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이산가족 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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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남북 이산가족들의 슬픔은 과거의 일만은 아닙니다. 6. 25 전쟁으로 인한 이산가족뿐 아니라 탈북으로 인한 이산가족의 아픔 역시 만만치 않다고 하는데요. 여기는 서울입니다. 최근 이산가족 관련 상담 사례와 문제점 등을 짚어봅니다.

이예진: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 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이예진: 최근 제 20차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렸었잖아요. 탈북자 분들도 많이 보셨을 텐데 어떤 얘기들을 하시던가요?

마순희: 항상 이산가족상봉행사가 있을 때마다 그러했지만 저는 이번 행사 때에 제일 많이 눈물을 흘렸던 것 같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자들 가운데 고령인 분들이 많아서 마음 아프고 또 저 역시 조금씩 나이를 더 먹어가는 탓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거기에 그전에는 회사 다니느라 시간상 많이 보지 못한 데에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저 자신의 일로 느껴지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더욱이 헤어질 때의 애절한 모습은 차마 지켜보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고령이신 분들이 눈물을 흘리시며 손가락을 걸고 다시 만나기를 기약하시는데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인지 그것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이라도 함께 보낼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마음을 아프게 하겠습니까?

주위에 살고 있는 많은 탈북자분들이 저처럼 그렇게 생각하시더라고요. 저의 동네에 살고 계시는 분들이랑 함께 동네공원에서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요즘에는 화제가 이산가족상봉에 대한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50대 초반인 한 여성은 북에 계시는 부모님 생각에 이야기를 하다말고 눈시울을 적시었고 80대의 할머니는 그래도 이번에는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지는 않았다고 하시더라고요. 항상 TV를 보면서 자신의 생각을 하게 되는데 금년까지 북에 두고 왔던 손자와 딸과 사위, 그리고 외손녀까지 모두 데려왔기에 자기는 이제 눈을 감아도 여한이 없다고 하시더라고요. 사실 할머니는 가족들을 데려오면서 브로커비용 문제로 힘든 갈등을 겪기는 했지만 그나마 얼굴이라도 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예진: 탈북자 분들 중에도 사실 북한에 가족이 계신 분들이 많아서 짧은 기간 만나고 헤어진 이산가족 분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이해가셨을 것 같은데요. 6. 25 전쟁 때의 이산가족부터 탈북으로 인한 최근의 이산가족들의 상담사례도 있었나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제가 상담을 통해서 알게 된 70대의 어르신의 이야기인데요. 처음 상담 받으실 때에는 기초생활수급 신청에 대해서 상담을 하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잘 설명을 해드렸었는데 제가 북한출신이라는 것이 말투에서 알렸나봐요. 한 번 만나서 상담 받을 일이 있다고 간곡히 부탁하시는 거예요. 어르신이 하도 간곡하게 부탁하시기에 마침 그 분이 사시는 곳이 저의 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라 퇴근시간에 그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전화로 긴 이야기를 할 수 없어서 폐를 끼쳐서 미안하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었습니다. 평안북도의 어느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일하시다가 20여 년 전에 탈북하게 되었답니다. 아들과 둘이서 살고 있었는데 아들을 이모네 집에 맡겨놓고 혼자서 떠난 것입니다. 사실 돈이라도 벌어가지고 간다고 중국으로 떠났는데 바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취직하여 돈도 적지 않게 모으게 되었고 생활하시는 데는 아무 불편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입을 것 먹을 것 걱정 안 하고 잘 살고 있지만, 북한에 혼자 남겨진 아들을 생각하면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정년퇴직하고 시간이 허락되자 무작정 고향이 마주 보이는 중국 단동으로 떠났답니다. 그곳에서 조선으로 오가는 장사꾼들을 만나면 돈이라도 찔러주고 아들에게 기별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이모네 집 주소까지 적어 가지고 나름대로 준비는 한 거죠. 그런데 그것이 매일 밤 머릿속에서 수십 번을 더 그려보면서 계획한 것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고 해요. 위험하기도 하고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다시 한국에 와서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답니다. 그러면서 잘 아는 브로커가 있으면 브로커 비용을 내면서라도 돈을 보내고 싶으니 소개해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브로커 비용을 지불하는 것보다 본인이 직접 나서서 하는 것이 더 경제적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셨던 것 같습니다.

