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남한 사회에 잘 정착해서 가정을 꾸리고 살고 있는 탈북자들은 명절이 되어도 옛날만큼 외롭고 쓸쓸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여기는 서울입니다.
고향생각, 두고 온 가족생각에 한숨만 쉬던 탈북자들이 조금씩 줄어들고 있는 이유는 뭘까요?
이예진: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 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이예진: 네. 최근 탈북에 관한 상담전화들도 있다고 하셨는데요.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가 가족을 데려오는 경우에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는 한국에 오기가 어렵잖아요. 그 과정에서 상담전화가 왔던 경우도 있나요?
마순희: 네. 브로커를 통하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죠. 가끔 한국에 정착한 가족이 직접 중국까지 가서 북한의 가족을 데려오거나 중국에서 제3국을 거쳐 들어오는 경우도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에는 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하기에 대부분 브로커를 통하여 들어오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먼저 온 가족이 브로커에게 얼마간의 선금을 지급하고 일을 시작하는 경우도 간혹 있지만 거의 대부분 성공해서 중국에 넘어오면 통화를 하고 얼마를, 그리고 제3국에 넘어가면 확인 전화를 하고 하나원을 나오면 나머지 잔금을 치르는 등의 형식으로 진행됩니다.
가끔, 아주 가끔은 선금만 챙기는 사기피해도 있을 수 있기에 거의 선금은 치르지 않는 것이 보통이고요. 하나원 수료 후 비용을 처리하지만 믿음이 확실하지 않으면 일을 시도하지 않는답니다. 하지만 탈북자 사회가 워낙 서로 소식들이 잘 연결이 되다보니 브로커 알선 같은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정보도 주면서 가족의 입국을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상담전화로도 브로커를 소개해 달라는 전화를 받을 때도 있습니다. 저도 거의 10여 년을 알고 지내고 있고 성공적으로 입국을 도와주는 브로커들을 알고 있기에 그런 전화를 받을 때면 어쩔 수 없이 도움을 드리기도 한답니다. 다만 그 때마다 이것은 지원재단 상담센터의 상담업무와는 별개의 문제이고 탈북자 개인의 입장에서 도와주는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둔답니다.
그리고 브로커들에게 전화하여 그 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가능한지 여부를 먼저 알아보고 연락처를 주어도 된다고 승인한 브로커의 연락처를 그 분에게 드리거든요. 여러 개의 연락처들 중에 전화를 해 보고 믿음이 가고 본인이 시도해보고 싶다고 생각되면 본인이 선택을 하게 하는 겁니다.
이예진: 믿고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이니까요.
마순희: 네. 본인이 선택해서 하는 거라 이거 해라, 저거 해라 이런 말은 못 하거든요.
이예진: 그렇군요. 실제로 상담전화로 도움을 드려서 한국에 잘 정착하게 된 경우도 있었나요?
마순희: 그럼요. 제가 지원재단에 들어와서 받은 상담전화인데요. 40대 남성이었습니다. 그 분은 아버지와 할머니가 먼저 한국에 나오셨고 아버지는 목포에, 할머니는 서울에 집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분이 하나원을 나올 때 할머니가 70대 고령이셔서 아버지가 본인이 받은 주택을 반납하고 서울에 계시는 할머니 집에 함께 살고 있었는데 본인은 혼자서 나왔기에 아버지와 합가하도록 되어서 주택을 받지 못하고 나왔다고 합니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에게 배정된 집이라 넓지 않았고 세 식구가 살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본인은 기숙사가 있는 경기도의 한 식품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쉬는 날이면 남들은 다 집으로 가는데 본인은 집에 가기도 그렇고 하여 술을 마시고 상담센터로 전화를 한 겁니다. 20대 아이들도 다 집을 받는데 자기는 북한에서 장가를 갔고 처와 아들도 있는데 혼자서 왔다고 집도 배정받지 못했다고 너무 속상해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어떻게 해결해볼 수 있나 해서 여기 저기 다 알아보고 사유를 적어서 이의신청서도 내보았지만 결국 현행법상 다른 방법이 없었던 겁니다.
이예진: 나오는 사람마다 다 집을 한 채씩 배정할 수는 없으니까 가족단위로 묶다보니 생긴 일이라는 얘기인데, 어쨌든 안타깝네요.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었나요?
