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6. 25 전쟁 후 사회적ㆍ경제적 안정 속에서 태어난 세대를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라고 합니다. 베이비붐 세대가 사회적, 경제적 안정 속에 자랄 수 있도록 인내와 희생으로 한국사회를 재건한 건 그들의 부모였는데요. 여기는 서울입니다.
그런 부모들처럼, 남다른 인내와 희생으로 사는 탈북자들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이예진: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 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이예진: 사실 탈북자들에겐 모든 게 도전이죠. 특히 직업은 북한에서 해봤던 일을 하는 분들도 있지만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분들도 많잖아요?
마순희: 제가 이번에 찾아 갔던 전라북도 익산의 북한이탈주민 여성의 사례가 그러한데요. 익산이라고 하면 기온이 포도농사에 적합해서 많은 농가들이 포도농사를 하고 있는 곳이잖아요. 제가 만난 익산의 40대 중반의 그 여성은 사실 북한에서도 탄광에서 통계원으로 일하던 여성이라 지금의 농촌에서 일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 여성은 두 자녀를 데리고 대한민국에 왔는데 처음부터 각오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남한에 잘 정착하려면 여러 가지 직업을 다 겪어봐야 한다면서 식당 주방일이나 생산직 노동자까지 여러 가지 일들을 해왔다고 합니다. 한국에 와서 6개월 되었을 때 철판가공을 하는 한 생산직 회사에 취직을 했었는데 3일째 되는 날 큰 사고가 났답니다.
아직 많이 서툰 상황에서 아차 하는 순간에 왼손 네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네 손가락을 잃고 얼마나 좌절감이 심했겠습니까? 두 번에 걸친 수술과 재활치료 등을 반복하면서 몸도 마음도 지쳐갔는데 그러할 때 손잡아 주고, 술과 눈물로 세월을 보내던 그분을 절망에서 구해주신 분이 담당상담사 선생님이었다고 합니다.
이예진: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에서 그런 큰 사고를 당하고 마음까지 많이 다쳤을 텐데, 그럴 때 주변의 도움이 정말 큰 힘이 됐겠네요.
마순희: 네. 처음에는 다쳤을 때 눈물도 같이 흘려주고, 장애인으로 일반직장에서 일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에 상담사 선생님의 도움을 받으며 컴퓨터 교육을 받았고, 어렵게 세무회계사 자격증을 받기도 했지만 취업은 역시 쉽지 않았습니다. 사고에 대한 끔찍한 기억에 더는 처음 받았던 거주지인 김포에 살고 싶지 않아서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전라도 익산으로 가게 되었답니다. 세무회계사 자격증을 들고 취업을 하기 위해 전문상담사 선생님과 함께 고용지원센터, 전북장애인협회의 일자리센터, 익산의 희망리본 일자리센터 등 일자리를 찾아 수많은 곳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인 그에게 마음에 드는 일자리가 차례지지 않았고 다시 한 번 절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한 그에게 희망이 되어주신 것은 역시 익산지역의 담당 상담사이신 송은하 선생님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예진: 김포 쪽에서 탈북자들을 지원하는 상담사들의 도움을 받았다가 익산으로 가서 다시 그쪽 지역의 새로운 상담사를 만난 거군요.
