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한 햇내기 입니다. 무산 출신으로 선전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인데요. 하나원 교육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근 일년...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에는 남한 정착 8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근데 남쪽 집들은 왜 이렇게 울바자가 낮아요?
오늘 얘기 시작합니다.
박소연 : 우리가 지금 울바자에 대해 얘기하고 있는데요. 북한 영화 '대흥단 군당 책임비서'에 보면 군당 책임비서가 책임비서 집은 (울)바자가 높으면 안 된다고 자기 집 울바자를 훌까는(부시는) 장면이 있어요. 그게 한번 주제로 나오면서 간부집들엔 배재를 다 낮춰라 그래서 난리였죠. 우리 무산도 춥잖아요? 바자를 높이니까 겉풍이 좀 덜해요. 근데 이걸 낮춰 놓으니 집이 너무 춥더라고요. 그러니까 땅 집에 사시는 부모님들은 제가 가기만 하면 동사무장을 욕해요. 인민반장은 더불어 욕하고... (웃음) 추워서 못 살겠다는 얘기죠. 그러면서도 배재를 다시 못 높이고 눈치만 보죠. 북한에선 누구나 시범에 걸리면 안 되니까 때리면 아픈 척이라도 하랬다고 일단 따릅니다. 그리고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배짱 좋은 사람이 낮춰놓은 배재에 판자를 덧대서 높입니다. 하나, 둘씩 주변 집들의 배재가 따라 올라가죠. 울배재가 낮으면 춥고 사는데 굉장히 불편한 게 사실입니다.
진행자 : 근데 울배재가 높으면 이웃끼리의 교류 같은 건 좀 없어진다면서요? 소연 씨도 배재가 높아져서 좀 안타까운 게 많다고 했잖아요.
박소연 : 그런 일면도 있어요. 그러나 조선 속담에 있잖아요? 쌀독에서 인심난다고요... 옛날엔 2.16, 4.15 때 사탕 과자 선물을 받으면 옆에 할머니, 할아버지만 계신 집에 사탕 몇 알, 껌 몇 개 챙겨서 갖다드리곤 했어요. 아이들이 없는 집에는 사탕 봉지가 안 오니까 늙은이들만 있는 집은 이웃에서 챙긴 거죠. 근데 사는 게 힘드니까 이제 그런 거 없죠... 여기 와서 느낀 건데 울바자가 있다는 게 도시 미화에는 치명적이더라고요. 북한은 텔레비전에서도 가끔 보셨겠지만 판자 안에 굴뚝만 포처럼 가뜩 올라와 있죠. 제가 이런 얘길 하면 한국 어른신들은 우리가 60년대 박정희 때 그렇게 살았던가... 그러시거든요? 남한도 그런 과정을 분명 거쳤죠. 북한도 발전을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나겠는데... 문 기자님, 북한은 이미 그런 발전이 지나갔죠? 공산주의는 지나갔다고 하잖아요?
문성휘 : 그러게요. 이자 소연 씨가 말한 것처럼 공산주의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지나갔죠. (웃음) 북한에서 하는 농담입니다.
진행자 : 공산주의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지나갔다...
문성휘 : 잘 살던 때는 다 지나갔으니까요. 북한은 후퇴하지 않았습니까?
박소연 : 그렇죠. 이 울바자에 얽힌 가슴 아픈 사건들도 많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막 시작할 때 울바자를 막 치기 시작하면서 이웃끼리도 경쟁이 붙었어요. 센티를 재서 딱 집 숫자대로 나누는데 울바자 거리를 이렇게 하자 그러면 양쪽 끝집들은 자기네는 더 줘야한다고 주장하고 또 대문을 어디로 내느냐 때문에 다투기도 하고요. 그러다가 어느 날 양 옆 집에서 울바자 만드는 것 때문에 싸움이 붙었어요. 울바자를 세울 때 기둥을 세우려면 땅을 파야하니까 곡괭이를 가지고 나오거든요? 그 곡괭이를 든 상태에서 싸움이 붙어서 큰 사고가 났어요. 곡괭이를 들고 있다가 홧김에 찍은 거죠. 사람은 죽지 않았는데 불구가 됐고 그 집에선 화가 나니까 상대 집 안으로 들어가서 삽날을 갖고 다 깨부수었어요. 나중에 그 집에서 세대주가 불구된 집을 법에 걸었는데 이유는 김일성, 김정일 초상화가 있는 집에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다는 이유였죠. 결국 그 집이 징역을 갔어요. 코에 걸면 코걸이 같은 법이죠. 울바자라는 게 생기면서 행복하고 좋은 것들이 많이 사라진 것 같습니다.
