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 5년 차를 맞고 있습니다. 2012년 아들을 데려와 혼자서 키우는 열혈 '워킹맘' 그러니까 일하는 엄마입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엔 남한 정착 10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작년에는 선물을 받아서 카카오 스토리에 올렸는데 올해는 설이 지난 지금도 정리를 못 했어요. 이게 계속 고마워해야 하는데 이제 일상이 돼버렸어요...
시간 조금 지났지만... 설날 선물 얘기였습니다. 여기저기 들어온 선물에 그렇게 감격하지 않는 것도 이제 소연 씨가 남쪽에서 산 날들이 꽤 된다는 반증이겠죠? 올해 설 부쩍 소연 씨는 본인이 변했다는 걸 느꼈다는데요. 남한에 처음 왔을 때 가졌던 초심도 고향에 대한 그리움도, 원망도 지어는 탈북 과정에서 겪었던 고생도 흐려져 간답니다.
오늘 <세상 밖으로>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설날을 지내고 온 두 사람의 솔직한 얘기 이어갑니다.
문성휘 : 이제 수기를 쓰라면 장면 서사시가 나오겠죠. 처음 나와 썼으면 비가 내려서 처량하게 처마 밑에 앉았다. 강냉이 한 알이 그리웠다... 이렇게 썼겠는데 지금은 날쌔게 공안을 피했다. 내 발바닥에서 불이 나고 나도 날 수 있다는 생각이 그때 문득 들었다. 다행히 빈 초막을 찾았는데 나는 거기서 며칠간 의지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쓰겠죠. 서럽게 눈물 흘렸다 이런 부분은 분명 다 없어질 것이고 내가 정말 용감했고 그 수많은 탈북자들을 내가 막 선도해서, 동무들 일어서십시오. 지금 주저앉으면 우리는 영원이 못 갑니다... 이렇게 호소했던 것처럼. 수기를 쓰라면 그렇게 쓸까 겁이 납니다. (웃음)
박소연 : 아, 근데 진짜 저도 넘어올 때 죽음을 각오하고 넘어왔고, 감자 칼을 쥐고 넘어왔고, 아들 때문에 울며불며 힘들게 왔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까 그런 감정들을 차차 잊게 됩니다.
진행자 : 그러면서 또 명절 때 고향을 느끼는 감정들도 좀 변하고요?
문성휘 : 그렇죠. 주로 제일 많이 친구들을 만나는 때가 이런 음력설, 추석 같은 명절입니다. 옛날에는 만나면 신나게 술 많이 마시고 어느 집에 붙박여서 함께 보내고 그랬는데 지금은 만나도 식당에서 몇시까지 만나고 한참을 흐닥흐닥 놀다가 술 한 잔 마디고 밤에 깊으면 다들 집으로 빠져갑니다.
진행자 : 예전에 함께 프로그램을 했던 북쪽에서 온 청년들은 명절 때는 아예 집밖으로 안 나온다는 친구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저는 명절이면 다들 정말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요...
박소연 : 다 그렇진 않아요. 그리고 그 친구들도 이제 그러지 않을 겁니다.
진행자 : 변하는 게 자연스러운 것이겠죠?
박소연 : 그럼요. 이게 더 좋습니다.
문성휘 : 사람의 성격에 따라는 것이죠. 늘 고독함을 많이 느끼는 사람들은 더 할 것이고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저같이 변하는 것이고... 그리고 한국 사회는 치유하는 사회입니다. 항상 치유하라, 고쳐라, 잊어라. 북한은 잊지말라, 증오해라, 때려라 그러죠. 착취 받고 억압받던 지난날을 잊지 말자... 이것이 북한이 가장 잘 만들어낸 구호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그 말을 가장 잘 기억해야할 사람들이 우리고요. 그런데 아픈 상처를 빨리 걷어내라고 권하는 한국 사회에서 어느새 그런 제 상처들도 걷혀 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더 빨리 잊는 것 같고. 북한처럼 늘 가는 곳마다 잊지 말자, 찢어죽이자, 때려죽이자 했으면 복수심과 증오심을 키웠겠죠.
박소연 : 그러나 발전도 없었겠죠.
문성휘 : 그래서 그런 생각이 듭니다. 국가의 제도 그리고 사회의 분위기가 사람을 얼마나 변화 시키는가.
박소연 : 그리고 문 기자님이 말씀하신 그런 사회적인 환경도 있지만요... 저도 두 번째 설까지는 많이 울었는데 이유는 세 가지였어요.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나로 인해서 저쪽에 남은 가족이 피해를 받지 않을까하는 걱정, 이대로 통일이 안 되면 가족들을 그쪽에 두고 나는 여기서 묻힐 수 있다는 두려움에 울었습니다. 한해, 두해 가니까 그래도 내가 잘 사는 나라에 온 덕에 가족들을 도와주면서 부담감이 줄었습니다. 지금까지도 내가 맨날 괴롭고 울고 그러면서 누구한테 좋은 건가요?
문성휘 : 아... 진짜 올해는 제가 남한 사람이 다 됐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새해 첫날 아침에 떡국을 먹는데 그걸 명심하고 떡국을 끓여서 가족들이 한입씩이라도 먹게 했습니다. 그런데 한 이틀 뒤에 앗차! 싶었습니다. 이런! 내가 설날에 국수를 못 먹었네! (웃음) 북한에서는 이렇게 추운 겨울에 시원한 갓김치 물에 말아서 감자 농마 국수를 먹습니다.
