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한 햇내기 입니다. 무산 출신으로 선전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인데요. 하나원 교육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근 일 년...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에는 남한 정착 7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아르바이트 시작했어요. 커피숍에서 주말에 일하는데요. 절로 만들어서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그럼 너무 기분 좋아요. (웃음)
오늘 얘기 시작합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한 주 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박소연 : 네, 안녕하세요.
문성휘 : 잘 지냈습니다. (웃음)
진행자 : 소연 씨가 몇 주 전부터 일을 시작을 했답니다. 어떤 일이세요?
박소연 : 주말에 하는 시간제 일, 남한말로 말하면 알바, 아르바이트지요. 커피숍에서 주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문성휘 : 아, 그 진짜 그렇게 말하니까 커피숍을 북한에서는 뭐하고 해야 하나요? 커피를 파는 개인 매대?
진행자 : 찻집이죠. 다방… 그런데 커피라는 말은 청취자들이 알아들을까요?
박소연 : 저는 북한에서 커피라는 말은 알고 있어서 그런지 거의 다 알고 있을 것 같은데요.
문성휘 : 소연 씨는 커피를 북한에 있을 때 마셔봤어요?
박소연 : 네, 저 커피 북한에서 마셔봤어요.
문성휘 : 와… 대단하다
진행자 : 두 분이 북한을 나오신 시기가 차이가 있잖아요.
박소연 : 아, 저는 커피를 결혼 전에, 한 15년 전 즈음에 우연히 마셔봤어요. 아버지가 어느 날 가방에서 비닐 같은데다가 쌌는데 겉에다 영어글자들이 가득 써있는 걸 척 주시면서 외국에 갔다 온 사람이 선물 줬는데 마셔봐라 하는 거예요. 탁 마셨는데 탄 카마지(탄 누룽지) 물 같아서 한 모금 마시고 사람 먹을 게 아니다 싶어서 버렸던 기억이나요.
문성휘 : 그때 어쩌다 맛을 봤다는 거지요?
박소연 : 그렇죠. 커피라는 걸 접했단 거죠. 정상적으로는 먹은 건 아니고요…
문성휘 : 우리 아버지가 옛날에 귤을 하나 갖고 와서 내가 먹어봤던 기억이랑 같네요. (웃음) 저는 커피를 처음 먹어본 게 중국입니다. 처음에 내가 가있는 집에 주인이 커피를 좋아하더라고요. 한국커피를 마시는데 손가락 굵기 만한 길쭉한 봉지에 커피가 들어있는데 그 위에 권장소비자가격 100원 이렇게 썼더라고요. 북한 돈 1 원도 안 되는 건데 당시엔 몰랐고 엄청 비싼 것이구나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커피하면 북한에서부터 잘사는 지주 자본가들 이런 놈들만 먹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웃음)
진행자 : 어쨌든 까마치 맛 비슷하게 나는 커피, 지주 자본가만 마신다는 그 커피를 지금 두 분 다 좋아하시죠?
문성휘 : 아이고 너무 많이 먹어서 야단이죠. (웃음)
박수연 : 제가 처음에는 한국에 와서 어떤 분이 선 자리를 조직해 주셨어요. 어디어디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해서 처음으로 커피숍을 들어가 봤는데 클래식 음악, 북한으로 말하면 느린 고전곡이 유유히 나오는데 분위기가 너무 좋은 거예요. 곁에 사람들을 보니까 진지하게 얘기도 하고 또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그 분이 저보고 어떤 커피 드시겠냐고 물어보는데 제가 커피를 아나요? 그래 갑자기 텔레비전에서 김태희 씨가 나와서 프렌치카페 카페믹스~ 하던 게 생각나서 그거 달라고 했죠. (웃음) 그 담에 그분이 카든지 그걸로 커피 값을 내는데 둘이 마신 커피 값이 9,800원이더라고요.
진행자 : 십 달러가 다 되는 거죠?
