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연 씨는 지난해 11월 남한에 도착한 햇내기 입니다. 무산 출신으로 선전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인데요. 하나원 교육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5개월...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에는 남한 정착 7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문 기자님도 처음에 가족은 다 뒤에 두고 오셨겠죠? 외로울 때, 아플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오늘 얘기 시작합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박소연, 문성휘 : 안녕하세요.
진행자 : 소연 씨, 지난 한 주 잘 지내셨습니까?
박소연 : 잘 지냈습니다. 전라도 광주 친구 집에 다녀오고 잘 보냈습니다. 그런데 광주에 가서 눈 수술했던 부위가 조금 잘 못 돼서 한바탕 난리가 났었습니다.
진행자 : 눈 수술을 하셨어요?
박소연 : 네, 하나원에 있을 때요. 북한에서 살 때 눈물이 계속 나와서 산후 탈이라고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는데 여기 와서 국정원에서 조사받을 때 애로 되는 사항 있으면 말하라고 해서 제기했습니다. 하나원에 들어가자마자 수술을 받았어요. 코뼈를 몇 년 전에 다친 적이 있는데 그게 눈물길을 막아서 그렇게 눈물이 많이 나오는 거랍니다.
진행자 : 간단한 수술이었나요?
박소연 : 간단치 않았어요. 전신 마취했고요. 수술 전에 CT, MRI 다 찍었어요. 제가 사회에 나오기 전에 수술을 했는데 사실 그때 너무 힘들었고 그런 기억이 아직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문 기자님, 문 기자님도 사실 저처럼 가족을 다 뒤에 남겨두고 이 땅에 오셨잖습니까? 많이 아플 때도 있었겠는데 그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그때는 금방 와서 가족도 없었겠는데요...
문성휘 : 글쎄요... 가족이 없었을 때라... 저는 인간 생활이라는 게 남이나 북이나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가족이라는 건 있어도 불편할 때가 있고 없어도 불편할 때가 있습니다. 가족이 있으면 아플 때 위로해주고 외롭지 않아서 좋죠. 그렇지만 저희 집사람, 조금만 늦게 들어와도 잔소리를 하는 것이 시끄러워요. (웃음)
진행자 : 그렇지만 소연 씨처럼 이렇게 아플 때는 진짜 가족 생각이 절실하지 않겠어요?
문성휘 : 그때가 사실 제일 힘들죠. 저는 하나원에서 나와서 감기를 심하게 앓았습니다. 주변에 도와주는 적십자 도우미 아주머니와 복지관 선생님들이 있었지만 제가 온 지 얼마 안 돼서 남한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더라고요. 주변에 약국도 있었는데 지리를 모르니 집을 못 찾아올까봐 무서워 나가지 못 했고요. 그냥 주구장창 전화통만 붙들고 있었습니다. 휴대 전화 요금이 얼마나 나오는지도 모른 채 그냥 계속 하나원 동기들에게 전화만 했네요.
박소연 : 맞아요. (웃음) 저도 그랬습니다!
문성휘 : 그런데 동기들이라고 무슨 뾰족한 수는 없고요. 그냥 참아라 어쩌라 하지 길을 모르니까 우리 집으로 찾아올 수 없었고요. 그리고 음식을 해먹기 싫어서 생 라면을 먹고 아픈데도 술을 마셨어요. 그리고는 취하면 서러워서 울고 했습니다. (웃음) 처음에 와서 고달픔, 외로움... 그런 감정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모를 겁니다. 지금은 이렇게 쉽게 얘기하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진행자 : 아니, 주변에 계신 도우미 분들이나 복지원 선생들에게 도움을 요청해보지 그러셨어요. 도움을 주실 분들은 주변에 계셨잖아요?
문성휘 : 제 자체가 도우미 분들이 뭘 물어봐도 대꾸도 안 하고 그러니까 저를 대하기 몹시 까다로워 하더라고요.
진행자 : 적십자 도우미분들이 거의 다 여자 분이잖아요? 그래서 문 기자가 굉장히 낯가린 것이 아닌가요?
문성휘 : 그런 면도 있고요. 소연 씨 같은 여자 분들은 저보다는 훨씬 낫지 않아요?
