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펙(1) - 스펙이 그렇게 중요한가!

0:00 / 0:00

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 4년 차를 맞고 있습니다. 2012년 아들을 데려와 혼자서 키우는 열혈 '워킹맘' 그러니까 일하는 엄마입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에는 남한 정착 9년 차 자강도 출신 문성휘 기자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미국에서 이름난 대학을 졸업한 분이 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들어온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저보다 월급이 30만 원이 높은 거예요. 어떻게 이렇게 경력을 무시하나. 그게 불만이면 나가라는 거예요.

소연 씨는 조금 화가 났습니다. 최근 입사한 사람의 월급이 소연 씨보다 30만 원, 그러니까 3백 달러나 많았기 때문인데요. 남한에서는 같은 회사에서 같은 일을 하더라도 경력이나 능력에 따라 다른 월급을 받습니다. 그게 불만이면 본인의 능력을 더 쌓거나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겠죠. 그야말로 경쟁사회입니다. 남한에서 1년 반 동안 사무직으로 일한 소연 씨도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살고 있는 셈인데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소연 씨가 그 치열함에 쉽게 적응할 리는 없겠죠. 경쟁에서 밀려 조금은 뿔이 난 소연 씨의 얘기, 자세히 들어보시죠.

진행자 : 안녕하세요.

문성휘, 박소연 : 네, 안녕하세요.

진행자 : 벌써 1월도 열흘이 지났습니다. 시간이 참 빠른데요. 새해가 되면 직장인의 경우 가장 관심 있는 것 중의 하나가 '내 월급이 전년보다 얼마나 올랐을까?'인 것 같아요. 성과나 연차가 쌓이니까 분명히 작년보다는 월급이 올랐을 거라 생각하는데, 만족스럽게들 올랐나요?

문성휘 : 저는 아직 오를 연한이 안 됐고요. 지난해 올랐거든요.

박소연 : 그게 회사마다 다른가 봐요. 무슨 규정이 있어요?

문성휘 : 남한의 월급제라는 게 굉장히 복잡하죠. 생산을 많이 한 노동자들에게는 성과급이라는 것도 주고. 북한도 그런 제도가 있긴 하잖아요, 상금이라고. 그리고 경력이 쌓이는 데 따라 월급이 높아지고. 직종마다 다양해요.

진행자 : 나라의 경기도 반영이 되죠. 경기가 안 좋을 때는 특히 공무원들의 경우 임금이 동결되기도 하고요. 전년도에 수익이 많은 회사들은 조금 높게 올리기도 하고요. 회사마다 다릅니다.

박소연 : 제가 최근에 월급을 받았는데 월급이 그대로예요. 우리 회사가 작고 비영리 회사라서 그냥 이 정도면 그렇게 힘든 일도 아니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이해하지만 그래도 속으로는 바람이 있잖아요. 애를 데리고 혼자 일하니까 언젠가는 올려주겠지 하고 가만히 있었는데, 북한 말로 머리 뚜껑이 열릴 일이 생겼어요. 미국에서 이름난 대학을 졸업한 분이 회사에 취직을 했어요. 들어온 지 한 달 밖에 안 됐는데 저보다 월급이 30만 원, 북한 돈으로 210만 원이 높은 거예요.

문성휘 : 그럴 수 있지.

박소연 : 문 기자님은 그럴 수 있다고 하잖아요. 저도 지금은 이해를 하지만 그때는 피가 거꾸로 돌더라고요. 1년 반을 일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경력을 무시하나.

그런데 저랑 경력이 비슷하고 월급도 같은 분이 있어요. 그분이 가만히 있는 거예요, 남한 사람인데. 제가 그랬어요. '저 사람은 금방 들어왔는데, 우리보다 월급이 30만 원 많다. 왜 당신은 가만히 있느냐?' 그러니까 그분이 '저 사람은 스펙이 좋잖아요.'하는 거예요.

진행자 : '스펙(spec)'이라는 말이 남한에서도 몇 년 사이에 생겨난 신조어거든요.

