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에 읽었던 동화 중 '스크루지 영감' 이라는 책이 있었습니다.
'스크루지'는 어찌나 인색한지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7년 전에 죽은 친구 유령이 몸에 쇠사슬을 칭칭 감고 나타나 스크루지 영감을 데리고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는 시간 여행을 합니다.
그리고 '스크루지'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미래를 보면서 자신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고 이기적으로 살았는지를 깨닫고 변화된 삶을 살게 되는데요.
이렇게 스크루지를 변하게 만든 건 무엇일까요?
오늘 <청춘만세>에서는 '나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권지연 이고요. 남북청년들이 함께 하는 인권모임 '나우'의 이정민, 김강남, 김재동 씨와 함께 합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이정민, 김강남, 김재동 : 안녕하세요.
진행자 :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했습니다. 만약 내 삶이 딱 하루 밖에 남지 않았다면 어떨까?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으세요?
김재동 : 저는 오늘 주제를 접하고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더라고요.
김강남 : 저는 요즘 그런 생각을 해보고 있어요.
진행자 : 젊은 사람들이 쉽게 해 볼 수 있는 주제는 아닌데 강남 씨는 그런 생각을 왜 하셨어요?
김강남 : 그냥 철이 드는 것 같아요. 하루는 좀 냉정한 것 같고 한 달이 남았다면 이런 생각을 해봤는데 처음엔 여행도 꼽아보고 여러 가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소용없더라고요. 저는 장애를 가진 어린 아이들을 위해 봉사하고 제 신체를 기증하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면 이름을 남기고 다른 생명을 살릴 수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이정민 : 저는 죽기 싫어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걸 생각하고 싶지는 않은데요. (웃음) 만약 내게 하루만 남았다면... 딱 하루잖아요. 저는 제 주변 정리를 할 것 같은데요. 북에 있는 가족을 포함해서 고마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고 그리고 내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쓰고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는 내가 없어도 잘 살라고 격려를 해 줄 겁니다.
진행자 : 하루만 남았다고 가정해보면 똑같이 이런 생각은 하셨을 것 같아요. 1분이 너무 소중하구나...
이정민, 김강남, 김재동 : 네, 맞아요.
진행자 : 평소에는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들이 많습니다. 지금부터 하루 남은 마지막 날의 시간표를 알차게 한 번 작성해 보죠.
이정민 : 저는 아침 10시에 일어날 겁니다.
진행자 : 하루 밖에 안 남았는데 그렇게 늦게 일어나요? (웃음)
이정민 : 항상 아침에 일찍 일어나느라고 고생했잖아요. 그걸 죽는 날까지 지키고 싶지는 않아서요. 아침 10시까지 자면 만족할 만큼 잤다고 생각할 것 같아요. 그래서 10시에 일어서 밥을 해서 먹고... 밥은 최소한 오늘 하루를 버틸 만큼만 먹고 하얀 옷을 입고 앉아서 샤워하고 편지를 쓰는 겁니다. 오후 4시까지 편지를 쓸 겁니다. 엄마랑 동생들, 사랑하는 사람, 제 자식들에게도 쓸 거고요. 잘못했던 사람들 예를 들어 내가 북에서 탈북하기 전에 할아버지가 꽁꽁 숨겨놨던 돈을 훔친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도둑질을 했던 이유가 할머니들이 입는 고쟁이 바지 있죠? 그게 중국산이 들어와서 북한에서 엄청 유행이었는데 너무 입고 싶었거든요. 옥수수가 한 자루에 25원인데 그 옷이 천원이 넘었어요. 엄청 비싼 거였죠. 그래서 할아버지 안 계실 때 몰래 할아버지 돈을 훔쳤는데 당시 할아버지에게 천오백 원이 있었어요. 그 중에서 제가 천원을 가져갔죠. 그리고는 끝내 할아버지께 제가 그랬다고 말씀 못 드렸습니다. 할아버지께 정말 죄송했다는 편지를 쓰고 저녁을 먹은 후 좋았던 추억도 더듬어보고 좋아했던 노래도 불러보고 그렇게 정리를 하고 싶습니다.
