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시절 무척 좋아하는 선배가 있었습니다. 그 선배 앞에만 가면 저는 말도 잘 못하고 눈도 못 마주치고 그랬는데요. 비가 오는 어느 날, 수업 시간에 늦어 뛰던 저는 미처 발견 못한 하수도 구멍에 구두굽이 껴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구부려 신발을 잡아 뺐는데 아뿔싸! 저 쪽에서 내가 좋아하는 그 선배가 저를 보고 있는 거였어요. 운도 참 없죠... 하필 그런 모습을 보여주다니!
그 후로 '비오는 날은 절대 뾰쪽 구두를 신고 하수도 근처를 가지 말라' 저의 신조가 됐답니다.
여러분은 비가 오는 날이면 떠오르는 기억, 사람, 추억이 있으신가요? 비처럼 촉촉한 방송, 여기는 <청춘만세>고요. 저는 진행에 권지연입니다. 오늘도 남북 청년들이 함께하는 인권모임 '나우'의 출연진들과 함께 합니다. 장마가 시작된 지 3주째로 접어드는 오늘은 '비'에 대한 얘기 나눠봅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두 번째 만남이라 그런지 친숙합니다. 저는 비를 싫어합니다. 옷 젖죠, 일하기 힘들죠. 차 밀리죠...
이정민 : 저는 비를 좋아합니다. (웃음) 비를 좋아하는 사람은 감성적인 사람이라고 하는데요. 제가 비오는 날을 좋아했던 이유는 어릴 때 엄마랑 함께 있을 수 있는 날이 비오는 날이었어요. 그러니까 비오는 날만 밭에 엄마가 못 나갔거든요. 그래서 비오는 날만 엄마 팔 베고 자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억수로 내리는 비를 보면서 장마라고 걱정하는 분들도 계시는데 저는 그 날만은 엄마도 함께 맞는 비인 것 같아서 일부러 밖에 나가서 비를 맞고 있어요. 산성비라는 말도 많이 하는데 저는 비오는 날 나가서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합니다.
진행자 : 주영 씨도 비를 좋아하실 것 같아요. 한 감성 하지 않아요?
이주영 : 네. 저도 비를 좋아합니다. 남쪽에서는 수해가 나도 일부 지역에서만 그런 일이 있는 거잖아요. 저는 수해를 겪어 본 적도 없고 저에게는 비가 오는 것이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은 일인데 제가 비를 좋아하는 이유는 감성적인 이유가 있는 것 같아요. 비 소리도 좋고 시원하고요... 서울은 공해가 많으니까 비가 오면서 정화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정민 씨에게 비는 그리움, 그리고 주영 씨에게 비는 낭만이네요.
이정민 : 장마철 얘기를 하니까 기억나는 것이 우산입니다. 저희 친척들이 모두 모여 살았는데 다섯 집에 우산이 딱 두 개 밖에 없었어요. 우산살이 부러지거나 하면 붙여 쓰고 기워서 쓰고 그랬는데 여기는 우산 살 부러지면 한 번 쓰고도 버리잖아요. 이렇게 예쁜 꽃 우산을 가지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그런 우산이 여기서는 막 굴러다니니까요. 처음에는 여기 와서 우산에 환장해서 사고 그랬었는데 그 생각이 나네요.
진행자 : 제가 마구 잃어버렸던 우산들에게 왠지 미안해지면서... 비오는 날이면 저는 식욕만 늘어나던데요. 남쪽에는 비오는 날이면 빈대떡을 꼭 먹어야 한다고 하고요. 북한도 비오는 날이면 꼭 먹는 것이 있나요?
김강남 : 꼬장떡이요. 옥수수 가루로 반죽해서 동그랗게 만들어서 부쳐 먹는 것이 있어요.
최철남 : 먹을 것이 있는 집이나 먹지...