이예진: 브로커가 중개인 역할을 하면서 중간에서 떼 가는 돈이 많으니까요. 결국은 북한의 아들을 만나지 못했나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흔히 함경북도나 양강도 쪽은 브로커들이 많이 활동을 하고 있지만 평안북도 같은 곳에까지 가기는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아들이 자그마한 장사라도 할 수 있도록 밑천을 마련해 주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다는 그 어르신의 소망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 하고 있습니다. 그 어르신은 지금도 전화통화를 하면 안타까운 마음을 털어 놓으십니다. 북한이 이렇게 꽉 막히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탈북자들이 북한에 보내는 돈의 20-30%, 많게는 절반까지도 브로커 비용으로 들어가는데 차라리 국가에서 은행 하나라도 개방을 해서 허락을 하면 그 수수료만 해도 엄청난 이득일 테고 우리도 안전하게 돈을 보낼 수 있을 텐데 하시면서요.

이예진: 그게 가능한 날이 오기를 바라는 분들도 많이 계실 것 같네요. 지금 아버지가 북한에 있는 아들을 찾겠다는 내용을 들으셨는데 예전에도 이 시간을 통해 말씀 나눈 적이 있었지만 남한이 고향인 자녀가 탈북해서 남한에 사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찾는 경우도 종종 있었던 것 같아요.

마순희: 그런 사례들이 많습니다. 저희들 주변에도 한국에 와서 가족들을 찾는 사례들이 적지 않습니다. 물론 부모님 같은 경우에는 살아계시지 않거나 혹은 너무 고령이라서 잘 알아보지 못하시는 경우들도 있지만 그렇게라도 만나게 되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 모른답니다. 저와 하나원에서 한 기에 나온 언니도 한국에 와서 고모님과 삼촌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 한 분은 미국에 계시는데 조카까지 데리고 와서 꿈같은 상봉을 하시더라고요. 미국으로 돌아가실 때에는 그 언니도 여권을 수속해 함께 미국에 가셨었거든요.

아, 가고 싶다고 늘 입버릇처럼 외우군 하셨는데 미국에 갔으니 이제 그 언니를 다시 만날 수 없구나 생각했는데 1년이 좀 지나 다시 돌아 오셨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살기 좋기는 하지만 그냥 고모 집에 얹혀서 살 수는 없는 거잖아요? 그냥 손 놓고 놀 수 없어서 소일거리로 몇 개월 일을 하게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자주 만나지도 못 한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국과 달리 대중교통이 그렇게 발전한 것은 아니라네요. 워낙 넓은 곳이라 자가용이 없으면 갈 수 있는 곳이 없더래요. 새로 만난 가족들을 따라서 가기는 했지만 자기 생활이 다 있다 보니 매번 와서 데려가 주지 않으면 만날 수도 없더랍니다. 그래서 차라리 그럴 바에는 아들도 있고 친구들도 있는 한국에서 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돌아왔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양강도에서 아들과 두 딸을 데리고 오신 한 어머니는 한국에 와서 시댁 식구들을 만났습니다. 남편은 6.25때 의용군으로 입대했었는데 북한에서 사망했지만 한국에 오니 호적도 그대로 있었고 집안 어르신들도 다 큰 자식들을 데리고 온 며느리를 친자식처럼 맞아 주었답니다. 지금도 그 어머니는 추석이나 설 명절 같은 때에는 자식들과 함께 꼭 종가집이 있는 지방으로 가서 집안행사에 참가하군 하더라고요.

이예진: 그런 분들은 바라던 대로 가족과 만나 원하던 삶을 살고 계시네요. 그런데 가족을 찾았지만 만나지 못한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다음 이 시간에 자세히 들어봅니다.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이예진: 여기는 서울입니다.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