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 째 설날 (1) 변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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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 5년 차를 맞고 있습니다. 2012년 아들을 데려와 혼자서 키우는 열혈 '워킹맘' 그러니까 일하는 엄마입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엔 남한 정착 10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작년에는 선물을 받아서 카카오 스토리에 올렸는데 올해는 설이 지난 지금도 정리를 못 했어요. 이게 계속 고마워 해야 하는데 이제 일상이 돼버렸어요...

설날 선물 얘깁니다. 여기저기 들어온 선물에 그렇게 감격하지 않는 것도 이제 소연 씨가 남쪽에서 산 날들이 꽤 된다는 반증입니다. 올해 설 부쩍 변했다는 걸 느낀다는데... 그렇게 남한에 적응 빨리 하겠다고 서두르던 것과는 반대로 소연 씨는 조금 아쉬워합니다.

오늘 <세상 밖으로> 소연 씨와 문 기자의 솔직한 속마음 얘기를 들어봅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문성휘, 박소연 : 안녕하세요.

진행자 : 명절들 잘 지내셨습니까?

박소연 : 손해만 봤네요. 탈북자 친구들이랑 함께 휩쓸리다 보니까 용돈이 한 20만원 나갔는데 우리 아들은 십 만 원 받았는데 그것마저도 저를 안 주네요. (웃음)

진행자 : 이해합니다. 저도 그렇습니다. 세뱃돈을 줄 사람만 있고 저에게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른들 용돈 드리고 조카, 자녀들에게 세뱃돈 주고요.

박소연 : 그러게요. 저희는 주는 의무만 있고 받을 권리는 없는 세대입니다. (웃음)

문성휘 : 그러가요? 저는 좀 받았는데... 하지만 이튿날이 딸아이 생일이라 받은 것만큼 빼앗겼습니다. 본전 못 찾은 것 같아요. (웃음) 근데 그 외에 여러 곳에서 선물을 받았으니까 기분은 상쇄됐습니다.

박소연 : 아, 이자 선물 소리 나오니까 저도 손해는 안 봤습니다. 집에 들어가는 복도에 움직이기 불편할 정도로 사과, 배 박스가 쌓였네요. (웃음) 그런데 저는 누구한테도 못 보냈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주소를 쳐서 택배를 보내고. 이것에 익숙해지질 못 했습니다. 아직 잘 못해요.

진행자 : 어디서 그렇게 보내주시는 건가요?

박소연 : 지인들... 그리고 경찰서에서 올해도 변함없이 김 한 박스.

진행자 : 탈북자들에게 주는 거죠? 언제까지 보내주는 건가요?

박소연 : 그 끝을 모르겠습니다. (웃음)

문성휘 : 이제 해마다 명절 때는 그 정도는 항상 보내주도록 정례화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복지관에서 주고 내가 다니는 교회에서 주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제가 그 동안 기독교만 다녔는데 이제 시간을 내서 불교와 천주교도...

박소연 : 선물 받으려고요? 도대체 무슨 소리하세요! (웃음) 근데 정말 첫해, 제가 이 방송을 막 시작했던 그 해 명절에는 경찰서에서 김을 선물로 주고 이런 것에 대해 정말 너무 감격해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택배 기사가 와서 택배입니다... 그러면서 받아놓고 아직 뜯어도 못 봤네요. 그니까 이제 먹고 나머지가 생겼다는 얘기죠. (웃음) 초심으로 돌아간다고 맨날 입만 너풀거렸네요. 변했습니다. 저 박소연이란 여자는 금방 와서 붉은 기를 지킬 것처럼 그러더니 3년 사이에 어떻게 변했느냐 욕할 수도 있는데요. 이게 변한 것도 있지만 사는 게 바빠서 그렇습니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들어오니까 힘들어서 그냥 자게 되요. 일이 바빠진 것과도 연계가 됩니다...

진행자 : 그리고 생각해보면 식구가 딱 둘이니까 선물을 받은 걸 다 먹기도 힘들어서 부담이라고 생각될 때도 있고요.

박소연 : 불과 3년 전만해도 북한에서 설전에는 보름이나 한 달 전부터, 왜냐하면 설 코앞에 가게 되면 가격이 비싸지니까요. 입쌀도 사고 찹쌀도 사고 하면서 설날이 오는 게 실감이 났습니다. 메주콩 한 킬로를 사서 콩나물을 놓으면 일곱 킬로가 되요. 뿌리에 털이 나지 말라고 데라미진을 가루를 내서 콩나물 물에 섞어 키우면 콩나물이 젓가락처럼 자라고... 콩나물을 물을 주며 설날이 다가 오는구나 들뜨고 그랬는데 한국에 와서 설날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설음식이라고 해서 떡집에 가면 떡을 다 포장한 걸 천원, 1천5백 원이면 사고 집에서 송편을 장 저녁 콧물 훌쩍 거리며 빚을 일도 없고요. 기대감이 없어요.

문성휘 : 너무 밋밋해요.

진행자 : 그럼 음식을 하시면 되잖아요. (웃음)

문성휘 : 하기는 싫죠!

진행자 : 저는 참 이상해요... 두 분 말씀이 맞습니다. 남쪽이 막 설이라고 해도 설레고 이런 건 없죠. 그렇다면 설을 앞두고 북한에서처럼 음식을 준비하고 하시면 되는데 왜 안 하십니까?

박소연 : 해보니까 음식을 하는 게 손해더라고요! 식구가 적어서 남고 또 파는 것처럼 그렇게 맛있게도 못해요. 상점에 가면 포장해서 파는 개성왕만두가 사실 더 맛있습니다. (웃음) 비싸지 않고요.

