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이번 남북 이산가족상봉행사 때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나고 싶다고 신청한 남한의 이산가족들의 수는 65,907명, 상봉대상자는 한 번에 겨우 100명, 지금까지 15년간 만난 이산가족상봉자는 2천 명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북한에 있는 가족을 만나려면 663:1이라는 난관을 뚫어야 하는데요. 여기는 서울입니다. 이보다 더한 탈북자들의 가족찾기, 그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이예진: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 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이예진: 최근 상봉행사를 통해 70여 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들의 마음, 며칠의 꿈같았던 시간이 지나고 지금은 더 그립고 그래서 더 마음이 아프지 않을까 싶은데요. 탈북자 분들도 같이 눈물을 흘렸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 주변에도 이산가족이 있으신가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초기에 브로커로 일하는 사람을 통해서 친한 언니의 부탁을 받게 된 일이 있었습니다. 사연인즉 북한에 계시는 그 언니의 시댁이 개성이었답니다. 6. 25 전쟁 때 시아버님이 남한으로 간 것 때문에 월남자가족으로 함경북도의 한 탄광으로 추방이 되었답니다. 월남자 가족이다 보니 자식들이 대학도 못가고 여러 가지로 불이익이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탈북자들이 한국에 오게 되니 시아버지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한 것입니다. 옛날 개성에서 살던 주소랑 시아버지의 이름이랑 나이랑 다 알려주면서 꼭 알아봐달라고 부탁을 하기에 알아보기는 했는데 그것이 쉽지 않더라고요. 제 생각에는 실향민들이 많이 모여서 활동하는 이북 5도청에 알아보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었는데 행사 차 갔을 때에 알아보았더니 아는 분이 없더라고요. 이북 5도청이라고 해도 실향민들의 정보가 다 있는 것은 아니고 그 곳에 연계해서 사회활동을 하신 분들이 아니라면 알 수가 없고 워낙 연세가 높다보니 지금 살아 계신다는 확률도 희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탈북자들도 사회활동을 활발하게 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정보를 알 수 있지만 탈북자라는 것을 내색하지도 않고 잘 정착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서로 모르는 것처럼 실향민들도 그런 것 같았어요. 어디서도 그분에 대한 정보를 알 수가 없어서 기대를 가지고 연락을 보내온 분들에게 많이 미안하지만 도움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아마 지금쯤 그런 부탁을 받는다면 저도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겠는데 하는 아쉬움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만 불행하게도 그 때 이름이랑 주소랑은 지금은 알 수가 없습니다.
이예진: 이번에 제 20차 이산가족상봉 행사에서 남측의 한 분이 내 가족, 내가 같이 살겠다는데 왜 못 살게 하느냐고 울부짖던 모습이 떠오르는데요. 그나마 탈북자들은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의 생사여부나 연락처를 수소문해서 소식을 들을 수 있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께 시아버지를 찾아달라고 했던 부탁처럼 너무 오랜 세월이 지난 전쟁 이산가족들의 연락처는 알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산가족들의 가족 찾기는 계속되고 있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663:1의 경쟁률이면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산가족상봉을 원하고 있는지는 알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제한된 방법으로서는 나날이 고령화되어가는 그 분들의 한을 풀어드리기가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다가 한국에 온 탈북자들도 거의 3만 명에 육박하고 있으니 그 필요성은 나날이 더 커갈 것입니다. 그래도 부분적으로나마 남북이산가족 상봉도 이루어지고 하는 현 시점에서 남한으로 간 가족을 찾아보려는 시도들도 끊임없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도 감안을 한다면 더 많은 분들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가족을 찾아 나서지 않을까 생각이 됩니다. 결과로는 또 새로운 이산가족들이 생기고 만나고 헤어지는 현상도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북한이 남한에 비하면 여러 가지로 어려운 것은 굳이 부정할 수 없는,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함께 살 수는 없다고 해도 서로 만나서 그동안의 쌓이고 쌓인 그리움도, 회포도 나누고 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다면 헤어진 가족들에게도 조금이나마 마음에 위안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예진: 맞습니다. 그래서 이산가족상봉 문제는 앞으로도 계속 남한과 북한이 꼭 해결해야할 숙제가 될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탈북으로 인해 생기는 새로운 이산가족의 문제도 짚어보죠. 요즘엔 먼저 탈북한 분들이 열심히 돈을 벌어서 중개인, 그러니까 브로커에 돈을 주고 북한의 가족을 바로 남한으로 데려오는 경우가 많잖아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많은 탈북자분들이 북한에 남겨진 가족들을 데려오고 있는데요. 사실 처음부터 탈북을 결심하고 가족을 데리고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일로 나왔다가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혼자서 한국에 오는 경우들도 많거든요. 그러다보니 한국에 와서 돈을 좀 벌어서 비용이 마련되면 가족부터 데려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브로커 비용이 부담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안내자인 브로커의 안내를 받으면서 오기에 비교적 안전하게 오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저도 하나센터 강의 등으로 새로 입국한 탈북자들을 만나는 기회가 종종 있는데 직송되는 경우들이 많았습니다.
