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호와 교시의 나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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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한 햇내기 입니다. 무산 출신으로 선전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인데요. 하나원 교육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근 일 년...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에는 남한 정착 7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여기 와서 처음에 건물마다 그런 구호가 없으니까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구호를 보면 좀 옭아매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오늘 얘기 시작합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오늘 방송은 문제를 내면서 시작해봅니다. 남한에는 텔레비전이나 잡지, 신문에 상품 광고가 많습니다. 광고를 보면 상품을 알리는 광고 문구가 있는데요. 이걸 카피라이트, 줄여서 카피라고 합니다. 지금 제가 알려드는 문구가 어떤 상품을 광고하는 카피인지 맞춰보세요.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문성휘 : 여행사?

진행자 : 신용카드 광고입니다.

문성휘 : 근데 왜 떠나랍니까?

진행자 : 여행을 가면 자동차, 교통, 숙박 할인해줄 수 있다는 거죠. 다음은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

박소연 : 전혀 모르겠네요.

진행자 : 이것도 신용카드입니다. 신용카드를 사용한다는 건 돈을 쓴다는 얘기죠. 돈을 쓰는 신용 카드지만 우리 카드를 잘 쓰면 부자 된다... 이런 광고입니다. 또 완벽함을 용서하라...

문성휘 : 이건 맞출 수 있을 것 같네요. 휴대전화? 이건 휴대 전화 아니면 통신사 선전이닷!

진행자 : 자동차 광고입니다. 자동차를 그만큼 완벽하게 만들었다는 말이죠?

문성휘 : 아, 참...

진행자 : 당신은 소중하니까요.. 이 상품은 여자랑 관계있습니다.

박소연 : 입도 못 대겠어요. (웃음)

진행자 : 화장품 광고입니다. (웃음)

문성휘 : 아, 정말 가지가지네... 근데 재밌네요. 이게 구호라고 해야 하나... 광고 구호 뭐가 다른가요?

진행자 : 광고는 물건 팔려는 목적에서 하는 것이고 구호는 사람을 선동하는 것이죠.

문성휘 : 한국은 구호가 없지 않나요?

진행자 : 잘 살아보세...이런 구호가 있습니다.

문성휘 : 그건 70년대 얘기고요.

진행자 : 옛날부터 지금까지 사용되는 구호, '꺼진 불도 다시보자' 이런 것 있습니다.

문성휘 : 아, 불조심 구호요? 한국은 구호도 광고 구호도 재밌네요.

진행자 : 사람들이 재밌지 않으면 보질 않죠.

문성휘 : 그리고 한국도 선거 때가 되면 구호가 쏟아지는데요. 북한과 비교해보면 남한은 나가자, 돌격하자, 공격하자... 이런 구호는 없습니다. 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이런 거죠. 북한엔 자꾸 어떤 걸 하라고 부추기는 내용이고 한국은 나, 우리 집단이 이렇게 하겠습니다... 자신들의 결의를 알려주는 구호가 많죠.

박소연 : 선거 구호는 다른 광고들하고 내용이 다르더라고요. 국민이 잘 사는 새 사회를 만들겠습니다,

그리고 대통령 후보 이름, 번호를 써놓았더라고요.

문성휘 : 국민의 미래가 걱정되십니까? 기호 1번 박근혜 입니다... 이런 식으로요. (웃음)

박소연 : 네, 맞습니다. 제가 그걸 보면서 북한하고 비슷한 구호 있네... 그랬어요. 문 기자님, 북한에 건물 기억나세요?

문성휘 : 기억나죠. 덕지덕지 구호들이 다 붙어있죠.

박소연 : 북한에서는 정문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바로 구호가 있는데요. 빨간 판에 흰 글자, 까만 글자로 '위대한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런 구호가 있습니다.

문성휘 : 아, 그건 흰 판에 빨간 글이죠. 대개 인조 대리석으로 홈을 파서 쓰는데요. 그걸 만드는데 전국적으로 엄청난 돈이 들 거예요. 공장 기업소마다 다 있습니다.