문성휘 : 떡국 대도 그렇죠. 누가 그걸 가루로 떡을 만들어서 떡을 빼서... 그냥 떡집 가서 한 봉지 사오면...

진행자 : 정말 그냥 그리워만 하시는군요. 직접 하시기는 싫고. (웃음) 소연 씨가 올해 남한에서 몇 번 째 맞는 설인가요?

박소연 : 4년 째...

문성휘 : 저는 10년 째...

진행자 : 많이 바뀌셨나요?

박소연 : 그렇죠. 작은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잃어가는 것 같습니다.

문성휘 : 왜 그런지 소중한 것들이 다 빛이 바라는 느낌? 금방 왔을 때는 아닌 게 아니라 그런 선물이 너무 고마웠고 그리고 받으면 우쭐해졌어요. 너무 기분 좋았고. 이제는 심드렁하죠. 그리고 이젠 설날이면 어디어디에서 선물이 들어오겠구나 연례행사 같은 생각이 들고요. 제일 안타까운 것은 한 3년까지는 설날에 고향 생각이 나서 아침에 밥 먹으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어요. 설날만은 정말 간절하게 생각됐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냥 씁쓸하고 안쓰럽고 그러던 게 지금은 평범한 날처럼 돼버렸어요. 또 나에게 소중했던 것들이 사라져가고 이제는 새로운 소중한 것들이 생겨났습니다. 례하면 금방 왔을 때는 제가 선물을 받아도 누구에게 보낼 사람이 없었지만 그만큼 돈도 없었고 그럴 줄도 몰랐죠. 그런데 이제 시간이 지나다보니까 인연이라는 게 맺어진 사람들도 생겼고 사는 과정에 이익을 나누는 사람들도 생겨서 그런 사람들에게 이제 저도 선물을 챙겨야 하고요. 사실 보면 외로움은 좀 덜해졌어요.

진행자 : 그건 좋아진 것 아닙니까?

문성휘 : 좋은 점도 있지만 고향이 자꾸 잊혀져 가는 것 같은 서운한 마음도 있습니다.

박소연 : 저는 설 전에 집에 천 달러 보냈습니다. 설 쇠라고 보낸 건데요. 그래서 그런지 올해 설은 죄의식이 없었어요. 내가 밥을 먹고 있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 완전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 돈을 보냈으니 우리 집은 설에 삼시세끼 밥은 먹겠구나. 그래서 괴롭지는 않았네요.

진행자 : 올해는 임진각은 안 다녀오셨습니까?

박소연 : 추워서...

문성휘 : 그리고 사실 그렇지 임진각에 가서 다 같이 하는 것보다 집에서 조용히 치루고 싶어요. 그리고 조용히 만나서 술을 마실 친구들도 생겼고 그래서 거기 가게 안 돼요.

진행자 : 그런데 임진각이 가는 것이 고향 땅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으니까 가는 것 아닙니까?

문성휘 : 에이그... 내 집에 개성에 있다면 가겠죠. (웃음) 저쪽 끝에 있으니까... 차라리 내가 연길에 가면 어떻겠는지.

박소연 : 와서 첫 해는 임진각에 갔었죠. 망원경에 오백 원짜리 넣고 눈이 빠지게 보면 영생탑도 보이고... 처음엔 막 눈물이 났어요. 다음해부터는 그냥 그래요. 저긴 내 고향은 아니니까요. 관광객들이 보는 것처럼, 이젠 망원경도 안 봅니다. 그냥 북한 어느 농촌이구나... 이번에 제가 중국에 갔을 때도 내 고향이 아닌 데는 건너편 그냥 저 시커먼 곳이 북한이구나 했는데 굽이돌아 내 고향 땅이 딱 보이는 데는 그냥 막 눈물이... 누가 울어라, 울어라 해서 나오는 눈물이 아니라. 내 감자배낭 매고 저 길을 걸었지 그러면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어요.

문성휘 : 임진각 건너편 땅은 그냥 북한 땅이라는 생각도 안 들고 그냥 강의 저 편에 불과하죠.

진행자 : 그런데 실향민들은 매해 명절마다 60년 가셨다... 이런 분들도 계시고 지금도 가시는 분들이 많고요.

문성휘 : 아, 지금도 실향민들 가시는 분들 많죠. 강원도, 황해도 쪽에 온 탈북자들도 해마다 갈 겁니다. 아닌 게 아니라 나 같았어도 날마다 가보고 싶지 않겠나... 저도 국경 연선에 서면 눈물이 막 쏟아질 것 같아요.

박소연 : 실향민들은.... 이제 살날이 얼마 없으니까 죽기 전에 한번이라도 더 보자는 생각이 많을 것 같아요. 그리고 저희는 아직 배포가 유한 것이죠. 처음엔 임진각에 가서 울지만 아니야 우리 죽기 전엔 통일이 되겠지.

문성휘 :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죽기 전에 가보고 싶고 그리운 사람들 다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고향의 음식과 설의 분위기는 그립지만 남쪽에서 그 분위기를 살리자니 솔직히 귀찮고 가족, 친지도 그때처럼 많지 않고요. 또 설날 마냥 그립고 임진각에서 북한 땅 한 자락만 봐도 눈물이 나던 그 시절은 지났다는 게 두 사람의 정말 솔직한 마음인 것 같습니다. 더 솔직한 마음은 자면서 꾸는 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고향에 가도 남한의 집으로 돌아오는 꿈을 꾼 답니다.

변했다, 비난 하시겠습니까? 가장 힘들었던 시절은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고 그만큼 고향에서의 삶이 이 두 사람에게 힘들었다는 얘기가 될 것 같습니다.

이 얘기는 다음 주 이어갑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