김강남 : 이 친구는 나온 지 오래잖아요? 요즘은 소토지 밭도 있기 때문에 웬만한 집들은 저녁도 그 꼬장떡으로 해먹고 그래요. 아마 통일되면 북한의 꼬장떡도 전해질 겁니다.
진행자 : 맛있을 것 같아요.
이정민 : 한국에 와서는 맛있었는데 북한은 옥수수를 통으로 갈아 쓰니까 깔깔하고 거칠거칠해요.
진행자 : 어쨌든 비가 오면 옷 젖죠. 우산 잃어버리죠. 식욕 늘어서 몸무게 늘죠. 그런데 이런 것은 사실 걱정도 아닙니다. 요즘은 갑자기 억수로 오는 경우가 많이 늘어납니다..
이정민 : 맞아요. 북한엔 불나면 건질 것 있어도 물난리 나면 건질 것 없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없으면 안 되는 고마운 비지만 미운 비가 되기도 하는데요. 본격적인 장마철에 접어들면서 침수 피해가 잇따릅니다. 지난주에도 남쪽의 전라북도 순창과 고창 등지에 200mm가 넘는 집중호우가 내려 농경지와 도로, 저수지 부근 옹벽이 무너지는 등의 사건 사고 소식이 들렸습니다. 올 해 장마는 7월 중순까지 이어진다고 하는데요. 매년 여름마다 반복되는 수해 피해가 이번에는 제발 없기를 바래보지만 어김없이 침수 피해 소식은 들립니다.
진행자 : 북한도 장마철이겠죠?
이정민 : 봄에 내리는 비에 대해서 연구 결과가 나온 것을 봤습니다. 비가 오면 몇 억 씩 이윤을 내고 그러더라고요. 그럴 때는 좋겠지만 불나면 건질 게 있지만 비 오면 건질 게 없다고 그런 말도 북에서는 하거든요.
진행자 : 남쪽은 비가 많이 오면 유난히 바쁜 분들이 있습니다. 기상청, 재난관련 분야에서 일하는 분들... 집에 못가고 계신 분들이 많을 겁니다. 북쪽에도 비가 오면 유난히 고생하시는 분들이 있나요?
이정민 : 있죠. 저는 부모님이 농사일을 하셨습니다. 비가 오면 밤에도 나가서 일했죠. 하지만 북한에서는 비가 온다고 재난청이 밤을 새서 일하는 경우는 없었던 것 같아요. 연락 체계도 안 돼 있어서 그런 것을 알려주기도 한계가 있어서 주변에서 가장 바쁜 분들은 농사지으시는 분들이었죠. 또 아빠는 선로 점검하는 일을 하셨어요. 남쪽으로 말하면 한국 전력과 비슷한 일을 하는 하셨는데 비가 오면 전기선이 끊기곤 해서 그걸 이어주는 일을 했는데 그걸 하다가 감전 사고가 나곤 했거든요. 나갈 때마다 엄마도 저도 기도 비슷한 거를 하곤 그랬죠.
최철남 : 북한은 배수가 잘 안돼요. 특히 농촌은... 장마철에 물이 차면 불을 땔 수가 없어요. 나무도 다 젖고. 그래서 밖에 나가서 풍로에 불을 땠는데 온 집안이 눅눅하고 그랬죠. 또 제일 고생하는 분들이 탄광에서 일하는 분이었습니다.
장마철 고생했던 기억들은 북에서 온 출연진들에게 모두 있었습니다. 듣다보면 참으로 얄미운 장맛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북에 있는 가족 걱정, 고향 땅 걱정이 가득한 얼굴들입니다.
김강남 : 북한의 50%는 개인 농사를 하는데 국가에서 허가한 땅이 아니고 산에 가서 짓는데 이제 장마철이면 곡식이 허리를 칠까 하는데 산비탈에 비가 많이 오게 되면 한 해 지은 곡식이 싹 밀리는 거예요. 농촌에 가게 되면 집을 진흙으로 토피를 짜서 벽돌로 올려서 집을 짓는데요. 여긴 콘크리트로 짓지만 북한 특히 농촌엔 비만 오면 집이 씻겨 내려가는 거예요. 장마철이면 걱정이 되요.