박소연 : 맞아요. 설에 그렇게 먹으면 정말 좋았죠. 우리 집은 시집 간 딸인 제가 오면 점심에 농마국수를 눌러먹었는데 분틀 위에 제가 앉고 아빠가 누르고 엄마는 아래서 젓가락 질을 해서 국수를 빼내죠. 이렇게 나온 국수를 보통 식구가 많으니 불려 먹는데 저는 그 바로 삶은 생국수를 먹고 싶어서... 새벽에는 엄마 눈치를 딱 보고 한 줌 쥐어서 돌아서 몰래 먹고. (웃음) 그리고 그걸 얼려서 다시 데워 먹으면 진짜 질겼는데....
문성휘 : 그러니까 내가 그 국수를 잊고 안 먹다니요! 와... 한심해요.
진행자 : 그런데 잊지 않는 게 맞는 건가요? 진짜 잊지 않았으면 증오나 미움만 더 커지지 않았을까요? 내가 가족을 두고 떠나게 한 그 체제 그리고 그 사람들에 대한 증오와 미움이요.
박소연 : 처음에 빈 아파트에서 혼자 울면서 그런 생각 많이 했어요. 저 나라, 나를 이렇게 못 살게 아니 굴었으면 우리 왜 여기 왔을까... 그때는 진짜 북한을 미워했는데 지금은 이런 미움도 많이 옅어지고 지금은 무슨 생각이냐 하면 그냥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는 그 제도가 안 바뀐다는 걸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거기서 빠져 나와서 너무 다행이다....
문성휘 : 저는 그게 영원히 깰 수 없는 하나로 응어리로 남은 것 같아요. 좀 보면, 설날에 그런 응어리가 구체화 되고...
박소연 : 더 아프고요.
문성휘 : 맞아요. 기분이 좋다고 해도, 아무리 웃어도 개운하지 않은 뒷맛이 있습니다.
진행자 : 그래요... 지금 명절날이라도 고향 생각이 좀 옅어졌다, 이런 얘길 저희가 했지만 그래도 '고향'하면 제일 생각나고 그리운 것은 뭔가요?
문성휘 : 저는 사진처럼 집안이 그대로 다 보입니다. 부엌 들어가던 것부터 식장에 붙어있던 그림까지 다 생각나요. 고향은 무엇이냐? 고향하면 어머니! 고향하면 어머니 얼굴이 먼저 떠올라요. 아버지보다 엄마가 더 살뜰하게 챙겨줘서 그런지 엄마 얼굴이 먼저 떠오르고요. 추억의 빛으로 조금 바래졌지만 내가 일부러 생각을 끄집어내면 정말 그때 그 모습이 그대로 보입니다. 지어는 우리 집에 이런 재떨이가 있었는데 이런 것도 다 기억이 되는데 이젠 일부러 그걸 꺼내려고 안 하고. 사람이 눈에 점점 막이 씌우는 걸 그대로 두면 눈에 멀게 되는 것처럼 자꾸 쌓여갑니다. 그걸 세월의 낙엽이라고 해야 할지...
진행자 : 일부러 헤집어 놓지 않으려고 하시는 것 같은데요? (웃음)
문성휘 : 네, 그래요. 옛날에 그런 생각을 자꾸 했어요. 너무 잊고 살지 않나... 그런데 이제는 잊으려고요. 기왕이면 잊고 편하게 살자.
진행자 : 어차피 바뀌는 것은 없는데...? 이 말씀인가요. 하지만 문 기자가 떠올리는 그 풍경은 제 눈앞에서 보일 것 같네요. (웃음) 소연 씨는 어때요?
박소연 : 저는 4년 동안 똑같습니다. 대문을 두드리고 아버지, 아버지 세 번 정도 소리치면 야, 소연이 왔다...하면서 나오는데 설날이면 춥잖아요? 북한이 너무 추워요. 25도. 북한은 대문 앞에 도랑을 파요. 그 도랑에 구정물을 버리면 겨울엔 그게 얼어서 대문 높이를 넘어버리는데 그럼 대문을 열기 위해 그걸 도끼로 까야 해요. 기다리면서 도랑 구정물 얼은 것에 콩나물 대가리나 밥알 같은 게 보이면 이런 건 돼지를 주지.... 이러면서 구시렁거리고. 배재가 나무 배재(울타리)이다 보니까 그 틈으로 안에서 누가 나오는지 들여다봐요. 조금 있다가 문이 딱 열리면 사람보다 하얀 김이 먼저 쏟아져 나오고 아버지가... 아버지는 혁띠를 안 하고 희여연 농끈으로 바지를 묶으셨는데 발을 보니까 슬리퍼를 거꾸로 신고 나오셨더라고요. 내 딸이 밖에서 추워한다고 서둘러 나와서... 아버지는 온 얼굴이 주름이었어요. 하얀 머리에... 4년 째 그 모습이 제일 그립네요.
진행자 : 아... 괜히 물어봤다...
세월과 함께 다 잊고 변해도 점점 더 선명해지는 기억도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새긴 기억들... 떠올리면 눈물이 흐른다 해도 절대 슬픈 기억은 아닌 기억들. 두 사람은 변했다 말했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고요. 앞으로도 그럴 것 같습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3월까지 이어진 긴긴 설날 이야기는 오늘 마무리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함께해주신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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