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어도 그리운 고향의 냄새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 3년 차를 맞고 있습니다. 2012년 아들을 데려와 혼자서 키우는 열혈 '워킹맘' 그러니까 일하는 엄마입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엔 남한 정착 8년차, 자강도 출신 문성휘 기자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북한은 옥수수 삶는 냄새랑 남한이랑 달라요. 저게 빨리 됐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그런데 남한은 늘 일상이 돼 버렸으니까..."

남북한의 가을 냄새가 다르다... 남한에서 올해로 세 번째 가을을 맞는 소연 씨는 문득 북한의 가을 향취가 떠올랐다고 합니다. 옥수수를 찌는 냄새, 절구를 찧는 소리, 들녘의 모습. 땔감을 준비하고, 식량을 비축하고, 어느 때보다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북한의 가을이 겨울을 나는 혹독한 준비를 하는 시기라면 남한에서 맞는 가을은 별다른 준비가 필요 없어서 오히려 그 향취가 없다는데요. 그래서 고생했던 시절의 소리와 냄새가 그립기까지 하다고 합니다. 가을이면 추석이 있으니 그 그리움은 더욱 짙겠죠?

소연 씨가 체감한 남북한 가을의 다른 냄새는 어떤 것일까요? 소연 씨 얘기를 직접 들어보시죠.

진행자 : 지난 8일이 추석이었는데, 남한의 명절은 '민족 대이동'이라고 해서 도시에 나가 있는 젊은이들이 고향을 찾아가느라 교통정체가 굉장히 심하죠. 어떻게 보면 이런 현상이 명절의 핵심이 돼버린 상황인데, 두 분의 경우 남한에서 생활하는 건 많이 편해졌지만 명절에는 고향이나 가족 생각을 많이 하실 것 같아요.

박소연 : 첫 해 추석은 하나원에서 나온 지 몇 달 안 돼서 아는 분도 없고, 그때는 애도 데려오지 못해서. 사람이 죽을 만큼 보고 싶다는 게 무슨 말인지 그때 알았어요. 미치겠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신부님한테 전화를 했어요. "신부님, 저 추석인데 혼자예요." 하나원에 다니는 신부님이니까 하나원 학생들과 많이 어울리시거든요. 신부님이 차로 쉼터에 있는 애들이랑 임진각에 가자고 하셨어요. 임진각에 처음 가봤는데, 머리 하얀 어르신들이 끊어진 철교를 보며 막 우시는 거예요. 그때 북한을 봤는데 저도 많이 울었어요. 그 뒤로 추석이면 갈 곳이 임진각밖에 없더라고요. 북한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작년에도 많이 울었는데, 한 해 두 해 가면서 그 슬픔이 많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어요.

문성휘 : 그러니까 풋내기들은 딱 안다는 거예요. 이제 우리는 애초에 깊이 생각을 안 해요. 추석에는 하나원 동기들이나 친구들과 같이 여행을 떠나세요. 왜냐하면 추석에 가만히 있으면 고향생각 더 나고 미쳐요. 혼자 있으면 우울증에 걸려요. 그래서 친구들하고 어디 놀러가는 게 좋아요. 그런데 한국은 명절의 표준이 자동차가 얼마나 밀리냐는 거잖아요. 추석에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시간이 14시간이라고 하더라고요. KTX, 열차를 타면 2시간 30분이면 가는데, 14시간 동안 이건 자동차 안에서 고문이죠. 그러니까 추석이나 명절에 떠나고 싶으면 고속버스나 열차, 비행기를 타고 떠나야 해요. 자동차 가지고 어디 갈 생각하면 안 돼요.

진행자 : 또 한편으로 남한에서 추석, 명절이 되면 많은 여성들이 음식 장만하는 것 때문에 명절 증후군이라고 해서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는데요. 그래서 젊은 세대에서는 명절이 연휴가 기니까 해외로 여행을 갑니다. 이게 새로운 풍토인데요.

문성휘 : 맞아요, 그런데 남한에서는 간단히 시장에 가서 다 사면 되는 거니까. 요새 가정주부들 치고 큰 가족의 맏며느리가 아닌 이상 음식을 하는 사람들이 적잖아요. 단순히 제사상을 차린다, 조상을 찾아간다 해도 어차피 시장이나 큰 백화점에 가서 다 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북한처럼 뭔가 실감나는 건 없어요.

진행자 : 그래도 많은 며느리들과 엄마들이 명절이 되면 음식 장만하느라 노력들을 하는데요.

문성휘 : 추석이나 이럴 때 조금 음식을 해먹는 건 맞아요. 그런데 북한과 비교하면 전혀 실감이 안 난다는 거예요. 북한은 벌써 설이다 추석이다 하면 한 달 전부터 준비해야 해요. 내가 집 안에 장남이다 하면 추석에 혼자 감당을 못해서 다 나눠줘요. '내가 고기를 할 테니, 네가 떡을 맡고, 여동생은 생선을 맡고.' 그래야 제사상이 차려지는 거예요. 사람이 근심을 하면 현 상황이 실감이 나고 아프게 느껴지고. 그런데 지금은 북한에서 겪던 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래서 실감이 안 나요. '숨 막히는 가을이구나.' 북한은 그래요. 그렇게 바삐 돌아야 하고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남한에서는 손 두 개도 다 쓸 일이 없으니까.

