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이 6년 차입니다. 도착한 다음해 아들도 데려와 지금은 엄마로 또 직장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은 소연 씨가 북한을 떠나 남한이라는 세상에서 보고 겪은 경험담을 전해드립니다.
남한의 신기한 세상만사를 얘기하다고 보면 떠오르는 고향의 추억들도 함께 나눠 봅니다. INS - 저는 사고라는 건, 남한에 살면서는 저와 먼 일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소연 씨가 얼마 전에 승강기에 갇히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단 8분, 그러나 본인에게는 8시간, 80시간 같은 시간이었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 우리들이 겪어온 사건, 사고에 대한 얘깁니다.
진행자 : 기차에 밑으로 떨어졌는데 그렇게 사망자가 많이 나왔나요?
박소연 : 밑이 맨 돌밭이었고요, 날이 가물어서 물이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한 칸이 다리 아래로 떨어지면서 뒤에 따라오던 빵통들이 차례로 다 같이 밑으로 추락한 사고였습니다. 그리고 북한은 그때 그걸 어떻게 위장했냐면 그 차에 탔던 보안원이 안기부 간첩이다. 이 사람이 도망쳤다... 이런 소문을 냈었어요. 안기부 간첩인 보안원이 레이루(레일)의 못을 200개 뽑아서 전복을 시켰다고.
문성휘 : 그래요. 보통 북한의 80년대는 굉장히 화려했던 것처럼, 13차 청년 학생 축전도 했고. 그 시기, 가장 화려했다고 북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기가 가장 숨겨진 것이 많고 가장 사고도 많고 인명 피해가 많았던 시기입니다. 왜냐하면요, 사회주의 만년대개 기념비를 세운다고 하면서 진짜 대형 공사를 많이 했습니다. 안변 청년 발전소 - 금강산 발전소를 초기에 하다가 한국에서 방어 댐을 만들면서 공사를 중단됐고요. 그 후에 전기 사정이 마구 제기되니 그걸 다시 건설했습니다. 엄청나게 사람들 많이 죽었어요. 거기서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 건... 일단 시멘트를 매고 나르거나 위에 시멘트를 쏟는데 고(高) 마르카 시멘트, 떨어지면 바로 마르는 그런 시멘트에 사람의 다리에 묻히면 다리를 자르고 허리가 잠기면 묻어 버리고...
진행자 : 하지만 그런 얘기는 소문이지 않았을까요?
문성휘 : 아니요.
박소연 : 그렇지 않아요. 다들 와서 전해주는 얘기죠.
문성휘 : 건설에 참여했던 애들이 와서 누구는 어떻게 죽었다. 누구는 어떻게 죽었다, 그런소식을 전했어요. 정말 끔찍하고 상상할 수 없는 얘기였고... 바로 그 시기가 우리 동기들이 군대에 나갔던 때고 또 안변 청년 발전소 공사는 고난의 행군이 거의 시작하는 시기였기 때문에 정말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또 80년대에는요... 패싸움이라는 게 말도 못 했습니다. 북한이 단합되기는요! 패싸움으로 단합됐었죠.
진행자 : 누구와 패싸움을 하는데요?
문성휘 : 여기서도 지역별로 학교를 가지 않습니까? 그럼 잘 사는 친구도 있고 못 사는 친구도 있고. 그러다나면 패가 갈리고 그 패에서 가장 힘이 센 아이가 조장이 되고요.
진행자 : 꼭 80년대만 그런 건 아니었는데 왜 패싸움이 그렇게 많았을까요?
박소연 : 그러게요. 그건 이상하죠?
문성휘 : 제가 보기엔 우리는 세대 간에 뭔가 텔레파시 같은 것이 있지 않나 생각도 해봤어요. 한국은 그때 민주화 투쟁을 한다며 그렇게 싸웠는데 당시 북한의 같은 세대들은 삽과 곡괭이, 지렛대를 들고 패싸움을 했어요.
진행자 : 문 기자는 80년대는 북한의 화려한 시절이 아니라 가장 뭔가 숨겨진 것이 많았고 사고도 많았던 시기라고 했는데요. 패싸움도 그런 영향을 받았을까요?
문성휘 : 맞아요. 그게 80년대입니다.
