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청춘만세의 김인선입니다. 살다보면 뜻하지 않은 상처에 당황하는 일이 생깁니다. 종이에 베이고 모서리에 슥 긁히는 작은 상처도 때론 아프고 불편하게 여겨지는데요. 그런 상처로 아파하면 누군가는 호들갑이라고 하고, 또 누군가는 그게 얼마나 따가운지 잘 안다고 공감합니다. 그렇다면 남한과 북한 출신 청년들은 각자 얼마나 다른 상처를 받으며 살아왔을까요? 남북 청년들이 함께하는 인권모임 ‘나우’의 이정민, 김재동, 김강남 씨와 함께 청춘의 ‘상처’에 대해 이야기 나누어보겠습니다.
진행자 : 왜 이렇게 이마에 상처가 많아요?
김강남 : 보신 것처럼 저는 어릴 때 상처가 많았어요. 어릴 때부터 발개돌이 이였거든요. 저희 누나는 한 자리에 서있으라고 하면 다음 날에 와도 그 자리에 서 있는데 저는 여기 서 있으라하고 눈만 돌리면 없어지고 그 정도로 발발거렸기 때문에 상처가 많이 났죠. 어릴 적에는 모든 게 다 새롭잖아요. 비닐에 불을 지피고 나무에 끼워서 흔들면 찍찍찍 소리가 나고 연기가 촥 내려오고 되게 예뻐요.
진행자 : 뭔지 모르겠어요. (다 같이 웃음)
이정민 : 비닐하우스에 하는 비닐에 불을 붙이면 그 비닐물이 뚝뚝 떨어져요. 녹으면서 물이 떨어지는데 그것을 흔들면 이쪽저쪽에 떨어지면서 소리도 나고 축포같이 된다는 소리예요.
진행자 : 그럼 데이잖아요. 아까 이마의 그 상처들이 그때의 흔적들이군요.
이정민 : 머리는 안탔어?
김강남 : 머리도 타고 부스럼도 나고 그랬죠. 엄마가 너무 다치고 하니까 항상 손잡고 걸었던 게 지금도 기억나요.
이정민 : 북한에는 얼음이 많이 생기잖아요. 겨울에는 강에 나가서 뒹굴고 썰매도 타고 그러는데 폭포수가 있었어요. 울퉁불퉁 2~3미터 높이로 얼게 되면 정말 예쁜데요, 위에는 물이 맑게 흐르기 때문에 거기서 놀 수 있는 공간이 있어요. 밑으로 내려가면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날따라 굳이 그 위에서 계속 놀다가 내려간 거예요. 딱 떨어졌는데 중요한 신체부위가 버드나무에 걸린 거예요. 정말 너무 아파서 2~3분 동안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겨우 숨을 쉬게 됐을 때는 더 아픔이 찾아오죠. 절뚝거리면서 겨우 집에 왔는데 속옷을 벗어보니까 피가 나는 거예요. 찢어진 거죠. 엄마한테 상황을 이야기하니까 “애기만 낳을 수 있으면 돼. 죽지 않았으면 괜찮아”하고 상처를 보지도 않아요.
진행자 : 한국 같았으면 응급실부터 가고 엄마들이 울고불고 할 상황이네요. 그렇다면 곱게 자랐을 것 같은 재동 씨는 상처에 대한 어떤 기억이 있어요?
김재동 : 저는 어릴 적부터 타고나게 균형 감각이 없었나 봐요. 어릴 적에 걷다가도 넘어지고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고 심지어 방 문지방에 걸려서 넘어지기도 했어요. 자전거를 타다가도 넘어지다 보니까 무릎이 성할 날이 없었어요. 그럴 때마다 엉엉 한바탕 울었고요, 아버지는 엉덩이 한 대 때리시면서 빨간 약을 발라주셨어요.
이정민 : 북한에서는 상처가 생기면 물에 씻습니다. 깨끗해야 하니까 상처부위를 씻고요 된장을 바르는 사람부터 김치를 감싸는 사람도 있어요.
진행자 : 김치를요? 쓰리고 아플 텐데요?
이정민 : 쓰리고 아파서 상처부위가 절여져야 소독이 돼서 다른 세균이 못 들어 간데요. 그런 민간요법으로 치료를 해요. 그런 것들이 오히려 세균 감염을 시키잖아요. 저도 헌데라고해서 부스럼이 계속 생겨요. 세균이 계속 퍼지는 거죠. 그렇게 앓아서 다리에도 상처가 많이 있는데요, 이런 상처가 한 번씩 생길수록 몸에는 면역력이 생긴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남한에서는 다치게 되면 병원에 우선 가야하잖아요. 그리고 위험하지 않은 상처인 경우에는 마트에서 파는 저렴한 소독약을 비롯해서 약들도 많고 붕대도 많고요. 저는 여기서 붕대 보면서 너무 좋았어요. 그런 것은 북한에서 제가 다섯, 여섯 살 때 보고 못 봤거든요. 남한에서는 그렇게 하얀 붕대도 한번 쓰고 버리던데 북한에서는 절대 안 버려요. 광목천이든 뭐든 피 고름이 묻었으면 씻어요. 물에 씻어서 뜨거운 물에 끓여서 다시 또 감고 그래요. 여기는 상처가 나도 상처도 안 생기게 아물게 하는 약들도 많잖아요. 저도 발라봤는데 정말 신기했어요. 연고 약을 바르니까 딱지가 안 생기더라고요.