박소연 : 여기 와서 처음에 건물마다 그런 구호가 없으니까 속박에서 벗어났다? 그런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구호를 보면 사람을 좀 옭아매는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진행자 : 문 기자도 같은 느낌이었나요?

문성휘 : 그럼요. 엄청난 구속을 느낍니다. 처음엔 홀가분한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웃음) 근데 북한이 이젠 구글 위성 같이 위성으로 땅을 내려다보는 서비스가 너무 잘 돼있으니까 세계에 다 보라고 자꾸 땅바닥에 큰 글씨를 씁니다. 삼수 발전소에도 당을 따라 천만리... 이런 구호를 땅바닥에 흰 조약돌로 썼더라고요. 아이고... 그 구호 들이는 돈이면 지붕 혁명이나 하죠.

진행자 : 구호뿐인가요, 선전화도 그리고 벽화도 그려야죠.

문성휘 : 영생탑은 각 지방마다 인원이 천명이 된 기업소는 무조건 세워야 합니다.

진행자 : 그런 돈은 어디서 나옵니까?

박소연 : 당자금이요?

문성휘 : 아니, 소연 씨 무슨 지금 당자금 같은 소릴해요! 우리가 줄당콩(강낭콩)도 바치고 차돌을 부셔서 만들고 그래서 만드는 거죠. 그걸 시멘트로 미장해서 연마까지 하는 그 노력, 그 공정, 거기에 들어가는 자재... 말로 다 못 합니다. 인민들의 고혈이죠.

박소연 : 제가 제일 기억나는 건 7-8살 때 어느 공장 기업소를 갔을 때에요.

그 공장 기업소엔 새빨간 포스터에 붉은 기를 척 그려놓고 '3대 혁명 붉은 기 쟁취 전투장'이란 구호를 써놨더라고요. 제가 책에서 배운 전투장이라는 건 총 갖고 싸우는 곳인데 그럼 이 안에선 사람들이 총을 갖고 싸움을 하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진짜 문 기자님 말한 것처럼 구호만 봐도 얽매이는데요. 모내기 장에도 모내기 전투에로...이렇게 써있죠. 모를 꼽는 사람들에게 전투를 한대요. 이렇게 모두 다 전투장이라니까 보이지 않는 사슬에 묶여있는 그런 느낌이에요.

문성휘 : 그것뿐인가요. 퇴비 전투, 씨붙임도 전투...

박소연 : 거름 생산도 전투...

문성휘 : 남쪽 사람들은 이걸 보면 좀 지나치게 말하자면 다들 미치지 않았나 생각할 겁니다.

진행자 : 사실 좀 과하게 공격적인 느낌입니다. 모두 다 전투잖습니까? 북쪽의 구호 중 생활하면서 지금까지도 기억에 남는 구호 있으세요?

박소연 : 첫째는 '위대한 동지 김일성 동지는 우리와 함께 계신다' 이거죠. 북한에 어디나 있는 가장 많은 구호이고 '당이 결심하면 우리는 한다', '결사 옹위', '총폭탄'... 이건 정치 구호도 생각나고요.

문성휘 : 그 다음엔 싸움에 관련된 구호가 많습니다. 어디에나 미제 침략자들 소멸하라...이런 구호가 붙어있고요. 그리고 변소 같이 가장 지저분한 곳에 붙이는 구호가 있죠. 민족 반역자 남한 대통령 이름, 처단하라.. 시꺼먼 먹 글씨로 쓰는데요... 항상 변소에 붙어있어요.

진행자 : 왜 하필 변소인가요?

문성휘 : 깨끗한 장소는 붙일만한 구호는 다 붙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자리밖에 안 나는 거죠. 여기는 우리 시민들도 모여앉아서 우리 마음에 맞는 구호를 써낼 수 있고 맘대로 붙이잖아요? 북한은 노동당이 승인해야합니다. 노동당이 그 수많은 구호만 만들어내자고 해도 머리가 아플 겁니다. 또 남쪽은 구호가 부드럽습니다. 변소에 가도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써 있습니다.