박소연 : 내가 그 분한테 뭐가 9,800원씩 해요? 하니까 아니 이거 비싼 거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저는 쓰건 물 한 모금 주면서 말도 안 되게 비싸다 생각했어요. 근데 그 일이 불과 한 반년전인데 제가 지금 커피숍에서 일하게 됐어요. 제일 지금 좋은 게 제가 주문을 받아서 원두를 기계에 갈아서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이러면서 커피를 내줄 때 가장 좋아요. (웃음)
문성휘 : 남한은 나보다 썩 늦게 왔는데 커피는 선배가 됐네요. (웃음) 저는 지금도 그 수많은 커피들 가운데 유일하게 외우는 게 아메리카노 입니다. 라떼?
박소연 : 카푸치노, 카라멜 마끼아또...
문성휘 : 아마 여기서 애기 때부터 태어난 젊은 세대들도 다 외우지 못할 거예요.
진행자 : 제가 사실은 처음에 소현 씨가 시간제 일을 좀 이제 시작을 해야 된다고 이야기 했을 때 커피 집에서 일해보라고 권하긴 했어요. 거기서 일하면 젊은 친구들도 많이 만나보고 그러니까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는데 사실 커피 집에서 일하게 됐다고 했을 때 조금 놀랐고 또 다행이다 그랬는데요. 어떤 계기로 본인이 뽑힌 것 같아요.
박소연 : 제가 솔직히 주중에는 컴퓨터 학원에 다니고 주말밖에 시간이 없잖아요. 근데 북한사람들이 남한에 방금 오면 기초생활비 45만원 밖에 안 나와요. 그것도 유효기간이 있어요. 공부할 때 6개월만 나오고 그것도 잘립니다. 기초 생활비 45만원가지고 살아가기가 만만치 않아요. 다른 데 쓸 돈도 있고 저축도 해야 하니까 제가 아르바이트를 구하려고 정말 노력을 했습니다. 다 컴퓨터로 타자를 쳐서 이력서라는 걸 보내는데 제가 세 곳에 보냈다가 다 떨어졌어요. 제가 행여나 기대를 가지고 전화를 직접 했더니 저는 그런대로 남한 말을 한다고 했는데 중국에서 오셨어요? 동포세요?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아닙니다. 한국사람 입니다.... 그러니까 나이를 물어요. 제 나이 서른하고...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저희 카페에는 28세까지 뽑습니다... 그러는 데가 많았습니다. 저는 감수를 했는데 마지막 집에 전화를 했더니 대표님께서 상상 외로 기다려 보라는 거예요. 그래서 솔직하게 저 서른도 넘었는데... 제가 그렇게 말했어요. 그래도 괜찮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가 나쁜 데가 아닐까? 조건이 나쁘니까, 사람이 없으니까 날 쓰자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대표님을 만나 담화를 해보니까 예전에도 그래, 지금도 탈북자가 일하고 있다고, 자기네는 나이는 그만해도 괜찮다고 열심히만 일하면 된다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다리다 연락이 왔더라고요. 일하는 곳은 다 20대죠. 다 조카뻘이 되는 애들인데 일을 척척 다 잘해요. 처음에는 나이 어린 사람들에게 배우는 게 너무 어색했는데 배워야 하는 거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이제 한 달됐는데 저번에 우리 같이 일 하는 분들이 모여서 회식이라는 것을 했는데 아르바이트하는 사람까지 다 참가시키더라고요. 같이 일하는 분이 저보고 아직은 잘 몰라, 뭘 모를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열심히 하기 때문에 그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할 수 있다고 지금은 주문받고 간단 간단한 것은 제가 만들어도 줘요. 맛은 좀 원래 많이 하시던 분들하고 다를 수는 있지만 그분들 할 때는 막 옆에서 지켜봐요. 지금은 일이 힘들지 않아요. 하루 종일 서있는 건 육체적으로 힘들겠지만 호기심고 있고 재미를 느껴요.
진행자 : 문 기자도 오셔서 아르바이트 하셨어요?