박소연 : 간판이죠. 좋은 대학을 졸업했다는 뒷배경 같은.

진행자 : 영어에서 파생된 말인데, 설명서나 사양서 정도로 해석이 될 것 같아요. 우리가 어떤 제품을 살 때 보면 '이 제품은 뭐가 좋은지' 설명이 있잖아요. 그걸 사람한테 인용한 거죠. '이 사람은 어떤 대학을 나왔고, 무슨 언어를 말할 수 있고, 어떤 자격증이 있고...' 이런 것들을 종합적으로 설명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제가 생각했을 때 30만 원을 더 받는다는 분은 흔히 '스카우트'라고 하죠. 능력이 우수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 정도의 금액을 더 줄 테니 우리 회사에서 일하자'라는 협상이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박소연 : 딱 맞췄어요. 남한 사람이니까 바로 알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 내막을 몰랐어요. 그분이 영어를 원어민 이상으로 잘 하고, 큰 회사에서 일하다 우리 회사에 관심이 있어서 우리 사장이 직접 만나 스카우트(발탁하다)한 거예요. 그래서 초봉으로 얼마를 주겠다고 계약했더라고요.

그런데 회사에 다 남한 사람이고 북한 사람은 저 혼자인데, 다들 주위 환경을 거두지를 않아요. 항상 자기 일만 하는 거예요. 제가 청소를 다 했거든요. 그래서 '관리원을 써도 그 정도 돈을 더 안 주겠나?' 타산을 한 거예요.

제가 좀 다혈질이라 참다 참다 대표한테 말했어요. '나는 여기 들어와서 1년 반이 됐는데 왜 내 월급은 이만하고, 저 사람은 나보다 나이도 10년 아래인데 들어오자마자 30만 원을 더 받느냐. 내가 저 사람보다 일을 못하는 게 뭐냐?'고 따졌어요. 그랬더니 대표가 '저런 사람은 우리 같은 회사에서 그만한 연봉을 주지 않으면 일을 안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대표님, 영어 잘 하는 사람 남한에 디디고 쌓였어요.' 했더니 그럼 '저 정도 능력에, 저 정도 월급 받고 일할 사람'을 데려오래요. 그렇게 일단락 됐지만 그때 솔직히 감정이 좋지 않았어요.

문성휘 : 소연 씨 심정 이해해요. 저도 그런 일 많이 당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상사를 탓하거나 나보다 월급 많이 받는 사람을 탓하기 보다는 '내가 왜 북한에서 태어났나, 나도 남한에서 태어나, 너네처럼 유학 갔으면 지금 너네만큼 영어를 못했겠냐?' 화가 나고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것 아녜요.

지금 그 사람만큼 영어를 하라면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거고, 사무능력도 그 사람보다 못하니까.

제가 처음에 무언가 기획하는 회사에 들어갔거든요. 사장이 저 같은 사람을 한 번 양성해보겠다고 그런 의미에서 채용했어요. 그런데 결국 사장도 차마 나가라는 소리도 못하고, 스스로 밀려나게 되더라고요. 왜냐면 기획이라는 개념조차 나한테 없는 거예요. 지금도 못해요. 그때 저와 남한 사람 두 명이 같이 들어갔어요. 그런데 이분들은 굳이 뭘 배울 필요가 없는 거예요. 들어온 날로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니까 따로 물어보는 것도 없이 작성해서 사장한테 바치더라고요. 그때 정말 답답했어요. 자꾸 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그나마 조금 배웠죠. 내 능력으로는 도무지 따라갈 수 없는 일들이 많다는 것을.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앞서게 마련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당연한 거 아니에요? 한마디로 자본주의는 기회균등이지 분배균등이 아니에요. '교육받을 기회, 대학갈 기회, 너희들 노력하는 만큼 준다, 토대도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자기가 따라가지 못하면 방법이 없는 거죠. 내가 설령 남한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나보다 공부를 잘 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외국 유학도 다녀온 사람은 월급을 더 받을 수밖에 없죠. 다만 북한에서 온 우리로서는 억울하다, 가슴 아프죠.