문성휘 : 맞아요. 또 봄날엔 텃밭 갖고도 많이 싸우죠. 울바자 싸움, 텃밭 싸움... 참 많아요. 울타리가 점점 높아질 수밖에 없죠. 그리고 북한에서 울바자가 튼튼하고 높아야 하는 이유가 있어요. 집 안에서 몰래 남한 영화라도 보는데 갑자기 검열이 들어오면 어떻게 해요? 될 수록 문을 늦게 열어줘야 되는 거예요. 그러자면 울타리가 든든하고 높아야 되겠죠.
진행자 : 높은 울배재가 참 여러 가지를 상징하네요. 단순한 배재가 아니네요.
문성휘 : 그렇죠.
박소연 : 더군다나 부모나 가족이 중국이나 남한에 온 사람들은 핸드폰을 감추고 있어요. 북한도 이제 전자는 좀 발전했잖아요? 인민생활 발전은 안 시켜도 중국이나 한국하고 내통하는 사람을 잡으려고 그런 기계는 어디서 잘 사와요. 우리 동네도 마당 앞에 늘 핸드폰 탐지기 차가 한대 서 있었어요. 동네에 한국 간 엄마하고 자주 통화하는 집이 있었어요. 보위부에서 그 딸한테 자꾸 와서 '너희 엄마 한국 갔지?' 물어봤지만 근거가 없어서 어쩌지 못했죠. 그런데 결국 그 딸이 정치범 교화소를 갔습니다. 김정일이 현지지도로 무산광산에 온다고 배자를 매다(1 미터) 40으로 낮추라고 했어요. 배자가 낮을 때 집에서 전화를 받다가 핸드폰 탐지기에 걸린 거예요. 만약 배자가 높았으면 보위원들이 배자를 뜯는 시간에 통화기록을 지우면 되는데 와장창하고 문을 열고 들어오면 지울 틈도 없는 거죠. 통화는 끊어졌지만 010으로 기록이 남아있어서 변명도 못하고 바로 잡혀갔답니다. 그런데 끌려가서 법에 가서 공손해야겠는데 야는 우리 엄마가 살기 힘들어서 한국 갔다, 우리도 살아야하지 않겠냐고 반항하는 바람에 말로 더 벌어서 어디 갔는지 없어졌어요. 왜 그런 말 있잖아요? 사람이 죄를 짓고 살지 말아야 한다... 남한에 이렇게 얘기하면 그 죄는 사기 같은 진짜 죄죠. 근데 북한은 죄가 아닌 죄에요. 못살아서 도움 받는 게 죄예요? 울바자가 좀 높았으면 그 애가 피해를 안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일이 그렇게 되니까 동정이 되는 거예요
문성휘 : 이젠 국경에 핸드폰 탐지기가 엄청 들어왔다고 하는데요.
박소연 : 이젠 카메라까지 세웠어요.
문성휘 : 그런 걸 살 돈이면 인민들 배급이나 좀 주지... 그걸 사들이려면 엄청난 돈이 들어가겠는데 왜 북한 사람들은 저렇게 밖에 못하는지 이해가 안돼요.
박소연 : 사람들이 살 수 있게끔 해주고 가라고 하면 누가 가요? 제 고향을 뜰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저 사람을 최악으로 몰아넣고는 가지 말라고 하니까 사람들이 거기서 살아가려고 삐지잖아요. 그럼 그걸 또 역적이라고 몰이를 치고 총살하고... 정말 악마, 지옥 같은 세상이죠...
문성휘 : 그러니까 80년대 약간 후반인가? 한 87년? 그때까지만 해도 북한이 좀 살았던 것 같아요. (웃음) 제가 어떤 기억이 있냐면 남새 상점에 사과를 자동차에 실어오는데 여기처럼 박스에 담아 들여오는 게 아니라 '바라'라고 하는데 차 적재함에 그대로 실어 와서 통 채로 부려놓아요.
진행자 : 그럼 사과가 다 망가지지 않아요?
문성휘 : 망가지죠. 그래도 그렇게 했어요. 차가 와서 사과를 남새 상점 울타리에 부려놓으면 우리는 막 뛰어가서 울타리 틈마다 손을 넣어서 사과를 뽑아내요.
박소연 : 저도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문성휘 : 그 울타리 옆에서 사과를 끌어들이는 사람들이 안으로 손이 쑥 들어오면 막 욕을 해가면서 발로 손을 밟아요. 그래도 난 용케 사과를 꺼내 먹었어... (웃음)
진행자 : 우리가 앞에 새해 소망을 이야기하며 시작했잖아요? 그런 소망들이 좀 이루어지면 북한에 울배재가 낮아질까요?