문성휘 : 저는 아르바이트는 못해봤습니다. 계속 직업을 쥐었는데요. 저도 처음에 와선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가장 오래한 게 인쇄소에서 광고 인쇄를 했어요. 수익도 꽤 있었고 저도 많이 아껴주시고 저 같은 경우엔 남한사람들만 있는 회사에서도 있어보고 북한 사람들이 같이 일하는 회사에서도 있어보고 북한 사람들로만 이뤄진 단체에도 조금 일을 해보고 진짜 많이 다녔어요. 근데 특이한 게 없어요.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고 더 잘 통하고 이런 게 없더라고요. 오히려 한국 사람들하고 북한사람들하고 섞여서 일하는데서 보면 남한사람도 특이하게 가까워지는 사람이 있고 그런가 하면 같은 북한에서 온 사람이라고 해도 잘 상대 안하게 되는 사람이 있고요... 남한 사람들도 그저 처음 이 직장에 들어와서 사람을 사귀는 과정이나 그저 북한에서 직장에 들어가서 사람을 사귀는 과정이나 똑같더라고요.
진행자 : 사실은 맨 처음에 북쪽에서 오신 분들이 남한에서 직장 잡을 때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 어떤 일을 하느냐 하는 문제도 그렇지만 사람 걱정도 많이 하시던데요. 겁을 많이 내시더라고요.
문성휘 : 네, 저도 들어보니까 처음에 남한 사람들을 잘 못 만나면 대게 다음에 직업을 얻을 때 공포심을 갖더라고요.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그래서 내같은 경우는요, 사실 이게 딱 맞는 방법은 아니지만요. 처음에 직장 잡을 때 여러 곳에서 많이 일해 보라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여러 곳에서 일을 하다나면 아, 이 남한사회도 결국 북한이랑 똑같구나... 직장에 들어가서 사람을 사귀는 과정은 어느 사회나 같구나... 이런 걸 깨달으면서 남한 사회에 적응을 하는 거죠.
진행자 : 소연 씨도 문 기자 말에 동의하세요? 여러 곳에 가서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경험도 해봐라...
박소연 : 네, 문 기자님 말씀이 맞아요. 다양하게 많은 사람을 사람이 보는 게 맞죠. 손가락도 길고 짧고 있는데 사람들이 보는 시선이 같을 수가 없잖아요? 근데 남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이 다를 때가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부모형제 다 두고 온 사람들이다, 독하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그때는 정말 여기에 괜히 온 것 같은 느낌입니다. 근데 또 어디 가서 어쩔 수 없이 신분을 얘기하면 첫마디가 그래요. 대단하다... 어떻게 그걸 뚫고 힘든 길을 왔는가... 이렇게 말할 때는 살만한 세상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문 기자님은 직업을 금방 잡으셨다고 하시는데 저도 아르바이트를 하잖아요. 이것 저것 많이 했어요. 병원 가서 간병도 하고 식당에서도 일했는데 너무 힘들었어요. 그때는 12시간 일하고 막 이러니까 너무 힘들었는데 지금에 하는 일은 8시간 일해요. 육체적으로 안 힘든 일이 있을 수 없죠. 돈 버는 일이 앉아를 못 있잖아요. 그래도 사람들이 내가 어디서 왔다고 이상한 눈으로 보지 않고 그러니까 내가 일이 즐겁고 좋습니다.
문성휘 : 그러니까 다양성이 존재하는 사회니까 북한처럼 일렬 줄을 서는 사회가 아니잖아요? 모르긴 몰라도 남한사람들 중에 탈북자라는 말도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웃음) 그리고 통일 이런데 대해 전혀 생각을 안 하는 사람도 많지만 통일을 위해 사는 사람도 있고요. 그러는가 하면 진짜 황당하게 북한에선 여권을 어떻게 떼요. 이렇게 물어보는 사람도 있고요.... 생각 보면 남한 사회 정말 재밌죠? (웃음)
세상엔 별 사람 다 있다고 머리로는 잘 알아도 못된 사람 만나면 어쩔 수 없게 또 상처를 받습니다. 그래서 남한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탈북자들에게 남한 사회는 살 만한 곳이 되기도 하고 사람 못 살 곳이 되기도 합니다.
소연 씨는 자신이 요즘 한창 방황 중이라고 말합니다. 일단 정해진 직장이 없으니 사람들의 조언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을 잡기 힘들다는데 이런 소연 씨에게 문 기자의 조언은 꿈을 버리라는 겁니다. 북쪽에서 어떤 꿈을 갖고 남한에 왔다면 그 꿈을 버려라...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소연 씨에겐 이보다 잔인한 말이 또 없을 것 같은데요. 이 얘기 다음 시간에 이어갑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 시간 여기까집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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