내레이션 : 상처에 대한 반응도,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도 남한과 북한이 처한 환경만큼이나 다릅니다. 정민 씨의 경우, 탈북 후 남한 생활을 하면서 작은 상처에도 병원을 찾는 사람들의 모습이 놀라웠다고 말합니다. 또 병원을 안 가고도 흉터 없이 치료가 가능한 다양한 의약제품이 있어서 신기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훌륭한 의약품이 있어도 흉터가 남는 상처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정민 : 1년이 지나도 2년이 지나도 더 또렷이 떠오른다 하면 상처든 추억이든 둘 중의 하나인데 아무래도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순간을 눈으로 지켜봤으니까요. 피를 토하면서 돌아가셨는데요, 그게 평생 상처로 남을 것 같아요. 탈북 과정이라든지 그런 것들에 대한 것도 많이 상처로 남겠죠. 그런데 상처는 오래 기억할수록 본인에게 안 좋은 것만 있는 것 같아요. 물론 다 잊고 사는 게 좋겠지만 그게 안 되더라도 저 나름대로 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는 것 같고, 또 그 상처보다 더 좋은 일들을 계속 생각해내면서 그렇게 사는 것 같습니다.
진행자 : 정민 씨 이야기를 들으니까 부끄럽네요. 겉으로 드러나는 상처 외에 마음의 상처 이야기를 하면서 저는 순간적으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저희 신랑이 계속 살찌는 저를 보면서 “내가 언제까지 이해를 해줄 것 같으냐, 여기서 더 살이 찌면 너랑 못살아” 이렇게 말하기에 “나 상처받았다”라고 얘기한적 있었어요.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제 수준에서 생각한 것이 그 정도 밖에 안 되서 창피합니다.
이정민 : 그런데요, 그게 정말 행복한 거예요. 제가 대한민국에 와서 본 애들의 상처를 보면 ‘엄마가 언니만 해주고 나는 안 해줘서 그게 어린 시절 상처로 남았습니다’ 이렇게 말을 하거든요. 그 얘기를 들을 때면 ‘너희들은 정말 행복 했구나’싶어요. 우리에게 그 정도는 상처 축에도 안 껴요. 탈북자 누구나 그런 심정일 것이고 여기 있는 강남 씨도 말 못한 상처가 다 속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큰 일, 탈북을 한번 겪게 되면 작은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있지 않냐 하는 것 때문에 꼭 나쁘다고 얘기하기 보다는 잘 승화하면 좋은 것일 수도 있다 생각해요. 그래서 기자님은 행복한 겁니다. 행복한 상처죠.
진행자 : 네. 인정하고 앞으로 남편의 구박을 잘 받아내겠습니다. (웃음)
김강남 : 북한에서의 제일 큰 상처는 가난이었던 것 같아요. 포괄적이긴 하지만 그걸 빼놓고 다른 것을 상처라고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아요. 모든 것은 가난에서부터 시작됐던 것 같아서요. 한국에 와서의 상처는 편견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편견이라는 단어도 내 생각에서부터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이건 편견이야, 괜찮아’ 라고 생각하기 전까지는 엄연한 상처니까요.
이정민 : 저는 항상 이렇게 생각해요. 내가 손해를 한 번 보면 다른 경우에는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겨내고 있어요. 그런데 강남 씨 말 대로 그것을 이겨내는 데까지는 한국에 정착해서 5년에서 6~7년, 그 정도의 시간을 탈북자들에게 줘야 해요. 그런 마음을 이겨내고 이 사회에 정착하는 동안에는 남한의 사람들이 기다려주시는 것도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저는 항상 하고 있어요.
김강남 : 탈북자들도 이런 수많은 고통과 마음의 상처를 내면서 여기까지 와서 성장하는 것 같아요.
진행자 : 마음의 상처는 어떻게 보면 우리가 성장하기 위한 하나의 필수 과정이군요.
다같이 : 네.
진행자 : 아까 제가 ‘저의 마음의 상처는 이런 거예요’라고 했을 때 정민 씨가 행복한 거라고 했는데 재동 씨는 어떤 상처가 있나요?
김재동 : 저는 어릴 적 8살 때 부모님이 이혼을 하셨어요. 너무 저를 가엾게 여기시더라고요. “아이고, 이런. 엄마 없이 자라는 녀석” 이러면서요. 저는 그때 그게 아픔인지도 인지를 못했었는데 스스로 ‘내가 그렇게 불쌍한 거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초등학교 시절을 지냈었어요.
진행자 : 지금은 그때의 그 상처가 아물었나요?
