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이라는 신선함

‘새터민 복서' 최현미(24)가 지난 2014년 서울 노원구 과학기술대 특설링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슈퍼페더급(58.97kg급) 챔피언 타이틀 1차 방어전에서 태국의 롱마니트 시리완을 8라운드 TKO로 꺾은 뒤 기뻐하고 있다.
‘새터민 복서' 최현미(24)가 지난 2014년 서울 노원구 과학기술대 특설링에서 열린 세계복싱협회(WBA) 슈퍼페더급(58.97kg급) 챔피언 타이틀 1차 방어전에서 태국의 롱마니트 시리완을 8라운드 TKO로 꺾은 뒤 기뻐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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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경쟁은 자본주의의 산물입니다.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만만치 않다는 사람들이 많은데요. 하지만 반대로 경쟁은 자신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여기는 서울입니다. 경쟁을 즐길 줄 아는 탈북자들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이예진: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 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이예진: 북한에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경쟁을 좋지 않게 보는 것 같지만 정작 경쟁이라는 것 자체를 신선하게 받아들이는 탈북자 분들이 많이 계시다면서요?

마순희: 그럼요.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북자들의 사례를 찾아가다 보면 그런 분들을 참 많이 만나게 됩니다. 마산에서 한 중소기업에서 차장으로 일하는 탈북 남성분을 만났었는데 그 분의 사례는 그러한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양강도의 한 기업소에서 잘 나가던 간부 출신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탈북을 도와주다가 보위부의 잠복에 걸려서 감옥생활을 했답니다. 병보석으로 나와서는 더는 그 곳에서 살 수 없다는 생각에 탈북을 했고 대한민국에 입국했습니다. 그런데 그 분을 만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너무나도 당당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분은 한국에 와서 북한에서 지녔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았다고 했습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대한민국에 왔으면 대한민국에 어울리게 살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장비학원에 갔고 자격증도 땄는데 회사에 들어갔더니 북한에서 왔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하더랍니다. 사실은 북한에서 쟁쟁한 중앙대학을 나왔고 한 기업소의 간부였던 그였지만 그런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비호할 생각은 없었다는 겁니다. 오직 경쟁으로 승부하겠다는 생각으로 남들이 쉬는 시간에도 쉬지 않고 기계의 작동을 익혔답니다. 휴식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현장에서 지내면서 노력한 거죠. 그래서 회사의 거의 모든 중장비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높은 기술자가 되었고 지금은 자신을 그렇게 무시하던 사람들을 뛰어넘어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답니다. 그 분이 그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대한민국이 경쟁사회라고 힘들어 할 필요는 없다. 사람이나 사회나 경쟁이 없으면 발전할 수 없다'고요. 저는 그 분을 보면서 경쟁이 결코 힘들고 어려운 것만이 아닌 더 높이 날아오르게 하는 추동력이라는 것을 한 가지 더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예진: 누구에게나 똑같이 차례지고 잘하는지, 못하는지 결과에 따른 성과도 없다면 잘하려고 하는 사람도, 사회발전도 전혀 없겠죠. 특히 탈북자들 중에는 북한에선 기대할 수 없던 기회와 그런 기회를 자신이 선택해서 실력을 인정받고 그에 맞는 성공이 뒤따른다는 것에 큰 의미를 두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요.

마순희: 맞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 북한이탈주민들의 경우에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나 기회의 평등 같은 것이 오히려 더 부담이 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자리도 자신의 적성에 맞는 직업으로 자신이 직업훈련도 받고 취직도 해야 되는 것이 힘들다는 거죠. 처음에는 오히려 북한처럼 일자리를 배치해주었으면 좋겠다고도 한답니다. 그것이 자신의 적성에 맞지 않더라도 의무적으로라도 출근을 하면서 직장생활을 해나갈 수는 있다는 겁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다보면 그게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깨닫게 되거든요. 언제든지 자신의 적성이나 조건에 맞게 일자리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다고 하기도 한답니다.

연세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연세의료원에서 책임 간호사로 근무하는 한 여성은 하나원 기간 시간을 아껴 대학에 갈 준비를 했다고 하던데요. 매일 새벽 남들보다 한 시간 반을 더 일찍 일어나서 운동장을 돌면서 영어단어를 외우고 외래어도 익히고 대학입학을 위한 참고서적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하나원 나온 후에는 북한에서 대학을 졸업했기에 특례입학이 안 되더라도 3학년에 편입하려고 마음먹었는데 편입까지는 겨우 7개월이라는 시간이 주어졌답니다. 편입이라 특례입학도 안되고 오직 당당히 경쟁해서 자신의 성적으로 승부해야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예진: 편입까지 특별 전형처럼 해주지는 않으니까요. 그런데 처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걸 알고 도전한 것도 대단한데, 거의 경쟁 없이 수월하게 대학교 입학이 가능한 특별전형 제도를 놔두고 남한 학생들과 오직 실력으로 경쟁해서 학년 중간에 들어가는 편입제도를 이용했다는 것도 정말 대단하네요.

