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화사해야할 봄이지만 어제와 오늘 남쪽 곳곳에 눈이 날리기도 했습니다. 얇은 원피스에 한껏 멋을 부렸다가 겨울옷을 다시 꺼내 입었다가 종잡을 수 없는 변덕스러운 봄 날씨가 참 당황스럽기까지 한 요즘입니다.
봄 날씨가 변덕을 부려도 서로의 가슴 속에 간직한 온기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면서 따뜻한 방송, <청춘만세> 힘차게 시작합니다.
저는 진행에 권지연이고요. 남북 청년들이 함께 하는 인권모임 '나우'의 이정민 씨와 함께 합니다.
권지연 안녕하세요.
이정민 : 네, 안녕하세요.
권지연 : 매달마다 무슨 날들이 많이도 돌아오죠?
이정민 : 네. '발렌타인 데이', '화이트데이', '로즈 데이' 등...
1월 14일은 연인끼리 수첩을 주고받는 날. 2월 14일은 여자가 사랑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면서 사랑을 고백하는 날. 3월 14일은 남자가 여자에게 사탕을 주며 사랑을 고백하는 날...
이렇게 매 월 14일이 되면 의미를 담아 선물을 주고받습니다.
또 날짜를 읽는 발음 때문에 특별한 날이 되기도 합니다.
2월 23일은 인삼 먹는 날, 3월 3일은 삼겹살 먹는 날, 6월 6일은 고기 먹는 날, 8월 8일은 팔팔 끓여 라면 먹는 날 이랍니다.
모두 비공식적인 기념일들이고 남쪽 사람들이 이 날을 다 챙기는 건 아닙니다. 다 외우지 못할 정도로 무슨 날들은 무척 많으니까요.
권지연 : 이렇게 매 달마다 무슨 날 무슨 날이 돌아오는데 정민 씨는 좋겠어요. 다 주고 받았을 거 아닙니까?
이정민 : 아니에요. 그걸 뭘 다 주고 받습니까?
권지연 : 그래요? 그래도 안 주고 안 받으시는 거고 저는 못 주고 못 받는 거니까 절대 같다고 할 수 없습니다. 처음에 남쪽에 왔을 때 무슨 날이 이렇게나 많나싶으셨죠? 이정민 : 제가 처음에 알았던 날이 '빼빼로 데이' 였는데 긴 11자 모양의 과자를 먹는 날이잖아요. 나중에 보니까 매 달 14일마다 그런 날들이 있더라고요. 남들이 주고받는 것을 보면서 부러웠던 것 같아요.
권지연 : 상술이긴 하지만 서로 주고받고 챙겨준다는 의미로 생각하면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혹시 4월 14일은 무슨 날인지 아세요?
이정민 : 블랙데이!
권지연 : 해석하면 '검은 날'인데 무슨 뜻인지 아세요?
이정민 : 연인이 없는 사람들이 신세를 한탄하면서 검은색 자장면을 먹는 날입니다. 같이 자장면 먹을 사람 찾으셨나요?
권지연 : 있죠. 이예진 기자... (웃음) 올해도 또 먹게 됐네요.
매월 4월 14일 '블랙데이'는 연인들이 초코렛을 주고 받는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와 남성들이 여성에게 사탕을 주는 3월 14일 화이트데이를 외롭게 보낸 연인이 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자장면을 먹는 날입니다. 이 날까지도 중국 음식점이 연인들로 가득차면 짝 없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 까맣게 타들어가겠죠?
권지연 : 원래 표준어는 '자장면'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짜장면'으로 발음하다보니 짜장면이라고도 할 수 있도록 표준어가 바뀌었죠.
이정민 : 그런데 왜 '블랙데이'에는 꼭 자장면을 먹죠? 북에서는 생일에 면을 먹으라고 합니다. 오래 살라는 뜻이죠. 그런데 '블랙데이'에 자장면을 먹으라고 하면 어두운 마음을 오래 간직하라는 뜻인 것 같아서 슬플 것 같아요.
권지연 : 듣고 보니 그러네요.
이정민 : 그런 날은 검은 색이라도 짧은 음식으로 먹는 게 어떨지...
권지연 : 그럼 뭘 먹으면 좋을까요?
이정민 : 올 해는 와인 어때요? 달콤한 사랑을 하라는 의미로. 저는 면은 안 좋을 것 같아요. 오래 동안 짝을 못 만나면 어떻게 합니까?