김재동 : 네. 저를 더 성숙하게 만들어주는데 일조를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거름이 됐던 것 같아요.
진행자 : 재동 씨 외에 다른 보통의 남한의 청년들은 어떤 것을 마음의 상처라고 하나요?
김재동 : 제 친구들은 가정 형편 아니면 형제지간에서 상처를 받더라고요. 우리 엄마, 아빠는 형만 예뻐하고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 취급한다는 그런 상처가 있어요. 아무래도 형제간의 갈등이 꽤 많았던 것 같아요.
진행자 : 남한의 청년들은 실패나 좌절을 겪거나 거절을 당하는 경우에 상처를 크게 받는 것 같아요. 부모님에게 무언가를 사달라고 요구했을 때 거절당하거나 열심히 공부했는데 대학진학에 실패했을 때, 또 취업문에서 계속 실패를 했을 때에도 상처를 받는 것 같아요. 두 분도 남한 사람이 되고 나서 ‘내가 이런 일로 상처받게 될 줄 몰랐어’ 싶었던 게 있었나요?
이정민 : 있죠. 남한에서 받는 상처는 다 행복한 상처다 생각했고 작은 상처들은 큰 상처로 치유된다고 믿었던 사람인데 이곳에서는 학생이다 보니까 성적에 대해서 많이 고민을 하게 되요. 이런 거 있잖아요. 곁에서 친구가 죽어라고 공부하지 않았는데 성적이 잘나왔다고 말하면 굉장히 기분이 나쁘면서 상처받아요. ‘내가 왜 저 친구보다 점수를 못 받았지?’라고 순간이나마 생각한다는 거죠. 결론은 상처라는 게 상대적으로 평가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서로간의 타인의 상처는 절대적인 것이라고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야 할 것 같고요, 절대적인 상처를 이겨내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상처를 겪었을 때 그 상처를 잊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본인이 겪고 있는 상처가 작은 경우에는 본인이 겪은 불행이 적다고 인지하시고 오히려 행복하다는 생각을 해주셨으면 좋겠어요.
김강남 : 저는 여자한테 한번 차였어요. 그때 엄청 상처를 받았죠.
이정민 : 한마디 거들자면, 본인이 스스로 그러더라고요. ‘두만강 건너면서도 안 울었었는데 여자랑 헤어지면서 울었다’고요. 그래서 그때 생각했죠. 상처의 깊이와 넓이는 눈으로 분간하면 안 되겠구나. 그 순간마다 슬프면 그게 상처인 거예요.
김강남 : 그렇죠. 사랑도 인생의 한 부분이잖아요. 그래서 ‘사랑이 성장한다’라는 것을 배웠어요. 사랑도 인생의 한 부분이잖아요. 그런데 거기서 상처를 받고 보니까 ‘내가 성장하는 구나’를 알았어요. 그래서 저는 청취자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요. “많이 만나보세요” 바람둥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당신 인생을 살아주지 않기 때문에 상관없어요.
진행자 : 남한에서 겪은 상처는 결국 이별의 상처였군요. 재동 씨는 최근에 상처를 겪은 일이 있었나요?
김재동 : 물론 예전에 겪었던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요, 쓰라린 것은 있어요. 요즘 제가 취업준비생 입장인데 서류전형부터 떨어지다 보니까 상처가 되더라고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흔들리더라고요.
진행자 : 하지만 취업이 된 뒤에는 지금의 과정이 또 큰 성장의 밑거름이 될 수 있으니까 힘내세요.
이정민 : 그렇죠. 제가 요즘 굉장히 꽂힌 말이 있는데요, 행복함을 아는 것은 불행이 있기 때문에 안대요. 아마 마음의 상처가 있기 때문에 지금의 행복도 느끼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되면서 여러분들이 받는 상처, 그리고 아픔, 그런 것들이 지금은 정말 힘겹고 견디기 어려울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고 더한 아픔도 있을 수 있으니까 인생은 그런 거라고 생각하시고 하루하루 잘 헤쳐 나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겠습니다.
김재동 : 지금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분들이 저마다 비슷한 문제에 처해있을 수 있고 혹은 각자 다른 문제를 안고 있을 수도 있는데요, 그냥 일상생활에서 작은 행복에서부터 웃을 수 있고 반응할 수 있다면 조금씩이나마 큰 상처를 치유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무엇보다 희망을 계속 잃지 않고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김강남 : 힘들면 힘들다고 표현하고, 즐거우면 즐겁다고 표현하고 혼자 끙끙 앓지 말고 주변 사람들과 나누세요. 그러면 여러분의 상처도 저의 상처도 더 빨리 회복될 거라고 저는 믿습니다.
내레이션 : 아무리 조심한다 해도 상처가 안 생길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자연스럽게 아무는 때가 오죠. 우리의 탈북 청년들은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는 방법도 터득해가고 있는 것 같은데요. 서로 다른 각자의 상처를 보듬어 주는 일, 언젠가 남한과 북한의 청년들이 꼭 해야 할 숙제가 될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청춘만세의 김인선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