문성휘 : 그렇죠. 본질적으로 본다면 단순히 도적놈들만 없어진다고 해서 울타리가 낮아질 수는 없어요.
몰래 개인적으로 소형라디오를 가지고 있다거나 녹음기로 남한 노래를 듣거나하면 검열 성원들이 들이닥칠 때 시간을 지연시켜줄 장치가 있어야 하는 거예요. 아까 핸드폰 이야기처럼 말이죠. 만약 김정은이 좀 잘해줘서 배급이랑 물건이 풀린다 해도 울타리는 낮아질 수가 없어요.
진행자 : 근데 감시도 좀 수월해지고 처벌도 없어진다면 배자가 좀 낮아지지 않을까요?
문성휘 : 그럼 낮아지죠.
박소연 : 자유롭게 (남한에 간 가족들에게) 방조 받을 수 있으면 받아라, 그럼 울배재가 낮아지겠는데 그렇게 될 수가 없죠.
문성휘 : 그러니까 북한 울배재는 단순히 도적놈들을 막는 울타리가 아니에요. 김정일이 말한 사상문화적인 그물, 자본주의 황색문화가 들어올 수 없게 사상문화적인 울타리를 높이 치라고 했는데 반대로 지금 개인들은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자본주의 사상문화를 지키기 위한 울타리를 치는 거죠. 그러니까 이런 사상 문화적, 언론에 대한 검열이 없어지지 않는 이상 울타리가 낮아질 수가 없는 거예요.
진행자 : 처음에 울배재 높아졌단 얘기에 도둑이 많아졌나보다 생각했어요. 저는 그 검열에 대한 생각은 못해봤네요.
문성휘 : 저도 얘기가 처음 시작될 땐 그런 생각까진 못 했습니다.
진행자 : 사실 지금 당에서 얘기하는 자본주의나 개방에 대한 열의가 바닥이라고 한다면 울배재 안에 사는 주민들의 개방에 대한 열의나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호기심은 굉장히 높거든요. 이 수준이 같거나 비슷해져야만 울배재가 사라질 수 있겠네요.
문성휘 : 그렇죠. 그 울타리 높이라는 게 자본주의 사상 문화를 지키기 위한 북한 주민의 욕심의 높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진행자 : 예전에 중국을 '죽의 장막'이라고 했던 거 아세요?
문성휘 : 몰라요.
박소연 : 처음 들어봐요.
진행자 : 옛 소련은 '철의 장막', 중국은 '죽의 장막'이라고 했어요. 장막이라는 건 냉전시대에 개방하지 않는 공산 국가를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사실 이제 철의 장막, 죽의 장막 다 걷어냈거든요. 이제 북한의 울배재도 좀 낮아져야 하지 않을까요?
문성휘 : 그게 언제 낮아지겠어요. 정말 울타리가 낮아지는 날은 통일이 되는 날이 아닐까요?
박소연 : 통일이 되면 그 울바자가 자연히 낮아지게 되겠죠.
문성휘 : 참... 씁쓸한 얘기죠.
박소연 : 사실 좀 가벼운 생각으로 울배재 얘기를 시작했는데 지금 북한 얘기는 웃으면서 할 얘기가 하나도 없네요. 통일이 되면 이것이 다 우스운 추억으로 방송에 나갈 수 있을텐데 지금은 그저 바람일 뿐이고요...
진행자 : 저희 방송이 늘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그러길 바라겠다고 끝날 수밖에 없거든요. 새해에는 좀 확실한 얘기 좀 해야 하는데 오늘도 '그렇게 바라겠습니다' 이렇게 끝내야 하네요. (웃음)
문성휘 : 새해에는 북한의 울타리가 좀 낮아지길 기원합니다.
진행자 : 저희 새해 소망이랑 딱 부합하는 이야기인 것 같아요.
박소연 : 옆집에 다시 떡이랑 내 가는 풍조가 다시 왔으면 좋겠어요...
지난 시간 시작하면서 문성휘 기자, 박소연 씨 새해 소망을 얘기했는데요. 두 사람 다 북한이 조금 더 열렸으면, 조금이라도 개방됐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이게 아마 문성휘 씨가 올해까지 8년 째, 소연 씨가 3년째 마음에 간직하는 소망인데요. 저도 바라봅니다. 울바자 없는 북한 사회...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밖으로> 울바자 얘기 2주에 걸쳐 전해드렸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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