이예진: 네. 그리고 하나센터는 한국에 와서 초기 정착기관인 하나원에서 달라지는 생활방식에 대해 배우고 나온 뒤에 거주지마다 탈북자들의 지역적응을 좀 더 세밀하게 돕는 기관이죠.
마순희: 네. 그리고 직송이라는 건 남한에 먼저 온 탈북자가 브로커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북한의 가족을 데려오는 탈북방식을 우리들끼리 이르는 말이랍니다. 지금은 한국에 입국하는 탈북자들 중에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봅니다. 물론 요즘은 여러 가지 환경 때문에 입국하는 탈북자들의 수가 많이 감소하기는 했거든요. 그전에는 하나센터 강의를 나가면 한 기에 나오는 교육생이 10여 명은 되었는데 지금은 4-5명 될 때도 있고 심지어는 한두 명일 때도 있었거든요. 아마도 국경 통제가 심해서라는 원인도 있고 또 브로커 비용도 예전보다는 엄청 올라서 그 부담도 역시 원인으로 작용할 것 같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이예진: 그렇군요. 탈북하는 일도, 남한에 있는 가족과 만나는 일도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은데요. 반대로 탈북으로 가족이 흩어지게 되는 경우들도 있죠?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탈북한다는 게 쉽지 않은, 목숨을 건 과정이라고 해야 맞을 정도로 모험의 연속 아닌가요? 제가 이번에 만난 분들 중에는 탈북을 도와주는 브로커 일을 하던 친구도 있었어요. 7-8명씩 조를 무어서 탈북을 시키는데 한 조가 발각되어 전부 잡히는 바람에 북한에서 더 살 수가 없어서 성공한 한 조 사람들과 함께 본인도 탈북한 거죠. 탈북하던 한 조가 보위부에 걸리면 자기가 위험에 처하는 것은 시간문제거든요. 잡혔다 싶으면 불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 북한의 현실입니다. 한국드라마에서처럼 묵비권 행사하고 변호사 선임하고 뭐 이런 것은 상상도 못 하는데요. 오죽하면 마지막엔 기관차 즉 기차대가리를 훔쳤다고 한다는 말이 나오겠나요?
이예진: 그건 무슨 말인가요?
마순희: 얼마나 조사가 심하고 육체적으로 고통을 가했으면 훔치지도 않은 기관차를 훔쳤다는 말을 하는 거죠.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진술하지 않고는 못 배기거든요. 그 친구도 가족들에게는 전혀 알리지도 못 하고 갑자기 한국에 오게 되다보니 항상 제일 힘든 것이 식구들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하더라고요. 지금은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아마 그 청년도 머지않아 가족을 데려 오리라고 생각합니다.
이예진: 네. 탈북과 함께 가족이 헤어지게 된 이들의 얘기는 다음 시간에 더 들어봅니다.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이예진: 여기는 서울입니다.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