지철호 : 저 같은 경우는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그 이유가 기와나 석회를 굽던 회사였는데 비가 오면 습기 때문에 안 구워지고 풍화가 돼서 많이 고생했었죠. 그래서 장마철엔 우리 직장 사람들, 생각 많이 납니다.
최철남 : 이맘때가 저희 고향은 감자철 입니다. 요 때 감자가 비 때문에 가장 많이 썩어요. 그래서 부모님이나 동네 사람들이 속을 태웠는데 그런 피해를 많이 안 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 없도록 하기 위해 남쪽이나 북쪽이나 올해도 노력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큰물 피해 막자며 북한도 방송을 통해 장마철 수해 대책을 독려하고 있고 남쪽도 하수관 종합 정비, 하수도 준설, 빗물펌프장을 증설하고 수방시설을 확충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지만 하늘이 하는 일인지라 완벽한 대비란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었을 때는 자원 봉사자들의 힘이 절실해지는데요.
권지연 : 아무리 대책을 잘 세운다고 해도 하늘이 하는 일이라서 서울 강남 한복판도 잠기고 그럽니다. 그럴 때마다 남쪽 사람들은 수해가 난 곳에 자원봉사를 갑니다. 서울에서 일이 터지면 전라도, 경상도에서도 자원봉사를 오고 경상도에서 터졌다고 하면 또 전국에서 모이고 그러거든요. 그런 자원봉사에 참여해 보신 적 있나요?
이주영 : 네. 물에 완전히 잠기고 흙이 들어와서 거기 봉사활동을 갔는데 봉사 활동 온 사람들이 정말 많았어요. 몇 백 명이 됐었죠. 저희가 갔던 동네 말고도 옆 동네도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도왔다고 하더라고요.
이정민 : 자본주의는 자기 밖에 모른다고 들었는데 여기 와보니 남을 돕고 배려하는 것이 더 많은 것 같더라고요. 감동했었죠.
진행자 : 북한에서도 수해가 나면 자원봉사를 하고 돕는 분위기인가요?
최철남 : 자원봉사라는 것은 따로 없고 동네 주민들끼리 품앗이로 도왔죠.
진행자 : 그게 그거죠.
지철호 : 달라요. 남쪽은 개인이 소유한 것을 공적, 사적으로 도와주는 것인데 북한은 대부분이 국유화라서 대부분이 공적인 일로 하는 거죠. 직장마다 인원을 차출하는 거지 자원봉사 조직을 만들어서 돕는 건 아니거든요.
어찌됐든 이웃의 좋은 일에 함께 기뻐해주고 슬픈 일에는 서로 도와 어려움을 이길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이 우리 민족의 미풍양속일겁니다.
김강남 : 지금 제 친구들은 군대에서 봉사 많이 하고 있을 겁니다. 고생하면서 자기 집도 걱정 할 텐데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고 맨 날 그렇게만 살겠나... 흐린 후에는 해도 나니까 힘내라.
이미 우리 선조들은 조선시대에 측우기를 발명해 강에서 물이 흐르는 높이를 보고 농사에 도움을 얻고 홍수, 큰물이 났을 때도 미리 대비할 수 있었습니다. 집들은 물에 잠길지언정 미리 대피를 시킨 덕에 한 명의 인명피해도 없었다고 하는데요. 세계 최초로 만들어진 기상관측장비인 측우기와 수표의 활용으로 인해 이미 600여 년 전에 기상경보와 재해방지에 성공한 기록을 갖게 된 셈입니다. 선조들의 업적을 뒤이어 선진적인 홍수 대책을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청춘만세> 진행에 권지연 이었고요. '나우'의 지철호, 이정민, 김강남, 최철남, 이주영 씨와 함께 했습니다. 함께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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