마순희: 다행히 한 가지 방법이 있었습니다. 북한에 있는 가족이 한국에 오면 기혼자로 인정되어 주택을 받을 수 있었는데요. 그래서 함께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몇 개월째 노력하던 중 본인의 요구대로 브로커를 소개해 주었는데 정말 아들과 처가 무사히 한국에 오게 되었고 지금은 광명시에 주택을 따로 받아서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브로커를 소개해 주었을 때에는 그분들이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저희가 본인보다 더 마음을 조이게 되더라고요. 남의 일에 너무 깊이 관여하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졌다가도 정작 브로커와 줄을 잇지 못해서 안타까워하시는 분들을 보면 어쩔 수 없이 외면할 수 없어서 도와드리게 된답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연변에서 살고 있던 탈북 여성도 그런 식으로 지금 무사히 한국에 와서 하나원 교육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이예진: 탈북 선배로서 선생님도 남의 일로만 외면할 수 없었던 거겠죠. 일이 잘 해결됐을 때는 또 보람도 크실 것 같아요.
마순희: 그렇죠. 그분들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날아갈 것처럼 기쁩니다.
이예진: 네. 그렇군요. 그리고 한국에 먼저, 그것도 혼자 온 탈북자들 가운데 젊은 청년들의 수도 꽤 된다면서요?
마순희: 네. 그런 사례들이 많지만 특히 얼마 전에 전화 받은 22세의 청년의 사례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청년은 10대에 집을 나와 꽃제비로 살다가 친구들과 함께 중국으로 넘어가게 되었고 한 종교단체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10대라서 하나원에서 하나둘 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하나원 수료 후에도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탈북 청소년을 위한 대안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검정고시를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작년에는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지금은 대학생활을 하고 있답니다.
그렇게 잘 살고 있다가 작년에 우연히 한 고향에서 살던 분을 만났는데 그 분을 통해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어 한시라도 지체하지 말고 어머니와 동생을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그러나 본인이 아직 어리고 돈을 벌 형편이 안 되어 어떻게 하면 돈을 적게 들이면서 데려 올까 생각하다가 본인이 직접 나섰다는 것입니다. 마침 집이 국경지대라 중국에 가서 북한으로 가는 여행자에게 부탁하여 밤에 몰래 가족을 데려오는데 성공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동생과 함께 제3국 국경까지 가서 브로커에게 신병을 넘겨주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 때 처음 그 청년이 전화를 했는데 한국에 처음 나오면 전입신고를 비롯한 수속은 어떻게 하고 가전제품은 어떻게 사야 하는지 등에 대해 물어 보는 것입니다.
이예진: 아니 위험을 무릅쓰고 가족은 잘 데려왔는데, 그런 것들은 한국에 온지 시간이 꽤 돼서 잘 알고 있었을 것 같은데 왜 물었을까요?
마순희: 그 청년이 대답하기로는 자기는 어렸을 때 한국에 왔기 때문에 주변에서 다 알아서 해주고 어린 나이에는 집이 아닌 시설에 살아야 해서 집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청년에게 아무 걱정 말라고 하나원에서 신병 인수하여 거주지까지 다 안내해주고 남한의 정착 도우미들이 있잖아요. 그분들이 함께 주민센터에 가서 수속을 다 해드린다고 알려드렸습니다.
그리고 지원재단에서 생활안정키트라고 24가지 즉 쌀과 된장, 간장으로부터 냄비와 심지어 구급약에 이르기까지 다 갖추어서 보내주기 때문에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알려드렸지요. 한국에 먼저 와서 가족을 데려오고 또 그 후에 오는 가족이 불편할세라 하나라도 챙겨주려고 마음 쓰는 그 청년의 기특한 소행은 상담이 끝난 다음에도 하루 종일 제 마음까지 따뜻하게 해 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예진: 최근 탈북자들은 먼저 남한에 와서 자리를 잡은 뒤에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불러오는 경우가 많은데요. 오늘 얘기를 들어보니 그 이유가 또 다양하네요. 어떤 이유로든 어렵게 다시 모인 가족, 곧 다가올 설 명절만큼은 한숨대신 웃을 일만 가득하기를 바라겠습니다.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님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이예진: 여기는 서울입니다.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