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이예진입니다. 이산가족들의 만남은 언제나 눈물겹습니다. 70여 년 만의 짧은 만남, 그리고 다시 기약할 수 없는 헤어짐, 그런데 잠깐의 만남 후에 제 자리로 돌아가는 삶이 더 낫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기는 서울입니다. 탈북자들의 옛 가족과의 만남, 그 이면을 들여다봅니다.
이예진: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 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마순희: 네. 안녕하세요?
이예진: 탈북자들 가운데 남한이 고향인 분들은 꿈에 그리던 가족을 찾아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경우가 있는데요. 반대로 가족을 찾았지만 만나지 못한 사례도 있다면서요?
마순희: 네. 가끔 어렵게 가족은 찾았지만 본인들은 전혀 생각지도 않은 재산상속 문제로 만나기를 기피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분 중에 황해남도에서 오신 어머니 한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의 아버지가 1.4 후퇴 때 남한으로 오셨고 그러다보니 북한에서는 월남자 가족이라고 많은 차별대우도 받으면서 어렵게 사셨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한국에 와서 새로운 가정을 이루셨고 슬하에 자식들도 여럿 있었지만 북한에 두고 온 가족을 한시도 못 잊어 하시고 이산가족 상봉도 신청을 하셨답니다. 그 어머니가 북한에 계실 때 남측에서 이산가족 찾기로 아버지도 신청하셔서 의뢰가 갔었는데 정작 당국에서는 본인들에게는 알려주지 않았고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하라는 지시를 주었답니다.
시간이 지나다보니 그 말을 전달받게 되었고 기어이 아버지를 만나야겠다는 일념으로 한국으로 오게 되었고 아버지를 찾기 시작한 거죠. 이산가족상봉을 신청했다면 적십자사에는 명단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찾았기에 해당기관을 통해서 비교적 어렵지 않게 아버지를 찾게 되었습니다. 열두 살 때 헤어진 딸과 아버지가 꿈처럼 다시 만났으나 그게 그렇게 간단치 않았답니다.
이예진: 왜 어려웠을까요?
마순희: 실향민 대부분이 그러하시듯 아버지는 열심히 돈을 모으셔서 재산도 적지 않게 이루어 놓으셨으나 지금은 연로하셔서 활발한 활동은 못 하시더랍니다. 한국에 와서 새롭게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도 여럿 되는데 모두 한자리씩 하고 잘 살고 있었는데 그 가족들이 딸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유전자 검사까지 하게 되었고 수차례 가정법원에 오가면서 소송을 거쳐서 몇 달 전에 겨우 호적에 맏딸로 올리게 되었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그 어머니가 전화가 왔습니다. 방송국 쪽으로 아는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줄 수 없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만난 사연을 잘 알고 있기에 지금은 잘 지내고 계신지 물어 보았더니 아버지를 찾았지만 지금 만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들이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서 요양시설에 가 계시기에 만날 수 없다고 하고 사시던 집도 모두 처분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형사님들을 통해서 해결해보려고 해보았는데 가정사라 어떻게 도와드리기 어렵다고 하더라는 겁니다.
이예진: 개인적인 일이라는 거죠.
마순희: 네. 그래서 방송국에 나가서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얼굴이라도 한 번 뵙고 싶다는 그 어머니의 소원을 어떻게 이루어드려야 될지 마음이 아팠습니다.
이예진: 이산가족으로 살았던 가슴 아팠던 시간을 이겨내고 어떻게든 부모를 찾아왔는데 그것마저도 쉽지 않네요. 아버지나 어머니가 돌아가셨거나 다른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는 아버지의 또 다른 자녀들이 핏줄임을 믿지 못하거나 받아들이기 싫은 부분도 사실상 있다는 얘기인데요. 그만큼 세월이 많이 흘렀다는 얘기겠죠.
마순희: 네. 그리고 그게 남과 북의 현실이고 해결해나가야 할 문제인 거죠. 어떤 아버지는 남한에서 재산을 많이 모았지만 물려줄 자식이 북한에 있어서 주지도 못하고, 어떤 자녀는 아버지의 얼굴만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남한의 또 다른 자녀들과의 문제로 만나지 못하는 것 등은 통일 이후로도 쭉 통일정부가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산가족 1세대의 숫자가 점점 더 줄어들수록 그런 문제는 커지겠죠.