박소연 : 개인차가 아닐까요? 제가 북한에 있을 때 별명이 '엥 고양이'였어요. (웃음) 사람들이랑 휩쓸리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근데 저는 여자인 저만 우는 줄 알았더니 남자들도 우네요. (웃음)
문성휘 : 그럼요. 처음엔 다 웁니다. 어떤 남자도 다 울 겁니다. 남한 정착은 3년이 지나야 합니다. 소연 씨도 들어 보셨겠는데 남한에 온지 3년이 지났다면 이제 대충 물개를 알겠네 그럽니다.
박소연 : 네, 들어봤습니다.
문성휘 : 5년이 지났다면 이젠 됐어, 이렇게 말하죠. 오래된 탈북자들끼리 앉아서 얘기할 때 누가 어떤 말을 했다고 하면 일단 남한에 온지 얼마나 됐나 물어봅니다. 3년이 안 됐다고 하면 '그러니까 그럴 수밖에...' 이럽니다. 5년이 됐다고 하면 '5년이나 됐는데도 그래?' 그럽니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저도 남한에 온지 3년쯤 됐을 때는 남한 사회에 대해 모든 걸 다 안다고 자부했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부끄럽죠. 외롭다는 생각, 서럽다는 생각도 사실 다 철없는 겁니다. 남한테 하소연만 하게 되고 내 절로(스스로) 뭔가 개척해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죠. 소연 씨 말마따나 남자인데도 눈물이 나고요. 군관을 하다가 여기 온 제 하나원 동기는 정말 강철 같은 사람인데 그 친구도 몸이 아플 땐 울었다고 해서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하나원 동기 중에 비슷한 또래들이 일 년에 한 번씩 모이는데 모이면 그때 얘기를 참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 다들 하는 얘기는 그때 실제 어려웠던 것이 아니라 외로움이 많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외로움을 달래지 못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어리석었다고 합니다.
진행자 : 그럼 어떻게 했으면 좋았을까요?
문성휘 : 옆 사람, 도우미, 상담사들에게 자기 속사정을 터놓으세요. 복지관에 다닐 텐데 어느 복지관이나 상담사들이 있습니다. 저도 처음엔 내 개인적인 얘기를 처음 보는 상담사에게 할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상담사가 물어보면 내가 왜 당신에게 그런 얘기를 해야돼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굉장히 따뜻하게 먼저 자기 얘기를 시작했어요. 기억에 나는 게 첫 질문이 '많이 힘드시죠?'... 속으로 당연히 힘들지 하고 있는데 이 분이 자기 유학 시절 얘기를 해줬어요. 처음에 미국에 공부하러 가서 너무 외롭고 그래서 아팠을 때 많이 울면서 서울 집에다 전화를 했대요. 전화비가 엄청나게 많이 나왔답니다. 그래 그 얘기를 듣고 아니, 그쪽은 돈이 있어서 유학 간 것이고 나랑 사정이 다르지 않냐고 따졌는데 그렇게 말문이 트여서 이런 저런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됐습니다.
박소연 : 저도 첫 달에 전화비가 엄청 나왔습니다. 문 기자님 생활과 제 지금 생활이 어쩜 그리 똑같은지 모르겠네요.
문성휘 ; 상담센터는 동사무소, 구청 민원센터, 복지관 등 많습니다. 찾아가서 상담을 받아보세요. 물론 먼저 찾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많이 터놓으시는 것도 중요합니다.
박소연 : 사실 저도 여기 와서 친구 집에 가본 게 이번이 처음입니다. 문 기자님은 강하게 보이고 저는 진짜 남자는 안 울 줄 알았는데 참 의외네요.
진행자 : 남한 정부에서 정착을 도와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는데요. 제도로 채울 수 있는 부분이 적은 것 같네요.
문성휘 : 맞아요. 그리고 그 제도마저 잘 활용하지 못하는 면도 있고요...
힘들면 고향에 갈 수 있고 가족들의 목소리를 언제든지 들을 수 있다면 객지에서 새로 적응하는 일이 이렇게까지 힘들고 외롭지는 않겠죠. 고향이 북쪽이라 탈북자들의 정착 생활은 더 외롭고 힘이 듭니다. 남쪽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 이런 힘들고 외롭던 시절이 행복한 삶을 위해 자양분이 된다는 사실, 남한에 정착해 살아가는 많은 탈북 선배들이 잘 보여주지 않나 싶습니다.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 여기까지입니다. 다음 주 이 시간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