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취미가 직업이 되면 그 취미마저 없어지는 거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지만 재미있다고 생각하던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일도 더 신나게 하지 않을까요?
여기는 서울입니다.
취미처럼 좋아하던 일을 평생 직업으로 삼은 탈북자들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이예진: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 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이예진: 지난 시간에 기회를 성공으로 만드는 탈북자들의 얘기를 들어봤는데요. 이번에는 직업에 대한 다른 고민에 대해 얘기 나눠보죠. 자신의 좋아하던 걸 직업으로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 사실 남한 토박이들도 많이 합니다. 탈북자 분들은 어떨까도 궁금해지는데요. 북한에서 탁구를 재미있게 쳐봤던 분이 남한에 와서 아예 코치가 됐다면서요?
마순희: 네, 정말 인상이 깊었던 친구였습니다. 북한에서는 부모님이 농촌태생이면 자식들도 어쩔 수 없이 농촌에서 농장원으로 일해야 하는 것이 운명이거든요. 그래서 부모님이 맏딸인 그 친구라도 농촌을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서 어릴 때부터 탁구를 배우게 했답니다. 혹시 기자님도 기억나세요? 1991년에 세계 탁구선수권대회에서 남북단일팀이 세계 최고의 탁구종주국이었던 중국을 꺾고 단연 1등의 영광을 차지했었던 것을요.
이예진: 그럼요. 한국에서도 그 감격의 순간에 눈물 흘리신 분들 많았거든요.
마순희: 이분희, 현정화 두 선수가 함께 들어 올리던 황금트로피와 전 세계를 향해 울려 퍼졌던 그날의 아리랑을 들으면서 북한에 있을 때 우리도 모두 눈물을 흘렸거든요. 그런데 그 때 탁구 꿈나무로 희망에 부풀던 12살 어린 그 친구도 텔레비죤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고 자신도 꼭 이분희 선수처럼 훌륭한 탁구선수가 되어 부모님을 평양에서 살게 해드리겠다는 야무진 꿈을 다시 한 번 새겼다고 해요. 그리고 그 해에 열린 14세 이하 청소년대회에 함경북도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평양에서 경기를 치르게 되었답니다. 사실 북한에서 14세 이하 청소년탁구대회에 두 번이나 올라간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정작 체육단에서 탁구선수를 모집하러 와서는 특출하지 않은 이상에는 부모의 직업이나 경제력을 더 먼저 보다보니 그에게는 선발될 기회가 안 오더랍니다. 하긴 열악한 북한의 실정에서 모든 것을 다 부담해야 하는데 탁구공도 몇 번씩 땜질해서 써야하는 힘없는 농민의 자식에게는 선발된다 해도 끝까지 견딜 자신이 없다는 것이 현실이긴 했답니다. 그 후 고난의 행군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행방불명이 되어 10대 소녀였던 그가 두 남동생을 돌보면서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답니다.
이예진: 여건이 안 되어 꿈은 접을 수밖에 없었겠군요.
마순희: 그렇죠. 그러다 한국에 와서도 중국에 계시던 어머니가 북송되어 감방생활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답니다.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정신없이 돈을 벌었고, 그 돈을 모두 북한에 보내 어머니가 감방에서 무사히 살아나오도록 했습니다. 어머니를 한국에 모셔오기까지 5년을 그렇게 자신보다 가족을 위해 살았다는 기특한 여성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나가다가 우연히 탁구교실 간판을 보게 되었고 그 때 ‘아, 나도 탁구 칠 줄 아는데’라는 생각이 언뜻 들더래요. 저절로 발길이 탁구연습장으로 이어졌고 한 시간을 신나게 땀을 흘리면서 탁구를 쳐보았답니다. 그의 모습을 지켜보던 관장님이 탁구는 어디서 배웠는지, 탁구를 해볼 생각은 없는지 관심을 보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생활체육으로 탁구를 많이 하는데 그 정도의 실력이면 조금만 연습하면 일반인들이 참가하는 아마추어대회에 나가도 손색이 없을 것이라고 희망을 주었대요.