하지만 아직 핏줄끼리의 만남은 여전히 눈물겹습니다. 공식적인 남북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행사가 계속 진행되는 것도 아니고 신청해도 선정될 수 있는 확률이 워낙 낮다보니까 또 다른 방법으로 가족이 만나는 경우들도 종종 있다고 들었습니다. 실향민들이 이북5도청 행사나 기타 탈북자들과 함께 할 수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기회에 고향에 대한 소식들을 많이 접하군 하는데요. 가끔은 고향에 두고 온 가족이나 친척들의 소식을 접할 때도 있거든요. 우리 탈북자들이 브로커 등을 통해서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는 것처럼 그들도 그런 통로를 통해서 북에 있는 가족들을 도와주는 사례도 있었고요.
이예진: 아무래도 남북이산가족 행사 같은 공식적인 창구를 통해 남과 북에 헤어져 사는 가족들이 만나기도 하지만, 그게 모두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아니다보니 경쟁률도 높죠. 이번에도 무려 663대1이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 비공식적으로 가족을 만나는 경우가 꽤 있나 봐요?
마순희: 제가 잘 알고 있는 브로커 일을 하는 여성의 말에 의하면 미리 약속을 하고 중국여행을 통해서 만나는 경우도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여러 가지로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라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하지만 만나고 싶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데 공식적인 창구를 통한다는 것이 정말 바라기가 어려운 일이다보니 그런 방법도 이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개된 비밀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산가족상봉을 통하여 북한의 가족에게 건넨 물건이나 현금 같은 것이 고스란히 본인의 수중에 남는 게 아니라는 점에서 볼 때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한 도움은 브로커비용만 제한다면 그런 부담은 없는 것이니까 많이 이용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예진: 탈북자들도 중개인, 브로커를 통해 어떻게든 북한의 가족과 연락을 하거나 돈을 부치는 분들이 많이 있던데요. 어떻게든 만나서 같이 살면 좋을 텐데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은 것 같아요.
마순희: 그렇습니다.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모두 탈북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만나지 못하는 그리움은 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제도 TV를 보면서 저도 공감하게 되던데요. 이산가족상봉에 나가셨던 분들에 대한 심리 상담치료를 해드린다고 하더라고요. 70여 년 만에 만나게 된 상봉 당사자들의 반가움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짧은 시간 동안에 그동안의 회포를 다 풀 수도 없고 또다시 헤어져 살아야하는 그 고통이 얼마나 클지는 저희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탈북자들의 경우에도 사연은 다르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만날 수도 없고, 소식을 알 수도 없다보니 그렇게라도 한 번 만나게 된 그분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저와 가깝게 지내는 한 언니도 함경남도 출신이신데 장사를 하다가 못 받은 돈을 받으려고 중국에 나왔다가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한국으로 오신 경우인데요. 60대 중반인 지금도 일을 놓지 못하고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있습니다. 주위에서 엄마가 한국에 간 것을 모르고 있고 두 아들과 딸이 모두 북한에서 잘 지내고 있는데 괜히 연락해서 자식들에게 화가 미치기라도 할 것이 겁나서 연락도 못하고 있는 거죠. 다만 통일이 되던가 아니면 언제라도 연락이 닿게 되거나 하면 자식들을 도와주겠다면서 차곡차곡 저축하고 있습니다. 이번 이산가족상봉 방송을 함께 보면서 둘이서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이예진: 얼마나 연락하고 싶으셨을까요. 함께 살지는 못해도 소식만이라도 주고받았으면 하는 게 이산가족들의 마음일 텐데요. 오죽했으면 남과 북으로 헤어져 지내던 가족을 단 며칠 만나고 나서 다시 기약 없는 헤어짐을 하게 돼 마음의 병을 앓는 이산가족 어르신들이 부러웠을까 싶습니다. 다음 이 시간에는 탈북자들이 이산가족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을 들어봅니다.
찾아가는 종합상담소. 북한출신 전문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순희: 네. 감사합니다.
이예진: 여기는 서울입니다. 지금까지 이예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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