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 3년 차를 맞고 있습니다. 2012년 아들을 데려와 혼자서 키우는 열혈 '워킹맘' 그러니까 일하는 엄마입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에는 남한 정착 8년 차 자강도 출신 문성휘 기자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장학금 소리가 나오니까 눈물이 나려고 해요. 너무 기대했거든요. 막 자랑하고 싶었어요. 아, 나는 장학금을 탔다. 아들한테도 사람들한테도 자랑하고 싶었는데...
직장생활을 하는 소연 씨는 인터넷으로 강의를 듣는 사이버대학, 이른바 가상대학에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장학금을 신청해보라는 학교 측 연락을 받고 한껏 들떴는데요. 늦깎이 대학생에, 지금껏 아무 상관없는 단어로 알고 살아왔던 장학금까지 소연 씨는 요즘 공부하는 재미에 빠져 있습니다. 자, 아들한테도 사람들한테도 자랑하고 싶다던 장학금은 받았을까요? 지난 시간에 이어 소연 씨 얘기, 계속 들어 보시죠.
진행자 : 어떻게 대학생이 되셨어요? 공부와 일을 병행하기 힘드실 텐데 어떤 계기로 대학에 진학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셨는지.
박소연 : 어느 순간부터 사회복지가 배우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알아봤는데, 일하면서 배우는, 북한 말로 하면 공장대학 같은 게 있더라고요. 남한 말로는 인터넷, 북한 말로는 인터네트예요. 인터네트로 화면으로 선생님 강의를 들으면서 점수에 따라 한 학년 한 학년 올라가는 그런 교육제도예요.
문성휘 : 사이버대학이라고 하죠.
박소연 : 제가 사이버대학을 택한 두 번째 동기가 돈이 안 들더라고요. 서른다섯 살을 넘긴 탈북자들이 사이버대학에서 공부하면 학비를 다 대준다...
문성휘 : 탈북자들 남한에서 공부하는 게 그래요. 서른다섯 살 아래는 어떤 대학에 가든 등록금, 그러니까 월사금이 없어요. 서른다섯 살이 지나면 돈을 내야 하는데, 사이버대학 만큼은 나이에 상관없이 돈을 안 내요. 탈북자들 중에서 나이 많은데 공부를 하고 싶다, 그런데 학비가 장난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사이버대학에 가는 거죠.
한국에서 터전이 잡힌 탈북자들은 북한학을 많이들 공부하려고 하는데 북한대학원대학교가 있어요. 거기서 공부를 많이 하는데 이건 돈을 내야 해요. 1년에 8백만 원, 그러니까 8천 달러죠. 정말 비싸죠.
그런데 또 방법이 있더라고요.
진행자 : 방법이 뭔가요?
문성휘 : 장학금이라는 게 있잖아요. 저도 첫 학기에 4백만 원을 냈어요. 그런데 장학금이라는 게 주로 취약계층들, 생활이 어려운 계층을 위해 만들어진 거라서 저희 같은 사람을 소개해주더라고요. 알아 봤더니 재단에서 장학금을 다 대주는 거예요.
진행자 : 한 학기만인가요, 아니면 전 학년을 다 대준 건가요?
문성휘 : 다 대줬어요(웃음). 대신 남한에서는 성적이 A, B, C, D 이렇게 나오잖아요. 성적을 A 이상으로 받아야 한다, 아닐 경우 장학금을 끊는다는 조건이 있어요. 사정을 해봐야 안 되는 거잖아요. 90점 아래로 떨어지면 무자비하게 자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공부할 수밖에 없죠. 요새 우리 탈북 대학생들을 보면 조금 화가 나는 게, 우리 딸을 봐도 대학 등록금을 안 내요. 또 거기다 장학금을 받아요. 등록금을 국가에서 면제해 주는데 장학금도 50만원 씩 받으니까. 탈북자들에게 뭔가 제도적인 보완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성적이 안 나오면 등록금을 내야 한다거나 그런 제도가 있어야 긴장할 텐데 좀 무르니까 딸이 공부를 안 해요. 물론 이건 우리 딸의 결함인데, 법적으로 용납되는 그런 허점을 악용하는 게 아닌가. 그런 안타까운 점이 있죠.