김강남 : 그런데 그런 날 10시까지 잠이 올까요? (웃음)
진행자 : 정민 씨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에 대해 부담감이 그리도 컸었구나...를 느끼면서 오늘도 아침에 녹음 약속을 잡은 제가 참 미안해집니다.(웃음)
김강남 : 저는 아침에 일찍 일어날 거예요.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산에 일출을 보러 갈 겁니다. 맑은 공기도 쐬고 산봉우리까지 올라가서 땀도 흘리고 7시쯤엔 내려 올 거예요. 집에 가거나 제일 맛있는 식당을 갈 거예요. 진짜 비싼 집! 저는 대게를 좋아하거든요. 술 한 잔 하면서 혼자 한 마리를 다 먹을 거예요.
이정민 : 저 사람은 죽을 사람이 아니야...(웃음)
김강남 : 지금까지가 오전 일과고 그거 다 먹고 낮잠을 잘 거예요. 점심에는 고아원(보육원)에 갈 겁니다. 제가 고아원에서 자랐어요. 엄마가 13년 전에 남쪽에 오고 아버지는 25호 (정치범 수용소)에 들어가시다 보니까 할머니네 집에서 12명이 모여 살았었어요. 생활이 너무 힘드니까 고아원에 맡겨졌는데 딱 들어가니까 군기를 잡더라고요. 처음엔 많이 맞고 그랬어요. 그 속에서 7년을 살아서 그 아이들의 심정을 잘 알아요. 어린애들이 명절이면 창밖을 계속 내다봐요. 그 길로 엄마, 아빠가 오지 않을까 해서요. 기뻐도 기다리고 슬퍼도 기다리고... 저도 그랬습니다. 친구들 중 누군가가 엄마 얘기 하면 다 같이 울었었어요.
진행자 : 고아원에서 구체적으로 뭘 하실 건가요?
김강남 : 고아원에 가서 쇼를 해줄 거예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할 거예요. 북한 춤도 추고 너희들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얘기해주고... 그리고 아이들 중에서 아픈 아이들에게 제 신체를 기증하는 계약서도 쓸 겁니다. 계속해서 오후에도 아이들하고 즐겁게 놀 겁니다. 그 후엔 술 한 잔을 하고 엄마한테 전화를 하겠습니다.
진행자 : 재동 씨는요?
김재동 : 평상시와 같은 흐름 속에서 조금은 더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보낼 겁니다. 저도 잠이 안 오겠죠? 아침밥을 먹고 부모님에게 얘기를 시작할 겁니다. 마음이 있지만 말로 잘 표현하지 못했던 부분들이요. 그런 얘기를 하면서 한 두 시간을 보내고 제가 아끼고 스스럼없이 지냈던 친구들에게 전화해 놀러 오라고 할 것 같아요. 그리고 친구들이 오면 졸업 앨범을 꺼내고 그 동안의 재밌었던 추억들을 나누고 살면서 오해라든가 그런 것들이 있다면 풀기 위해 노력할 것 같아요. 그런 이후에는 저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방 안에서 제가 좋아하는 음반을 어루만져 가면서 음악을 듣고 영화를 틀어놓고 보다가 잠들고 싶습니다.
정민 씨와 강남 씨, 재동 씨의 생애 마지막 날 계획을 들어 봤습니다. 셋 다 참 소박하죠?
진행자 : 저 같으면... 내가 만약 내일 죽는다고 하면 절대로 나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지 않고 그 시간에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만날 것 같거든요. 그런데 세 분이 공통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겠다고 해서 의외입니다.
이정민 : 곧 떠날 걸 알면서 함께 있으면 더 슬플 것 같아요.
진행자 : 그런가요? 떠나기 전에 1초라도 얼굴을 더 많이 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정민 : 저는 그래서 남편하고도 우리 오늘 하루만큼은 따로 있자고 할 것 같아요.
생의 마지막 날을 어떻게 보내느냐... 그 계획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남은 사람의 슬픔을 걱정하는 마음은 똑같네요.
준비를 하고 대비를 해도 죽음은 무겁고 두려운 것... 남쪽에는 죽음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는 걸 꺼려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기분도 좋지 않고 재수도 나쁘다는 생각인거죠... 그런데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은 '잘 죽는 것' 즉 '웰다잉'을 생각하게 됐고 노인 복지관 등을 중심으로 임종 체험이나 죽음 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답니다.