권지연 : 정말 새로운 해석이네요.
권지연 : 꼭 참고 하겠습니다.
정민 씨의 설명을 듣고 보니 '블랙데이'에 왜 하필 남쪽 사람들은 자장면을 먹는 걸까? 궁금해지는데요. 명확한 근거나 해석은 없습니다. 그만큼 자장면이 남쪽 사람들에게 대중적인 음식이라는 것이겠죠?
자장면은 고기와 각종 남새를 까만 중국식 된장에 함께 볶아 올린 국수 요리입니다. 중국 요리이지만 정작 중국에선 자장면을 먹을 수 없습니다. 중국 음식이 남한에 들어와 남한 사람들 입맛에 맞게 개량된 것인데요. 남쪽에서 자장면 하루 소비량은 600만에서 700만 그릇에 달하고 한국인 8명 가운데 1명은 매일 자장면을 먹을 만큼 대중적인 서민 음식 중 하나랍니다. 자장면 한 그릇 가격은 평균 3달러에서 4달러 정도로 저렴한데요. 물가 관리 차원에서 남한 정부가 집중 관리하는 대상입니다.
권지연 : 자장면은 중국에서 남쪽에 와서 우리나라 사람의 입맛에 맞춘 국수라고 하는데 북한에서도 자장면을 먹어요?
이정민 : 안 먹어요. 중국에 친척이 있는 사람들은 알 수도 있는데 저는 북에 있을 때 자장면을 몰랐습니다. 북한에서도 비빔면은 먹는데 북한은 거의 옥수수 면입니다. 북한은 밀 재배를 하는 땅이 없어서 옥수수 국수를 주로 먹습니다. 여기는 옥수수 국수도 전분으로 하기 때문에 쫄깃한데 북한은 옥수수 자체를 통째로 갈아서 분말을 쓰기 때문에 점도도 많이 떨어지고 질긴 국수입니다.
권지연 : 전에 북에서 오신 분이 북한 국수가 남쪽보다 훨씬 맛있다고 했었는데 이상하네요?
이정민 : 그게 지역마다 차이가 있습니다. 평양이나 함흥은 원조이기 때문에 국수가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살던 지역은 워낙 작은 동네입니다. 한번은 제가 평양냉면을 먹으러 갔는데 주변에 계신 분들이 "이거 북한이랑 맛이 똑 같아요" 라고 묻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평양냉면 한국 와서 처음 먹어 봤는데요" 라고 했더니 다들 웃으시더라고요. 정말 그런 음식이 무척 많아요. 북한 전통 음식을 연구하는 곳에 가봤는데 처음 보는 음식이 정말 많았어요.
남쪽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국수요리, 자장면... 도대체 그 역사는 언제부터 시작됐을까요? 따져보면 무려 1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인천항이 개항되고 1880년대부터 청나라 사람들이 인천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는데 이 때 들어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상인들과 항구의 노동자들이었습니다.
가난한 중국 노동자들이기에 밀가루로만 반죽해 만든 찐빵을 중국 된장에 찍어 먹거나 국수를 중국 된장에 비벼 먹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 후 중국인들이 서서히 정착을 하면서 중국 음식을 파는 상점들이 생기게 됐는데 이 때 제일먼저 팔기 시작한 음식이 바로 다름 아닌 자장면이었다고 합니다. 항구 노동자들의 허기를 채워주던 음식에서 중화 요리점에서 파는 요리로 격상된 자장면...
권지연 : 지금은 자장면이 서민음식이지만 예전엔 자장면 먹는 날이 최고의 날이었다고 합니다. 졸업식, 또는 이사 가는 날처럼 특별한 날 먹었습니다.
자장면이 남쪽 사람들에게 대중화되기 시작한건 해방 이후부텁니다. 전쟁이후 미국에서 남아돌던 밀가루와 원조 물자가 유입되면서 밀가루 국수가 대중화되기 시작했는데 배고픈 시절 달고 기름진 자장면은 단연 으뜸 요리였습니다. 남쪽의 50대 이상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날 고소한 냄새가 풍기는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먹던 추억들이 다 있답니다.
