 살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면 쉽게 결혼을 결정해 버리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다가 제대로 된 성교육이나 피임 같은 교육을 잘 받지 못해 원하지 않던 임신을 하는 경우가 많더라고요. 후에 이 사람은 정말 아니구나 생각이 들어도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살아야 하는 경우도 많고요.

이예진: 그런 경우가 참 안타까운 것 같아요. 그리고 결혼과 이혼은 법적인 문제가 걸려있어서 관련 법률상담도 많을 것 같아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이런 사례들이 많다보니 법률상담을 신청하는 분들 중에는 이혼에 관한 상담을 신청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물론 그런 사례들 중에는 흔치는 않지만 나이 드신 분들의 상담 사례도 있었답니다. 사례자는 60대 후반인 탈북여성의 지인이 대신 상담을 요청했는데요.

60대 후반의 한 북한여성이 80대의 남한 할아버지가 살고 계시는 집에 한 달 급여 120만원을 받으면서 입주도우미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이예진: 1200달러 정도요.

마순희: 네. 그렇죠. 그런데 80이라고 하는 그 어르신이 60~70대의 신체 나이었고 매우 건강한 편이었다고 합니다. 진심으로 입주도우미로 일하다보니 두 분이 마음이 맞아서 본인의 집을 반납하고 그냥 그 남한 분과 함께 살게 되었답니다. 어르신의 자녀들도 두 분이 사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고 항상 고맙다고 매월 급여일만 되면 꼬박꼬박 급여를 입금시켜 주었습니다.

3~4년이 지나자 어르신은 기력이 그전 같지 않다는 것을 본인이 느끼시고 자기가 죽으면 시골에 있는 자기 소유의 집과 약간의 재산을 그 여성분에게 넘겨주겠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담전화를 한 지인이 그 여성분에게 혼인등기를 하여 재산을 당당하게 물려받든가 아니면 그 재산을 명의 이전해 달라고 하지 그랬냐고 했더니 차마 그런 말을 하기에는 입이 안 떨어진다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곁에서 보기도 안타까운데 이럴 때는 어떻게 말해 주어야 하는지를 물어 보는 것입니다. 먼저 그렇게 경솔하게 처리하면 안 될 것 같다고 자세한 내용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예진: 맞아요. 탈북여성이 아니어도 한국에 이런 사례들은 꽤 있죠. 노년에 싹튼 사랑일 경우, 재산 상속과 관련해서 자녀들이 아버지나 어머니의 재혼을 반대하는 일도 있거든요.

마순희: 그래서 그 분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지금 상속법이 달라지고 자녀들이 황혼기 부모님의 재혼을 얼마나 반대하는지를 모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르신이 말로는 그렇게 말씀하셔도 명의를 이전해 달라고 하면 역시 그 재산을 노리고 그 동안 잘 해준 것 아닌가 오해할 소지가 있다, 그러니 진심으로 그분의 의향이 그러하다면 자식들이 찾아오는 날 자연스럽게 자식들에게 어르신이 직접 자신의 의향을 말하여 자식들의 이해를 구한 후에 할 수도 있다고 말했죠. 그랬더니 그 분도 과연 간단하지 않은 문제이긴 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조언해드리면 좋을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이예진: 네. 탈북자 가운데 여성들의 비율이 현저히 높다보니 탈북여성들의 상담이 많았을 것 같은데요. 결혼이나 이혼 등 가정상담을 하시면서 가장 안타까웠던 건 어떤 건가요?

마순희: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참고 살아가고 있는 분들의 사례를 들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잘못이 아닌 사유로 이혼하면서도 위자료는커녕 본인의 집을 반납하면서 받은 금액을 집을 사는데 보태고도 그 돈마저 받지 못하는 사례도 있었는데요. 얼마나 결혼에 환멸을 느꼈으면 그냥 맨손으로라도 이혼만 해주면 고맙겠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저도 함께 마음이 아프고 안타깝게 생각하게 됩니다.

결혼을 생각하고 계시는 우리 북한이탈주민 여성들이 결혼보다 먼저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도록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은 어떨까요? 조급한 결혼보다 우선인 것은 기회의 땅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가치를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성공적으로 정착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예진: 어떤 선택을 하든지 결과에 대한 책임도 자신의 몫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현실에서 우선순위를 잘 매겨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그럼에도 ‘사랑’은 언제나, 자신이 처한 현실과 상관없이 가장 첫 번째 순위가 된다는 것, 이건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남북하나재단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이예진: 여기는 서울입니다.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