이예진: 그만큼 실력이 좋았다는 거네요.
마순희: 그렇죠. 북한에서 평양으로 대회를 두 번씩이나 나갈 정도면 실력이 높지 않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그 때부터 하루 일이 끝나면 탁구교실에 연습하러 다니게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탁구기술을 배워온 터라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늘었습니다. 탁구 치는 모습이 너무 세련되고 예쁘다며 사람들은 박수를 쳤고 모두들 그에게서 수업받기를 원했다고 해요. 그래서 그 여성은 정식으로 탁구 교실 강사가 되었고 그 이후부터 아마추어대회들에 나가기도 했는데 대회에 나가기만 하면 상을 휩쓸 정도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도 서울에서 열리는 탁구대회에 나가서 개인전, 단체전 모두 상을 받았다고 해요.
이예진: 그렇군요. 조금 일찍 재능을 발견했으면 아무추어가 아닌 국가를 대표하는 대회에서도 활약할 수 있지 않았을까, 왠지 아쉬워지는데요. 자신이 재미있게 느끼던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건 부러워할 일인 것 같아요.
마순희: 그렇죠. 재미있고 좋아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축복이죠. 누구나 어떤 형태의 일이건, 그것이 육체적인 노동이던 정신적인 노동이던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그렇다면 자신이 즐겁고 재미있고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는 것만큼 큰 축복은 없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이라고 해서 다 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자신이 노력해야겠지요. 자신이 재미를 느끼는 일을 직업으로 도전해볼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 탈북민들 중에는 북한에서 연극영화대학을 졸업하고 한국에 가면 꼭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하던 분도 있어요. 그 분은 한국에 와서 다시 대학의 연극영화과를 졸업하고 조감독, 조연출 등을 다 거쳐서 지금은 유명감독으로 활약하고 있죠. 그 감독의 영화도 제가 알고 있는 바로는 네 편정도 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또 지금 탈북자들 속에서 이름보다는 허 PD로 더 많이 불리는 50대의 남성분도 계시는데, 그 분은 북한에서 아버지가 사진기로 사진도 찍으시고 영사기도 돌리셨는데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꼭 그런 일을 해보고 싶었대요. 그런데 하나원 교육을 받으면서 캠코더로 영상을 찍고 만드는 모습이 그렇게 멋져 보이고 자신이 꼭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답니다.
하나원을 나오자마자 자그마한 캠코더를 사 가지고 혼자서 연습하면서 영상 찍는 재미에 흠뻑 빠져 버렸답니다. 당시에는 디지털 영상 기술이 처음 나오던 때라 학원비도 2000만 원, 만8천여 달러 정도 하였는데 자신이 받은 정착금에서 집세와 관리비를 제외한 금액 전체를 학원비로 내고 학원에 등록했습니다. 40대 초반에 한국에 왔기에 디지털영상학원에 배우러 갔더니 학원에서는 영어도, 컴퓨터도 처음 접하는 그를 가르치기 어려워 학원비 돌려줄 테니 제발 그만 배우라고 했다네요. 하지만 그분은 오기가 생겨서 ‘이 기술, 신이 아닌 사람이 만든 거 맞죠? 그리고 누구든지 노력만 하면 배울 수 있는 것이 맞죠?’ 하고 물으니 원장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그 대신 그 분은 조건이 있다고, 남들이 10가지를 배울 때 나는 한 가지를 배워도 좋으니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했답니다. 어린 딸과 부인이 있는 가장이었던 그는 낮이면 기술을 배우고 새벽시간과 밤중에는 세탁물 납품과 의약품 납품을 해서 생활비를 벌면서도 힘든 줄 몰랐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정말 못 해낼 일이 없다는 것을 저는 그 분을 보면서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예진: 자신의 관심분야를 계속 연구해서 특화시키다보면 허 PD님처럼 전문가가 되는 거죠. 다음 시간에는 한국에 와서 가진 새로운 꿈을 실현시킨 탈북자들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이예진: 여기는 서울입니다.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