진행자 :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니까 지금 살고 있는 나의 이 자리가 소중하시죠?
김재동 : 숨 쉬고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진행자 : 사람이 잘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잘 죽는 거라고 합니다. 그런데 잘 죽는 걸 생각하다보면 잘 살게 된다고 하더라고요. 여러분은 더 잘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정민 : 가족을 돌보는 여건도 돼야 할 것 같고 사회에 기부한다든지 그런 좋은 일들을 해야겠어요.
김재동 : 저는 후회 할 일을 최대한 적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실패하더라도 연연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고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싶은 맘입니다.
김강남 : 저는 그냥 즐기겠습니다. 이유 없이 그냥 즐기겠습니다. 크게 열심히 하지도 않겠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다 잘하려고 하지 않을 거예요. 무리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싶습니다...
내 생에 마지막 날을 생각하고 죽음을 생각해 본 뒤, 정민 씨는 자기 자신과 가족을 책임 질 수 있는 책임감 있는 삶을 살고 싶다 말했고 재동 씨는 끊임없이 도전하는 진취적인 삶을 다짐했습니다. 또, 강남 씨는요... 마음을 비운 삶, 그저 즐겁게 살겠다 말했습니다.
이런 삶을 산 세 명의 묘비명엔 뭐라고 쓰여 있을까요?
진행자 : 강남 씨의 묘비명에는 뭐라고 쓰여 있을까요?
이정민 : 즐겁게 살다간 1인?
김강남 : 맘에 안 들어요. '마음의 부자 강남' 이렇게 쓰여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웃음)
진행자 : 정민 씨의 묘비명엔 뭐라고 써 주면 좋을까요?
김강남 : 누나는 엄마예요. 항상 걱정해주고 걱정이 얼굴에 씌어 있어요. 천상 조선 여자예요.
진행자 : '조선여자 이정민'
김강남 : 저는 '따스한 햇살', 이런 표현을 붙여주고 싶어요.
진행자 : 맘에 들어요?
이정민 : 네, 저한테 과분한 묘비명인 것 같아요. 그런데 저는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다' 이렇게 남기고 싶어요. 조용히 스며든 그런 인생이었으면 좋겠고 조용히 살면서 한 가정에 충실했던 그런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지만 누군가의 기억에 남으면 좋고 안 남아도 괜찮은 그런 사람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진행자 : 재동 씨의 묘비명도 생각해보죠.
이정민 : '작지만 알찬 사람' 왜소 하지만 참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기고 알찬 것 같아요. 그래서 '작지만 알찬 사람' 이라고 써 주고 싶습니다.
김강남 : 제가 볼 때 재동이는 '괜찮은 남자'예요. 대한민국 남자들이 대부분 잘난 척 하는데 재동이는 그런 면이 없어요. 늘 마음으로 다가가려고 하는 것 같거든요.
김재동 : 두 분이 지어준 거 다 맘에 들어요. 저는 '괜찮은 사람' 이게 가장 적당하고 저를 표현할 수 있는 수식어였으면 좋겠습니다.
진행자 : 죽음에 대해 얘기해 봤는데요. 세 분, 앞으로 더 알차고 즐겁게 잘 살아갈 수 있죠?
이정민 : 제 삶도 들어보고 동료의 삶도 들어보는 좋은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김강남, 김재동 : 저도 좋았습니다.
진행자 : 시간이 좀 더 있다면 나의 장례식도 꾸려보고 싶은데 다음 기회에 얘기 나누죠. 오늘 감사합니다.
이정민, 김강남, 김재동 : 감사합니다.
모래시계 속 속절없이 쏟아지는 모래와 같은 세월 속 어딘가에 내 발자국이 찍혀 있습니다.
한번 밟으면 절대로 다시 돌이킬 수 없는 한 발이기에 한 발 한 발, 신중하고 예쁘게 남기고 싶습니다.
우리가 사는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바라던 내일입니다.
오늘 <청춘만세>는 여기까집니다. 함께해 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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