마순희: 무려 1000명의 지원자 가운데서 400명이 서류 합격자들 중 면접시험을 거쳐서 8명을 선발하는, 코끼리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어려운 과정이었습니다. 그 여성은 편입에 통과하여 의학대학 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책임간호사로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의료인의 대열에 당당히 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 분은 학장실 문을 두드렸대요. 북한에서 왔고, 할아버지가 의료인이었고, 기독교 쪽에서 일하다가 이 여성도 북한에서 고초를 겪었다고 말하면서 그래서 연세대학교에 꼭 가고 싶다고 도와달라고 했다고 해요.

이예진: 맞아요. 한국에서는 그렇게 문을 두드리는 분들에게 더 기회가 오죠.

마순희: 그러니까요. 또 저희 아파트 위층에 살고 있는 부부의 이야기인데요. 남편은 군관제대군인이었는데 북한에서 교원을 했답니다. 당에서 제대군관들에게는 고등중학교 학생들에게 군사학을 가르치도록 방침이 내려왔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학교가 자기가 다닐 때와는 달라도 너무 달라져 있더랍니다. 교원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이 아닌 학생들에게서 물건이나 돈을 계속 받아내야 하는 것이 그렇게 싫을 수가 없더랍니다. 마침 한국에 나온 누나의 권유도 있고 해서 교원을 그만두고 일반 직장에 적을 두고 있다가 가족과 함께 탈북했습니다.

배를 타고 오다보니 브로커 비용이 다른 사람들의 배로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브로커 비용을 갚느라고 오자마자 일용직으로 일했답니다. 그런데 그 때 함께 일하던 동료 중에서 그가 탈북자 출신이라는 것을 알고 일할 줄도 모르고 체력도 약하고 뭐 할 줄 아는 게 있겠느냐고 은근히 무시하는 사람이 있기에 상처를 많이 받았대요. 하도 힘들어 포기할 수도 있었던 그 때, 함께 일하던 또 다른 지인이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해주던 말이 큰 힘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살고 있다고 합니다.

'이 사회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다, 그러니까 이 사회가 굴러가는 거다' 그 말이 눈물겹도록 고마웠고 그 분들의 이해와 도움으로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어려운 일용직을 이겨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 분은 자기가 북한에서 교원으로 일했는데 한국에 와서 이런 막일을 하면서 차별까지 당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면 결코 이겨나가지 못 했을 것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그 후 그 분은 취업훈련을 받고 정규직으로 회사를 다니고 있는데 지금은 이 사회를 위한 봉사도 하면서 열정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며칠 전 그 분의 차를 타고 이동한 적이 있었는데 차안에 웬 119 소방대 제복이 걸려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분은 양천구 소방대소속 의용소방대원이라는 것입니다.

이예진: 의용 소방대원이라는 게 뭔가요?

마순희: 소방대원을 보조하는 일을 봉사활동을 하는 걸 말하더라고요.

이예진: 민간인들이 소방대원들의 일을 돕는 거군요.

마순희: 네. 자신도 정규직으로, 아내도 미화원으로 열심히 맞벌이를 있고 고향을 떠날 때 다섯 살이었던 아들도 어엿한 중학생으로 자랐고, 그래서 항상 오늘의 행복이 크면 클수록 고마운 대한민국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의용소방대원으로 근무하는 지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기도 하는 좋은 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화재현장에서 헌신적으로 소방대원들을 보조하는 그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는 그가 산 같이 커보였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답니다. 그의 소개로 신청 서류도 접수시키고 면접시험도 보고 해서 어렵지만 갈망하던 의용소방대원이 된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고 합니다.

이예진: 자원봉사로 하는 거지만 조건이 까다롭군요. 돈을 받는 것도 아니잖아요.

마순희: 그 분은 심사위원 5명이 주런이 앉아서 면접을 볼 때의 그 설레던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하면서 웃더라고요. 그동안 화재 현장에도 몇 번 동참해서 소방대원들의 업무를 보조해보기도 했다는 그 분은 지금도 도움이 필요한 현장을 목격하게 되면 항상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고 합니다. '나는 의용소방대원이지, 그러니까 나는 반드시 저들을 도와야 하는 거다', 주문처럼 자기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 주저 없이 어려운 일에 뛰어들어 도움을 드린다는 그 분이 유난히 멋져 보였습니다.

이예진: 마음이 시켜서 어려운 이웃을 돕는 분들을 보면 꼭 돈이 많거나 성공한 사람들이 아니더라고요. 탈북자 분들 중에서도 일하는 틈틈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분들을 보면 마음이 부자인 분들이 더 많은 것 같았는데요. 그저 이웃을 돕겠다는 마음으로 멋진 경쟁을 통해 의용소방대원이 되신 탈북자 분만 봐도 알 수 있는데요. 이런 분들이 진짜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계신 분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이예진: 여기는 서울입니다.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