진행자 : 사실상 워낙 등록금이 비싼데 공부하려는 학생들은 많다 보니까 다양한 장학제도가 있지만, 극소수에 한정돼 있죠. 공부를 아주 잘하거나 집안이 어렵거나. 그래서 대학생 같은 경우도 나라에서, 은행에서 돈을 빌리고 나중에 취업해서 갚는 현상이 만연해 있는데, 어떻게 보면 탈북자 같은 경우는 등록금이 무상이다 보니까 덜 절실하고 덜 열심히 한다는 점을 지적해 주신 것 같아요. 그런데 소연 씨는 장학금 받아보셨어요?
박소연 : 그 장학금 얘기가 나오니까 눈물이 나려고 해요. 너무 기대했거든요. 제가 2학년인데 저한테 장학금을 신청하라는 거예요. 저는 대상이 안 될 줄 알았는데 성적이 기준을 넘었대요. 그리고 아이 데리고 혼자 사니까 '한 부모 가정'이고, 남한에서 5년까지는 기초 수급자예요. 그래서 저는 1차 대상이 된대요. 정말 좋아서 신청하고 기다렸는데 연락이 없는 거예요. 장학금 재단에 전화를 했더니 탈락됐다고, 다음 기회에 다시 신청하라는 거예요.
옛날에는 장학금이라는 걸 꿈도 못 꿨어요. 북한에서는 장학금이라 건 공부를 정말 천에 하나, 만에 하나 잘 하는 사람이나 한두 명 탈 수 있고. 장학금이라는 말을 제일 많이 들어본 게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일본에 있는 재일 귀국자 아이들을 위해서 북한에서 장학금을 보내준 적이 있어요. 거기에 대한 노래가 나오고, 그 애들이 어머니 조국이고 장군님이라며 울고. 그래서 그렇게 특이한 경우에만 장학금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저한테도 기회가 온 거예요. 그래서 마구 자랑하고 싶었어요. 나는 장학금을 탔다. 아들한테도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싶은데 탈락한 거예요.
진행자 : 탈락한 이유가 있나요?
박소연 : 다 주고 싶은데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까.
문성휘 : 아, 경쟁자가 많아서군요. 그런데 장학재단이 여러 곳에 많아요. 이탈주민지원재단에서도 장학금에 대해 알아볼 수 있고, 그러면 여러 장학재단에 소개해주는 프로그램도 있어요. 그걸 탈북자들이 활용을 잘 못해요. 이 많은 법과 제도를 다 외울 수도 없고 모르고 지나치는 사람이 많거든요. 아무튼 장학금 못 받게 됐다니까 가슴 아프네요.
박소연 : 네, 돈이 문제가 아니고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라는, 그러니까 제가 이 나이 먹어서 공부하고 거기다 장학금까지 받았다고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데 세상에 다 가질 수는 없나 봐요.
진행자 : 지금 몇 학기죠?
박소연 : 2학년 2학기요.
진행자 : 그럼 아직도 2년이나 남았으니까 장학금 받을 기회는 많네요. 또 도전해보시면 되죠.
박소연 : 장학금에 대한 미련은 버렸어요. 장학금 신청 대상자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죠. 지금은 중간고사 시기니까. 오늘도 두 과목이라 치렀는데 인터넷 시험이라는 게 북한 말로 편편히 볼 게 아니에요. 누가 도와준다고 해서 점수가 올라가는 게 아니에요. 북한은 모든 시험이 필기시험이에요. 그런데 사이버대학은 인터넷으로 '예, 아니요' 단답형이거든요.