진행자 : 그래서 남한은 무한 경쟁사회라고 하잖아요. 대학 진학률 자체가 80%가 넘고, 어학연수라고 다들 외국에 나가서 유학도 하고, 각종 컴퓨터 자격증 등 '스펙 쌓기'라고 자기에게 좋은 경력을 쌓기 위해서 사실은 너무 많이 경쟁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놀이터에서 노는 애들이 없다고 하잖아요. 다 학원에 가고. 대학생들도 대학이 공부하는 곳인데 취업을 준비하는 곳으로 돼 버렸고. 안타까운 점도 있지만, 사회가 이러니까 따라가지 못하면 본인만 뒤쳐지는 면도 있고, 악순환인 것 같아요.

문성휘 : 자본주의의 무한경쟁이 결코 좋다고만은 할 수 없어요. 정말 너무 따라가기 벅찬 면도 있고. 그런데 기회를 잡는 사람들도 있죠. 애플(컴퓨터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미국 기업)의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사(컴퓨터 관련 제품을 생산하는 미국 회사) 회장은 본인들의 독특한 발상과 지식으로 세계적인 재벌이 됐잖아요.

진행자 : 네, 자본주의 사회는 능력에 따라 결과물이 다르기 때문에 상대적인 박탈감은 훨씬 큰 것 같아요. 그래서 직장인들도 소연 씨처럼 가정생활도 하고 야근까지 하지만 회사 끝나고, 아니면 새벽에 학원을 다니면서 컴퓨터나 영어를 배우잖아요.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노력들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어떻게 보면 안쓰럽기도 하고, 남한이 세계적으로 노동시간이 긴 나라에 속하거든요.

박소연 : 8시간인데요?

진행자 : 법적으로 8시간이지만 실질적으로 하루에 8시간 일하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대부분 야근하고 주말에도 나오고. 박소연 : 그런데 남한 사람들은 월급이 오르지 않았다고 대표한테 그렇게 따지지 않는대요. 저는 확인하고 넘어가는 편인데, 남한 사람들이라고 정확하기 싫어서 그런 건 아니잖아요. 잘릴까봐! 그런데 저는 자부했어요. '나 내보내고 누가 대신 일을 할까?' 하지만 이번에 당하고 보니까 '아, 내가 너무 자만했구나...' 대표가 그러는 거예요. '그게 불만이면 나가라'고.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이게 최선의 금액이다.' 그전까지는 이렇게 따지면 내가 나갈까봐 붙들고 다음 달에 월급을 조금 올려줄 거라 생각했는데, 제가 꿈을 꾼 거죠. 불만이면 나가래요. 제가 본전도 못 찾고 돌아 나왔죠. 그리고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어요.

진행자 : 엄청난 취업난이라고 하잖아요. 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스펙을 가졌어도 일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사실 자존심이죠, 직장인으로서 '나도 이런 자존심이 있다' 하지만 그 자존심을 세우기에는 너무나 경쟁사회인 거예요. 내가 나가도 이 회사는 잘 돌아갑니다(웃음).

박소연 : 맞아요. 제가 이번에 겪은 게 그거예요. 우리 대표님하고 똑같은 말씀 하세요(웃음).

문성휘 : 나를 대신할 사람은 수천, 수만 명이에요. 그런데 나는 소연 씨가 억울하다고 하는데 오히려 남한에 와서 자신의 스펙, 경력을 쌓기 위해 어떤 노력들을 했나 물어보고 싶어요.

남한 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하지 않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능력이 부족하면 뒤쳐지게 마련이죠. 소연 씨는 남한에 와서 혼자 아이도 키우고 일도 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합니다. 그런데 문 기자 말마따나 자신의 실력을 키우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소연 씨는 어떤 노력들을 했을까요? 그 노력들이 남한생활을 따라잡기에 충분했을까요? 이 얘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겠습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지금까지 진행에 윤하정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