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 4년 차를 맞고 있습니다. 2012년 아들을 데려와 혼자서 키우는 열혈 '워킹맘' 그러니까 일하는 엄마입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엔 남한 정착 9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90년에 헤어졌던 친구를 2015년에 만났네요. 저희가 그때는 10대였는데 지금은 세 아이의 엄마가 돼서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소연 씨가 얼마 전, 25년 전에 헤어졌던 친구를 만났습니다. 고향에서도 소식을 알지 못했던 친구를 남쪽에서 만나다니 보통 인연은 아니죠. 그런데 이 두 사람...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한 달음에 달려가 얼싸안고 눈물의 상봉을 했을까요? 25년의 세월이 그렇게 간단치 않았습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소연 씨가 오늘은 얘기 보따리가 많습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습니다.
문성휘 : 정말 맥 빠지게 덥네요. 이제 그늘에 드러누워 낮잠 잤으면 딱 좋을 그런 때입니다. (웃음)
진행자 : 소연 씨는 반가운 얼굴을 만나셨다고요?
박소연 : 25년 전 짝꿍을 만났어요. 90년도 헤어졌던 친구를 2015년에 만난 겁니다.
진행자 : 그것도 한국에서...
박소연 : 그렇죠. 그때는 저희가 10대였는데 이제는 세 아이의 엄마가 돼서 제 앞에 나타났더라고요. 문 기자님은 아시죠? 한 동에 앞뒤로 집이 붙은 집이 있지 않습니까? 저희 무산에서 그런 집에 살았는데요. 우리가 앞집이고 걔네가 뒷집에 살았습니다. 같은 집에서 태어났고 같이 유치원, 초등학교, 고등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진행자 : 진짜 형제 같은 친구네요.
박소연 : 엄청 친한 친구였는데 고난의 행군이 시작하면서 그 집이 망했습니다. 그래서 무산 역전에서 꽃제비를 치다가 길주역전으로 가고 그리고 그 집이 없어졌어요. 그러다나니까 저는 그 애 소식을 몰랐고 그러고 헤어졌는데 여기 와서 만난 거죠.
문성휘 : 애를 셋이나 났어요? 어떻게 다 데리고 왔데요.
박소연 : 네, 둘은 중국에서 났고 하나는 한국에서 낳았더라고요.
진행자 : 남한에도 탈북자가 2만 명이 훨씬 넘으니까요. 만나기 쉽지 않은 일인데 어떻게 만나셨어요?
박소연 : 저희 고향에서 같이 온 분이 결혼해서 축하해주러 갔다가 사진첩을 봤습니다. 그 눈빛은 안 변했더라고요. 부인 친구 중에 한 사람이 아무리 봐도 짝꿍 같은데... 이름이 뭐냐고 물었는데 이름을 개명을 했더라고요. 그래서 전화 통화 좀 해봐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런데 딱 여보세요... 하는 말투에서 벌써 알리더라고요. 제가 누구라고 이름을 댔는데 처음엔 잘 몰라봐요. 영상 통화해서 얼굴을 딱 보더니 알아 봤습니다. 짝꿍이 맞더라고요. 그냥 반갑다, 꿈 같다... 이런 말로 표현 다 못해요.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얼떨떨했죠. 문 기자님도 북한 친구를 한국에 와서 만난 경험 있으세요?
문성휘 : 있어요! 친구는 아니지만 기막힌 경험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탈북자가 이제 거의 3만 명이지만 한국 인구가 이제 5천만을 넘어서요. 이러니까 모래알 속에 구슬 찾기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서로 연줄이 좀 있습니다. 우리 자강도에서 온 친구들은 자강도끼리... 그러다가나니까 어느 날인가 친구에게 너 고향이 어디라면서, 거기서 왔다는 사람이 있는데 한번 만나볼래? 그래서 만났는데 너무 놀랐어요. 아이를 한 명 데려왔고 벌써 남한에 온지 5년이나 됐다고 하는데 제 중학교 동창생의 아내였습니다.
진행자 : 문 기자 동창도 같이 나오셨나요?
문성휘 : 아니요. 제 친구는 사망했다고 하고요. 아... 근데 너무 심한 사고를 당해서 가족들이 통째로 다 죽었더라고요. 두루두루 이런 애들, 이런 애들 물어봤는데 누구도 잘 된 사람이 없었습니다. 참 비참했고요...
진행자 : 누구도 잘 된 사람이 없다는 건 다치거나 사망한 친구들이 많았다는 말씀인가요?