진행자 : 필기시험은 교수 재량으로 어느 정도 점수를 나눠 줄 수 있는데 단답형은 맞거나 틀리거나 둘 중에 하나네요.
박소연 : 네, 그런데 체계가 얼마나 잘 갖춰졌는지, 정해진 시간이 있어요. 22문제에 60분이면 화면 한 쪽으로 시간이 계속 가는 게 보여요. 그런데 열 문제밖에 못 풀었는데 시간이 다 됐다. 그러면 '어떡해 어떡해' 하는 사이에 종료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열심히 공부하지 않고서는 누가 대신해줄 수가 없더라고요. 그럴 때면 북한에서 학년말 시험에 컨닝할 때가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요(웃음).
문성휘 : 북한도 대학에 장학금 제도가 있어요. 그런데 북한의 장학금은 정해졌어요. 공부를 잘 해서 받는 게 아니라 중학교 때 공부를 특별히 잘했거나, 산불을 끄는 등 공을 세워서 김일성 영예상, 김정일 청년 영예상을 받으면 대학 때 무조건 장학금 대상이 돼요. 또 왜 사람들이 장학금에 관심이 없냐 하면 대학에서 주는 장학금이 북한 돈 3백 원이에요. 돈 3백 원 가지고 달걀 하나도 못 사먹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초에 대학생들이 장학금에 관심도 안 가져요.
박소연 : 문 기자님은 북한에서 대학을 다니셨고, 저는 무산예술전문학교였어요. 남한에서는 그걸 전문대학으로 쳐주더라고요. 북한에서 1990년대에 예술학교에 가는 사람들은 정말 잘 사는 사람들이었어요. 그때 저는 돈이 있어서 간 게 아니라, 고등중학교 5학년 때 노래를 했는데 잘 하는 사람들은 예술전문학교 예비 반에 추천을 해주더라고요. 그래서 발탁이 돼서 갔어요. 그런데 공부를 못하고 매일 공연만 다녔어요. 다른 시간은 겁이 안 나는데 혁명역사 시간에 공연이 있어서 빠졌다면 혁명역사 선생님은 따라 다녀요. 선생님 제 점수 좀... 왜냐하면 혁명역사 과목이 낙제되면 제가 아무리 재능이 있고 노래를 잘해도 북한은 사상 위주잖아요.
무산예술대학에 다니면 북한의 유명한 예술단체에서 뽑아가요. 그런데 불행히도 저는 키가 작아서 저하고 같이 공연한 애들은 만수대 예술단, 피바다 가극단에 뽑혀 가는데 저보다 못한 애들이 뽑혀가니까 화가 나서 2학년 때 그만두고 직장을 다니다 결혼했는데, 그 한이 맺혔어요. 그래서 대학을 다니려고 했는데, 사이버대학을 다닐 때 처음에는 불순한 목적도 있었어요.
주간대학과 졸업증이 같고 학사자격도 준다고 하니까 일단 자격을 취하자고 생각했는데, 사회복지학을 배우니까 거기에 다문화가정, 탈북자 다 나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을 알게 되더라고요. 지금은 공부가 점점 재밌어요. 남한이 다문화가 될 수밖에 없다, 왜 그런가. 그런 걸 알면서 내가 살고 있는 남한, 조국에 대해서 알게 되더라고요. 이제는 사회복지를 배우면서도 이 나라를 알게 되고, 어떤 시대로 나아가는지 알게 돼서 공부를 한 것에 보람을 느껴요.
처음에는 졸업장이나 학위만 생각하고 시작했던 대학 공부. 그런데 소연 씨는 요즘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남한사회, 나아가 세계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 알게 돼 보람을 느낀다고 합니다. 또 앞으로 자신과 똑같은 어려움을 겪게 될 탈북자들을 돕기 위해 사회복지사, 상담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는데요. 이 얘기는 다음 시간에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릴게요. 지금까지 진행에 윤하정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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