세월이 흘러도 자장면은 여전히 사랑받는 음식이긴 하지만 전처럼 특별한 날 손꼽아 기다려 먹는 음식은 아닌데요. 간혹 그 때 그 시절이 그리워지는 이유, 가난하고 배고팠지만 작은 것에도 감사했던 소박한 옛 추억에 대한 향수 때문이 아닐까요? 정민 씨에겐 이렇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음식이 흰 쌀밥인가 봅니다.
이정민 : 회사에서 대표적으로 시켜 먹는 음식이 자장면인데 저는 굵은 국수를 싫어하는 편입니다.
권지연 : 북에서 오신 분치고 면 종류를 안 좋아하는 사람 처음 봤습니다.
이정민 : 저는 밥이 좋아요. 북에 있을 때는 1년에 한두 번 쌀밥을 먹을 수 있었는데 그거 먹으면서 나는 북한의 부자다... 라고 생각하곤 합니다.
권지연 : 남쪽에서는 졸업식이나 이사 하는 날 자장면을 먹는다고 했잖아요. 북에서는 뭘 먹나요?
이정민 : 이사하는 날 쌀밥을 먹으면 제일 좋은 거죠. 이사하는 날은 잔치를 하는데 보통 옥수수 죽을 먹습니다. 옥수수랑 단 콩이랑 넣고 끓여서 간단하게 먹을 수 있잖아요.
권지연 : 맛있을 것 같은데요?
이정민 : 배고프면 다 맛있습니다.
권지연 : 특별한 날 먹는 다른 음식은 없나요?
이정민 : 가족끼리 모여 좋은 날이면 감자 전분으로 국수를 만들어 먹습니다. 국수 분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반죽해서 넣고 뜨거운 물에 눌러서 만들어 먹습니다. 그것도 맛있습니다.
권지연 : 졸업식 때는요?
이정민 : 졸업식 때도 먹죠. 떡을 많이 합니다. 송편이나 절편 같은 것을 수작업으로 다 합니다.
권지연 : 북쪽의 어머니들은 정말 힘드실 것 같아요.
이정민 : 너무 힘들어요. 쌀가루 내는 것도 절구로 다 빻아서 하시는데요. 저희 엄마는 쌀을 빻다가 쌀 찌꺼기를 일부러 많이 내놓곤 했어요. 쌀이 귀한데 왜 이렇게 하냐고 하니까 쌀 찌꺼기를 내놓으면 맏딸이 잘 산다는 말이 있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쌀 찌꺼기는 나중에 밥 위에 올려놓고 먹는데요. 지금도 밥 먹을 때는 그 생각이 납니다. 그 때 엄마 마음이 느껴지고 그런 엄마의 마음 덕분에 제가 남쪽에 와서 이렇게 잘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식이 잘 되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북이나 남이나 같은 것 같습니다. 자장면을 소재로 만든 남쪽의 인기 가요가 있는데요. 이 노래를 들어봐도 알 수 있답니다.
권지연 : 자장면에 얽힌 노래도 있는데요. god의 '어머님께' 라는 노래입니다. "어머니는 자장면은 싫어 하셨어"... 이 노래 가사의 의미가 뭔지 아세요? 너무 가난한데 자식이 자장면이 먹고 싶다고 하니까 엄마가 자장면을 한 그릇만 시키면서 엄마는 자장면을 싫어한다며 아이만 편히 많이 먹으라고 하는 것이죠.
이정민 : 아, 그런 의미군요. 몰랐습니다.
권지연 : 생각해보면 엄마들이 꼭 그러잖아요. 나는 싫어해, 배불러.
이정민 : 엄마는 생선 머리를 좋아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권지연 : 오늘 '블랙데이' 얘기 하다가 자장면, 어머니 얘기 등 많은 얘기 나누었는데 얘기 하다보니까 짝이 없어서 자장면 먹는다고 슬퍼할 것이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소중한 가족들을 챙기는 날로 보내면 좋을 것 같아요.
이정민 : 좋은 생각이네요.
권지연 : 그럼 오늘도 우리 청춘 만세를 하면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권지연, 이정민 : 하나, 둘, 셋, 청춘 만세!
자장 국물처럼 진하게 국수처럼 길게 주변의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다면 날씨가 아무리 심술을 부려 봄이 더디 오고 세상이 뒤숭숭하다 해도 다 견디고 이길 수 있지 않을까요? 자식에게 자장면을 주기 위해 싫어한다고 거짓말을 했던 엄마의 마음처럼 진한 사랑이 우리 가슴속에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오늘 <청춘만세>, 여기까집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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