문성휘 : 아니, 솔직히 북한에서 권력층이나 돈이라도 많은 사람이 돼야 살기가 좋겠는데 우리같은 시골 출신들은 헤어나기가 힘든 거죠. 더욱이 자강도는 산이 꽉 막혀서 군수공장 아니면 임산 이런 곳입니다. 북한도 모든 권력, 직업이 대물림이 되지 않습니까? 군에서 살던 애들은 다 군에서 살고 도회지에서 살던 아이들은 다 도회지에서 살고요. 그러니까 시골에서 살던 우리 같은 사람들은 아직도 시골에서만 가난하게 삽니다. 그게 너무 가슴 아팠고요...
진행자 : 소식을 안 들은 것만 못 했겠습니다.
문성휘 : 그렇죠. 근데 그 중에 사망한 친구도 몇 명이나 됐고요. 그 소리가 제일 슬펐습니다.
진행자 : 북쪽에 사고가 너무 많으니까요.
문성휘 : 친구의 아내를 만나고 그 뒤로 며칠 동안은 혼자 있기가 두려웠습니다. 옆에 누군가가 있어줘야지 혼자 있으면 그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겁니다. 뭔가 나 혼자만 잘 된 것 같고 내가 그런 애들을 다 짓밟고 일어선 것 같은... 이런 감정을 뭐라고 할까요?
진행자 : 죄책감이 아닐까요? 내가 여기 나와서 사는 동안 친구들은 죽어갔다... 이런 죄책감이요.
문성휘 : 소연 씨도 잘 알겠지만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 대개 잘 먹지 못해서 오랜 영양실조 상태가 계속 되다 어느 날인가 죽는 거죠. 봄철에 식량이 없을 때, 그 보릿고개 때 제일 많이 죽고요. 그런데 그 순간만 모면하면 몇 년을 살 수도 있고 평생을 살 수도 있습니다. 친구들이 누구는 어떻게 죽고, 누구는 어떻게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 순간에 내가 좀 미리 알았으면 정말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 빚을 지는 한이 있어도 뭐... 중국 돈 1천원만 보내주면 걔네집 식구들 다 살았을 겁니다. 그 순간이 아니라 지금까지 계속 살았을 수도 있을 거예요. 그러니까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더라고요. 내가 왜 그렇게 고향 소식, 친구들 소식에 등한했을까. 그런 생각에 너무 가슴 아프고 그랬는데... 소연 씨는 조금 저의 만남과는 좀 다르지 않나요?
박소연 : 한국에 와서 처음 털어놓는 얘기인데요. 제가 하나원 교육 중에 대열을 쳐가는 교육생들 속에서 초등학교 친구를 봤습니다. 근데 걔를 보는 순간 피했어요. 정말 20년 만에 보는 건데 학교 때 그 친구가 입이 다사했거든요. (수다스러웠거든요.) 내가 이 얘를 아는 척 하게 되면 북한에 연락을 해서 내 행방을 노출시킬까봐 걱정이 됐습니다. 만약에 내가 탈북자가 아니라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지나치면서 그냥 오랜만이야 인사 정도는 해도 되죠. 그런데 그런 문제가 걸리니까 피하게 되더라고요.
진행자 : 북쪽에서 한 동네 살던 사람을 만나도 선뜻 반가워 못하는 게 그런 이유 같더라고요.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의 안전 같은 문제가 걸리는 거죠. 이번에 만난 소연 씨 친구와는 어떠셨나요? 바로 만나실 수 있었습니까?
박소연 : 둘이 전화상으로는 엄청 반가웠습니다. 통화 하면서 친구는 그냥 빨리 오랬습니다. 젖먹이가 있으니 자기가 움직이지 못 한다고 네가 오라고. 제가 가는 게 도리상 맞는데 제가 좀 변했더라고요. 제가 허리가 한참 아플 때기도 했지만 바로 가지 않고 다음 주말에 갈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주중에 카톡도 하고 전화통화도 했는데 갑자기 주말까지 못 기다리겠는 거예요. 수요일쯤 전화를 했어요. 퇴근 후에 갈께 했더니 구실을 대요. 그 다음날이 됐는데 또 구실을 대요. 저도 바보가 아니잖아요?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요. 그 다음부터 전화도 잘 안 받고 북한식으로 표현하면 자기 꺼 주고 제 뺨 맞는 느낌? 아니, 내가 돈 꿔달라고 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보고 싶다고 오라, 오라 해서 가는 건데 왜 이렇게 구실을 댈까... 3-4일이 지속되니까 제가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카톡을 딱 보냈습니다.
진행자 : 카톡이 일종의 대화 프로그램입니다. 북쪽식으로 표현해보면 휴대 전화로 통보문을 보내신 거죠.