박소연 : 정말 재밌는 부분이 또 있는데요. 저희 동네에도 당시에 문 기자님 또래의 남자아이들이 정말... 무슨 귀뚜라미 패, 박쥐 패 이래 가지고 다녔어요. 이름도 참 왜 그렇게 지었는지...(웃음) 그런데 이 사람들도 89년도에 임수경이 왔을 때는 패싸움을 안 했어요. 딱 멈췄어요. 왜냐면 그 때는 그런 열의가 있었거든요.
문성휘 : 그래요. 그때는 분위기가 그랬고요. 그리고는 한국 올림픽 이후 북한 당국이 패싸움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작점이 함흥이었어요. 함흥 얄개들이 동네끼리 싸움이 붙었는데 화염병이 등장했습니다. 당시 텔레비전에서 남한 대학생들이 시위 현장에서 화염병을 들고 시위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게 발단이 된 거죠. 함흥 길거리에서 화염병을 들고 싸웠다고 해요.
박소연 : 맞아요!
문성휘 : 그 때 저희들도 한국에서 그러는 걸 보고 병에 휘발유를 얼마나 채우나 유심히 봤거든요.
진행자 : 그런 걸 보라고 방영한 건 아닐텐데...(웃음)
문성휘 : 우리도 밤중에 4명이 같이 갔습니다. 헤엄을 치던 바위 꼭대기 올라가서 아래 바위로 휘발유 병에 불을 달아서 딱 던졌는데...
박소연 : 와... 정말 다들 같았구나.
문성휘 : 그게 물 위에까지 팍 튀어서 멋있더라고요.
진행자 : 그게 멋있었어요??
문성휘 : 그래서 우리가 막 좋아서 그랬죠. 야, 다음엔 진짜 우리가 최고다. 그때 우리보다 먼저 함흥 얄개들이 쓴 겁니다. 그때 그래서 북한이 완전히 작살을 낸 거죠. 탱크를 들이밀고.
진행자 : 북한 당국에서 솔직히 좀 놀랬을 수도 있겠네요.
문성휘 : 그렇죠. 그게 만약 정부로 향한다면 큰일이죠. 덕천 자동차 공장에서 300명 간첩 사건도 실제 간첩 사건인 게 아니라 패싸움이 원인이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진행자 : 죄송하지만 정말 다른 의미에서 한민족은 맞는 것 같습니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였지만 당시 참 비슷한 모습으로 열정적이었네요.
문성휘 : 그렇죠. 여기는 민주화 투쟁이고 거기는 패싸움이었지만.
진행자 : 그렇게 열심히 봤던 그 시위 장면, 그 때가 6.10 민주화 항쟁 그 시기 즈음이었을 겁니다. 30년 전 일이죠. 올해서 6.10 민주화 항생 30주년입니다.
문성휘 : 벌써 그런가요?
진행자 : 네, 그렇게 됐네요, 벌써. 당시 학생들이 거리에 외쳤던 것이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겠다는 거였고. 결국 많은 희생 속에 그렇게 됐고 세월이 이렇게 흘렀네요.
문성휘 : 북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이상한 쪽으로 번졌죠... 그런데 왜 그 시대에 우리는 그랬을까? 결국 보면 패싸움도 안전원이고 보안원이고... 총을 좀 어떻게 빼앗을 수 없을까 그런 논의가 나오고.
진행자 : 하지만 정치적으로 번지진 않았잖습니까?
문성휘 : 벌써 손에 총을 쥔다는 생각은 정치적인 것이죠.
진행자 : 글쎄요... 80년대는 남북 모두 특별했던 것 같고요.
문성휘 : 근데 그 때 같이 화염병을 던지며 좋아했던 그 4명의 친구 가운데 한 명. 그 친구는 생각해보니 군대 나갔다가 사고로 사망했네요...
어쩌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이를 낳으면, 사고를 당하지 않고 무사히 자기 명을 다해 살 수 있도록 기도하게 됐을까요. 세계 어디나 이런 부모의 마음은 똑같을텐데 그런 부모들은 오늘도 미사일을 만들고 자기가 살기 위해 남을 눌러야 한다고 생각하고 눈앞의 작은 이익을 위해 위험을 눈 감아 버리는, 결국 오늘의 사고는 어제의 우리가 내일 사고는 오늘의 우리가 방조하고 있지는 않은지 사고 얘기를 하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 얘기는 여기까집니다.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박소연, 문성휘, 이현주였습니다. 함께해주신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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