진행자 : 아까 소연 씨도 변소에 붙어있는 이 구호를 보고 좋았다고 얘기했는데 문 기자가 똑같이 느끼셨군요.

박소연 : 제가 남한에 와서 통장이 있어야 하잖아요? 북한처럼 배에 돈 가방을 차고 다닐 수 없잖아요? 근데 남한에 오니까 손바닥 절반만한 카드를 갖고 싹싹 긁고 사인만 해주면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은행이든 택해서 통장이랑 카드를 만들어야하는데 한번은 학원을 다녀오는데 '신한은행이 당신의 탄탄대로가 되겠습니다...' 이런 구호가 쓰여진 큰 광고판이 제 앞에 보이는데 저는 이 광고를 보면서 유혹이라는 말을 여기서 좀 실감했어요. 북한에서는 유혹이라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닌데요. (웃음) 남쪽에선 꼭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지만 어쨌든 이 광고에 내가 유혹 됐어요. 광고에 가족이 서 있고 그 앞으로 아스팔트길을 쫙 그려놓고 '탄탄대로가 되겠습니다' 그러는데 아, 내가 이 은행에 카드를 만들면 내 길도 탄탄대로가 될 것 같은 겁니다. (웃음) 이렇게 유혹이 돼서 신한카드를 만들었어요. 광고와 구호는 이런 차이가 나요.

문성휘 : 구호는 고저 어떤 곳이든 전투장이라니까 혁명적으로 각성하자는 목적이고 광고를 보는 순간 상품을 팔려고 하는 거니까 완전히 다릅니다. 아마 우리가 어렸을 때는 북한에도 우리에게 와 닿고 순화된 그런 구호가 있었을 겁니다. 예를 들면 '한 대를 베면 열대를 심자...' 나무를 심자는 구호죠. 우리가 어렸을 때는 산에 가면 소년단 림, 사노청 림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정치구호만 남았습니다. 앞뒤가 산인 자강도엔 앞으로 보면 김일성 수령 동지 만세, 뒤로 돌아서면 김정일 동지 만세에요. 그거 구호 한번 만들 때도 엄청 힘들어요. 그걸 다 공장 기업소에서 제작해서 숱한 사람들이 어깨에 메고 산까지 나른다고 생각해보세요. 세울 때는 한국 같으면 대공 전화(무전기)나 휴대 전화를 쓰겠는데 우리는 방송 선전차가 동원됩니다. 위자, 위자 옆으로... 아, 맞다. 구호에는 개별적인 글자를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위자를 만든 기업소의 이름을 붙여서 철공기업소 왼쪽, 왼쪽 또는 오른쪽, 오른쪽으로 그럽니다. 그리고 이런 구호는 하루에 세우는 게 아니라 제작하는 과정부터 가져다 세우는 것만 4-5일 걸리는 거죠.

진행자 : 그런데 이게 자강도에만 있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문성휘 : 그렇죠. 그리고 옛날엔 위대한 김일성 동지만 있으면 됐는데 이제는 김정일 동지도 들어가야하니 구호가 배로 늘어났습니다. 동상도 두 개가 됐고요. 모자이크 벽화도 같아요...

그래서 외부에선 북쪽을 가리켜 흔히 교시와 구호의 나라라고 합니다. 청취자 여러분도 이 말에 어느 정도 동의하시죠?

북쪽에서 만든 구호로 남쪽에서 제일 유명한 말은 '험한 길도 웃으며 가자'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감정에 호소하는 그런 구호들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더 공격적이고 과격해지고 인민 생활과는 점점 멀어지고요...

남쪽에는 개인들이 만든 자기만의 구호도 있습니다. 보통 좌우명이라고 하는데요. 소연 씨도 하나 만들었답니다.

이 얘기, 다음 시간에 이어가죠.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