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차림은 그 사람의 정신사상 상태를 표현한다." 이것은 북한 주민이라면 누구나 귀에 못이 박히게 들은 김정일의 말이다. 북한 정권은 김정일의 이 지침을 근거로 주민들의 외모를 엄격히 규제했다. 병영 식 사회의 일체감을 강요하기 위한 조치였던 것이다. 그 통제의 역사가 얼마나 길었으면 전체주의 옷차림은 전통이 되고 문화가 되어 굳이 단속을 하지 않아도 주민들이 주변 환경에 스스로 맞추는 지경이다.
나 또한 그렇게 자랐던 사람이었다. 권위주의적 북한체제에 길들여진 나여서 남한에 와서도 주로 검정색 양복을 입었고, 그 색깔에서 탈피한다면 진한 청색이나 회색의 양복을 입었다. 밝은 색깔의 옷을 입는다는 것은 남성적이지 못하고 심지어 싸 보인다는 인식에 포로 돼 있었다. 그러면서도 북한에서 익숙했던 국방색깔의 옷은 아예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색깔이야말로 어디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선군 병영체제의 북한주민 같아서였다. 그렇듯 어두침침했던 나의 옷이 어느 날 갑자기 밝아진 계기가 있었다.
어느 기업인 회장님과 주말여행을 함께 갈 기회가 있었는데 날 보자마자 그 분이 불쑥 이런 말씀을 던졌다. "원래 남한에선 남이 입은 옷을 갖고 잘 이야기하지 않아, 왜냐하면 옷은 그 사람의 개성을 표현하는 것이니깐," 북한은 옷이 사상의 표현인데 남한은 개성의 표현이라니, 그 차이의 의미를 새삼스럽게 생각해보는데,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느냐면 넌 항상 볼 때마다 옷 색깔이 하나야, 형식도 비슷하고, 말하자면 북한식이야, 내 옷을 봐, 난 70살이지만 너보다 더 젊게 옷을 입어, 너도 이젠 남한에 왔으니 옷을 좀 밝게 바꿔봐, 옷도 대인관계에서 중요한 요소니깐" 그러면서 자기는 멋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이 들수록 옷은 더 어리게 입으라는 격언대로 입을 뿐이라며 날더러 나이가 젊었으니 얼마든지 자기의 개성을 멋지게 드러내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그 다음 주말이었다. 그 회장님께서 보내신 여비서가 불쑥 나를 찾아왔다. 나에게 옷을 골라주라는 특명을 받고 왔다는 것이다. 옷 설계전문가라는 친구까지 데리고 왔기에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녀들 손에 이끌려 백화점으로 갔다. 내가 선택한 옷들은 어김없이 어두운 색이고 그 녀들이 골라주는 옷들은 밝은 색인데다 형태도 너무 튀었다. 우리는 서로의 이견에서 한 발짝 씩 양보해서 중간에 해당되는 옷들을 샀다. 그녀들은 옷을 갈아입은 나를 보고 탄성했지만 솔직히 내 기준으로 봤을 때는 형편없이 경솔한 옷이었다. 그러나 나는 곧 자신의 바뀐 외모에 만족하기 시작했다.
친구들의 반응이 마치도 약속이나 한 듯 칭찬일색 이어서였다. 개과천선했다느니, 젊어졌다느니, 남한 사람이 다 됐다느니, 어떤 친구는 "꾸며주는 애인이라도 생겼는가?"고 묻기까지 했다. 나는 옷이 사람을 다르게 만들 수도 있다는 사실에 매우 흡족했다. 북한에선 지위가 곧 인격이고, 옷이란 자기 권위를 더욱 강조하기 위한 일종의 갑옷 같은 것에 불과할 뿐이다.
유행이라면 북한의 절대 권위자인 수령이 입는 옷뿐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황색바람을 막는다며 남들과 조금만 달라도 주목하고 비판하기까지 하는 세상이어서 옷이란 남의 시선, 사회의 구속과 같은 개념에 불과했다. 남한에 와서야 비로소 내가 내 옷을 입었다는 만족감과 승부욕이란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나의 존재를 때로는 멋지게, 때로는 발랄하게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가치로 여겨졌다.
옷의 미학을 보다 더 새롭게 느꼈던 적은 유럽의 큰 대회에 초청 받았을 때였다. 나는 그때 예의와 격식을 차려 양복을 입고 갔었다. 그런데 대회 첫 날 놀랍게도 객석은 물론 사회자까지도 딱딱한 양복이 아니라 평시에 입는 청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대회는 품격 있었지만 참석자들의 품격을 강요하지 않는 다양성이 존중된 자유세계의 모습이었다. 옷은 사람을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 체제는 전체주의 옷을 위해 사람을 만드는 세상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자리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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