마순희: 그렇죠. 그분은 대한민국에는 그보다 더 한 중증장애인들도 꿈과 희망을 가지고 사는 분들이 많다면서 희망과 용기를 주시던 송은하 상담사 선생님의 진심어린 권고로 다시 일어서게 되었습니다. 먼저 오신 선배들 중에는 귀농을 해서 성공하신 분들이 많다면서 귀농을 추천해주시던 상담사 선생님의 도움으로 2013년 김제시 백구면으로 귀농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영 씨가 처음 귀농을 생각할 때에는 북한의 재래식 농사를 생각한 것이 사실이었다고 합니다. 영농기술을 배우면 배울수록 대한민국의 현대화된 영농법에 감복하게 되었고 신심을 가지고 지역의 특산물인 포도농사를 결심하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지역의 선도농가나 영농정착지원기관들의 진심어린 도움과 지도가 있어서 주영 씨의 열정에 보탬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역에서 6000평, 2정보의 포도밭을 임대하여 포도농사를 짓게 되었고 3년차인 금년에는 자신의 명의로 토지도 구입하여 새로운 명품 포도, 그러니까 씨 없는 포도를 심기도 했답니다. 내년이면 첫 열매가 열리게 되고 내후년부터는 본격적으로 수확하게 된다면서 자신의 이 경험을 다른 북한이탈주민들에게도 널리 알리고 싶다고 하더군요. 북한에서 탄광의 사무원으로 일하던 여성이 한국에 와서 그렇게 큰 사고로 네 손가락을 잃고도 어엿한 포도농원의 대표로 당당하게, 그리고 한국인 남편 분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새로 정착하는 분들에게 귀감이 될 성공사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예진: 고난과 역경을 겪으면서도 스스로 삶을 개척한 사람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을 주는데요. 그런 식으로 성공한 탈북자 분들이 유난히 많은 것 같아요.
마순희: 그런 사례들은 정말 가는 곳마다에서 들을 수가 있었습니다. 제가 작년에 취재를 나갔던 충주의 평양 손칼국수 사장도 역시 그러한 분들 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충주에 내려가서 택시 기사 분들에게 평양손칼국수집으로 가자고 하면 누구나 곧바로 실어다 줄 정도로 유명한 집입니다. 워낙 부지런했던 그는 충주에 내려가서도 식당주방에서 일을 하면서 하루도 쉬는 날이 없이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그의 꿈은 자그마하게라도 자신의 가게를 차리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별로 손님도 없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알뜰하고 손맛 좋은 그녀의 칼국수집에 단골손님도 늘어나고 돈도 어지간히 벌게 되었고 식당 가까운 곳에 자신의 아파트도 장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방에서 가스폭발사고가 있었고 그 여성분은 온몸에 화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퇴원한 후에도 의사선생님은 화상을 입은 그의 건강이 제대로 회복되려면 몇 년은 걸린다고 했었습니다. 화상으로 입은 피해는 경제적인 면도 있었지만 가장 심한 것은 물건을 집을 수 없을 정도로 손의 근육이 마비가 된 것이었습니다.
이예진: 야심차게 시작한 가겐데 잘 나가다가 불이 났으니 얼마나 절망했을까 상상이 안 되네요. 특히 화재로 재산을 잃은 것뿐 아니라 손을 다쳤으면 앞으로 음식을 만들고 장사를 하기에 어려운 것 아니었나요?
마순희: 그렇지요. 그래서 그 여성분은 대야에 물을 떠놓고 걸레를 담그고는 눈물을 머금고 아픔을 참으면서 하루에 만 번 이상 걸레를 씻고 짜는 것을 반복하면서 손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몇 년이 걸릴 거라는 의사선생님의 소견을 깨고 불과 몇 개월 후에 다시 식당을 차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작년에 갔을 때 식당을 차린 지 9년이라고 했으니 아마도 금년에는 10년차가 되겠지만 평양손칼국수집에서는 처음가격 그대로 한 푼도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손님이 줄을 서는 정도로 소문난 칼국수집의 여사장의 이야기는 누구나 감동하는 성공사례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예진: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말은 이럴 때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선생님은 직접 가서 맛도 보셨잖아요. 평양 손칼국수집의 인기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마순희: 가서 직접 맛을 보면 왜 한 번 왔던 손님이 단골손님이 되는지 금방 알 것 같았습니다. 손칼국수도 맛있었지만 거기에 보리밥을 서비스로 주기도 하더라고요. 잘 익은 김치는 손칼국수의 맛을 한층 더 돋우어주었고요. 그리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가게를 처음 낼 때 음식 값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대로인 것이 비결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예진: 10년째 5달러, 요즘 밥값이 두 배 가까이 오른 걸 생각하면 베푸는 수준이 아닌가 싶네요. 이런 마음을 가진 분들이 또 그런 값진 성공을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값진 성공을 거두며 사는 탈북자들은 생각보다 많다고 하는데요. 또 어떤 분들이 있는지 다음 시간에 계속 들어봅니다.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이예진: 여기는 서울입니다.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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