박소연 : 맞아요, 북한에서도 가을은 추석이에요. 일 년 농사를 잘 지어서 나온 낱알들을 조상한테 바친다, 북한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그럼 추석 전에는 한 달 전부터 돈을 꼬깃꼬깃 모으고, 집집마다 절구 찧는 소리가 나요. 북한은 추석에 무조건 떡을 해요. 집집마다 문을 다 열어놓는데 동네마다 절구 찧는 소리가 다 나는 거예요. 그런데 남한에서는 떡을 다 팔잖아요. 다 전기로 하고. 그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거 전기 들어오면 5분이면 갈 것을 두 시간을 한다고.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워요. 절구를 찧으면서 노동신문에 체를 치고, 가족들이 팔 힘이 없으면 둘째 하다 셋째랑 교체하고.

문성휘 : 제가 윤 기자한테 물어볼 게 있어요. 떡을 해 봤어요?

진행자 : 해본 적 없습니다(웃음)

문성휘 : 떡을 하는 방법은 알아요?

진행자 : 모릅니다. 어떻게 보면 사회의 기반이 달라서인 것 같아요. 북한은 농경사회가 기본인 거고 남한은 산업화가 돼서 모든 게 공장들이 간편하게 처리되는 게 있어서... 저희 부모님 세대만 해도 떡을 하거나 김장하는 걸 다 아시고 집에서 하기도 하죠. 그런데 세대가 바뀌면서 사실상은 집에서 김치를 담그고 떡을 할 시간이 없고, 안 하다 보니까 저처럼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희 세대만 해도 실제로 김장을 하거나 떡을 하는 친구들은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소연 씨는 남한에서 맞는 가을의 향기, 냄새가 다르다고 하셨는데 어떤 면에서 남한의 가을이 다르게 느껴지나요?

박소연 : 남한은 북한처럼 가을에 대한 향수가 없어요, 전체적으로. 제가 임진각에 가서 8월 초에 옥수수를 사 먹었어요. 그런데 그 맛이 그 맛인 거예요. 봄날에 사먹은 맛이랑 같았어요. 그런데 북한은 옥수수 삶은 냄새가 남한이랑 달라요. 저희는 마당에서 삶는데, 농사를 짓지 않아도 가을 한 철만은 조금 저렴한 옥수수를 사다 집 마당 앞에 땅 가마라는 게 있어요. 그 가마에서 옥수수를 삶으면 냄새가 십리 밖까지 가는 것 같아요. 그런 냄새가 사람을 자극하는 거예요. '아, 저게 빨리 됐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그때는 먹는 사람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라요. 그런데 남한은 일상이 돼 버려서 같은 걸 먹으면서도 그 맛이 차이가 나는 거예요.

문성휘 : 저는 남한에 온 해에 광주에 내려갔어요. 거기 가서 가을걷이 구경을 했는데, 뭐라고 할까, 너무 발전하는 게 좋은 게 아니다... 여기서는 탈곡기가 벼를 베면서 바로 쌀을 만들어요. 한참 보고 나니까 재미없더라고요. 여기저기에서 키질도 하고, 쌀을 말려도 놓고 해야지.

박소연 : 맞아요, 콩깍지도 바람에 날려서 눈에 와 씌워야 가을 같죠.

문성휘 : 그런 풍경이 있어야 가을 맛이 나는 거예요. 그런 풍경이 지금 와서는, 사람이 고생했던 시절이 억울하고 분한 게 아니라 때때로 그리울 때가 있어요.

박소연 : 저 정말 그리워요.

진행자 : 북한의 가을이 향취가 있고, 전통적인 냄새가 더 난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성휘 : 그렇죠. 그런데 한국만의 가을이 있어요. 남한의 가을은 또 등산의 계절이 아니에요. 산에 가면 대한민국 사람들 다 산에 와 사나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 험한 북악산부터 설악산, 소백산, 지리산... 사람들이 오솔길마다 울긋불긋 줄을 쭉 맞춰서 가을엔 정말 등산하는 풍경 볼만 하죠.

진행자 : 문 기자께서는 남한의 가을을 잘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 추석, 설에는 소연 씨도 임진각에 가는 것도 좋지만, 동료들과 함께 해외든 국내든 용기내서 여행 가시면 어떨까요?

울지 마시고 환하게 웃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박소연 : 그럴게요(웃음).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나 시름'을 향수(鄕愁)라고 하죠? 몸에 뿌리는 '향수(香水)'와는 다른 한자를 쓰는데도 무언가 그리워하는 것에는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얘기를 들어보니 남북한의 가을은 같은 듯 참 다르네요. 소연 씨는 북녘의 냄새를 안고 이제 남한에서 또 다른 가을 냄새를 채워가겠죠? 소연 씨의 남한살이, 다음 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 이 시간은 여기까집니다. 진행에 윤하정이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