박소연 : 맞죠. 나는 네가 반갑고 그래서 만나려고 한 건데, 내가 너한테 무슨 빚을 졌느냐, 왜 피하냐... 그러니까 걔가 너는 왜 지금도 네 마음대로냐,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제가 어릴 때 그랬답니다. 제 마음대로 다 하고 남의 말을 안 듣고. 그래서 저도 됐어, 나도 너 안 보고도 살 수 있어 그랬습니다. 저도 성격이 있으니까요. 이렇게 만나지도 못하고 카톡으로 먼저 다퉜다니까요! 근데 저는 정말 문자를 보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습니다. 와... 얘 자랐구나. 제가 알던 어리무던한 친구가 아니었습니다. 강해졌더라고요. 처음에 그랬어요. 그래, 안 만나면 돼. 너 안 보고도 40년 살았어! 근데 이게... 사람 마음이라는 게 안 그랬습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게 옳을까, 어릴 때 정말 친한 친구였는데... 그래서 내가 전화를 했더니 안 받고 나중에 걔한테 전화가 다시 왔더라고요. 근데 첫 마디부터 울더라고요. 나라고 왜 네가 보고 싶지 않겠냐, 나는 북한에서 너무 힘들게 살았고 우리 집이 망하고... 그걸 다 잊으려고 하는데 너를 보는 순간에 그게 다 생각이 났다... 그니까... 아픈 기억, 무산 역전에서 5년 동안 꽃제비를 치고 엄마가 꽃제비 치다가 죽었는데 그걸 보지도 못하고. 이런 잊고 싶었던 기억이 다 살아났고 그래서 나를 만나기를 꺼려했다고요.
진행자 : 잊고 싶었던 그 마음이 이해가 가네요. 정말 너무 힘들게 사셨네요.
박소연 : 네, 그래서 그랬어요. 네가 나를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 전화를 해줘. 니가 그래서 나를 보고 싶지 않으면 안 봐도 된다. 하여튼 내 친구가 남한에 와서 잘 살고 있다는 걸로 나는 됐고, 니가 그 상처를 넘어서 친구를 볼 수 있겠다 할 때 전화해 달라고 했어요. 기다린다고. 그러고 한 보름 만에 만났어요.
진행자 : 아... 만나긴 만나셨군요. (웃음)
박소연 : 그럼요. 오늘도 하루 종일 서로 메시지를 보내고 그러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웃음)
진행자 : 진짜 만나니까 어떠셨어요. 눈물 좀 나셨겠습니다...
박소연 : 친구가 수원 역 앞에 살아요. 수원역까지만 오라고 하더라고요. 애기가 있는데 나오지 말라 했더니 그래도 나온데요. 역 앞에서 기다리는데 가고 오는 사람들이 다 걔 같아보였어요. 조금 있다가 저쪽에서 제 이름을, 소연아 부르면서 애기를 안고 오는데 딱 알았어요. 키도 조그맣고... 많이 늙었더라고요... 우리 둘이 그냥 안았어요. 그냥 꼭 안았어요... 보름 동안에 둘이 그랬던 것도 다 없어지고 얼마나 말랐는지 아기까지 제 품에 훌 안을 수 있었어요. 그러고 집에 갔는데... 정말 예쁘게 해놓고 잘 살더라고요. 너무 행복하게. (웃음) 그래서 이제 제가 주말마다 갑니다. 서로 막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못 만나지, 매일 카톡으로 서로 힘도 주고요. 걔가 매일 하는 얘기가 우리 소연이 사람이 됐다고요. 등산 갔을 때 알아맞히기 표 쪽지를 찾으면 제가 달라고 해서 상품을 타고 그랬답니다. (웃음)
진행자 : 소연 씨 못 됐네요. (웃음)
박소연 : 못 됐어요. (웃음) 그 얘 어린 시절부터 중국에 갔다가 북송이 돼서 북한 수용소에 갔다 오고... 그 얘기를 들으면서 문 기자님과 같은 심정이었습니다. 그때 나한테 좀 알리지. 어떻게 도와줄 수도 있었을텐데... 지금 막 죄책감이 들어서 뭐라도 주고 싶고 해주고 싶고 그래요. 그러지 말라고 하는데 그때 못해준 게 미안해서 더 해주고 싶어요...
그 미안함은 소연 씨나 문 기자처럼 북쪽에 가족과 친구를 둔 탈북자들만 느끼는 게 아닙니다. 남한 사람들도 그렇습니다...
두 사람은 얼마 전에 아이들을 데리고 유희장에 다녀왔는데요. 자신들의 아이들도 짝꿍으로 만들어 주고 싶다는 야심찬 계획도 세웠답니다. 부디 과거의 어두운 기억이 현재의 행복과 미래에 대한 기대로 흐릿해지길, 더 이상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래봅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25년만의 해후, 그 뒷 얘기 다음 시간에도 이어갑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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