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 4년 차를 맞고 있습니다. 2012년 아들을 데려와 혼자서 키우는 열혈 '워킹맘' 그러니까 일하는 엄마입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엔 남한 정착 9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그 정도가 아니라 뼈가 아예 부러져서 불거진 상태였어요.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뼈가 신경을 눌러서 전신 마비가 올 뻔 했다고요. 이 목이라 게 그렇게 중요하다네요.
소연 씨가 남한에 와서 처음, 큰 산을 하나 넘었습니다. 지난주 아들이 큰 수술을 받았는데요. 아이의 꿈이 걸린 일이라 결정이 쉽진 않았습니다. 혼자라는 게 뼈저렸던 지난 며칠... 소연 씨는 이번 일을 통해 아들보다 자신의 마음이 수술 받았다고 말합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은 소연 씨의 속 탔던 얘기, 함께 들어주시죠.
진행자 : 안녕하세요. 잘들 지내셨습니까?
문성휘 : 안녕하세요. 저야 잘 지냈지만 소연 씨는 아들이 목을 다쳐서 수술을 했습니다. 잘 지냈다고 얘기하긴 어렵겠어요?
진행자 : 아마 남한에 와서 가장 큰 일을 치른 셈이죠?
박소연 : 네...
문성휘 : 애들이 원래 말썽을 잘 부리니 어렸을 때는 한번 씩 겪는 일이죠. 어떻게 수술을 하게 된 겁니까?
박소연 : 남한에는 애들 놀이 기구 중에서 북한으로 말하면 그물 같은 건데 방방 뛸 수 있는 놀이기구가 있어요.
문성휘 : 교예단이 높은 데서 아래로 뛰어 내릴 때 바닥에 안전하게 착지하게 해주는 동그랗게 그물달린 판이 있죠. 그거에요. 남쪽에선 트램펄린이라고 하는데 그걸 이용해서 뛰어놀 수 있는 놀이방이 있어요. 거기서 다친 건가요?
박소연 : 네, 높이 뛰었다가 바닥에 잘 못 떨어졌답니다. 우정 시간을 빼서 병원에도 데려갔는데요. 그때 병원에서 MRI도 찍어 봐야한다고 했습니다. 이게 아마 북쪽에는 거의 없을텐데요...
문성휘 : 자기공명진단 장치라고 부르죠. 2004년까지 북한에 CT가 3대 밖에 없었으니까 이 장치는 평양적십자나 김만유 병원에는 있을까요?
진행자 : 남쪽에서도 의료보험이 적용된 지 얼마 안 되는 비싼 촬영이지만 몸속의 상태, 특히 뼈와 신경 등을 정확히 들여다 볼 수 있어서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어요?
박소연 : 약간 금이 갔지만 수술은 안 해도 되고 재활만 몇 번 받으면 되겠다고 했습니다. 부지런히 다녔어야 했는데 당시에 애는 괜찮다고 그래서 가다 말았고요. 반년 정도 지난 일인데 이번에 사실... 제가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아이가 축구를 그렇게 잘 하는지 몰랐을 거예요. 잘 때도 축구공을 안고 자고 만날 축구를 한다고 그러기에 좋아한다고 생각했지 그렇게 잘 할 줄은 솔직히 몰랐습니다. 이번에 축구단에 뽑혀 갔는데요. 그러면서 저번에 다친 목이 생각났습니다. 한번 확인해 봐야할 것 같았어요. 그런데... 너무 심각해진 겁니다. 뼈가 가운데가 변형이 왔어요.
문성휘 : 이게 다른 뼈였으면 벌써 탈이 나도 알렸겠는데 척추 뼈여서 서서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북한 사람들, 허리를 잘 못 쓰지 않습니까? 허리 디스크라고 하죠. 이 경우도 비슷한 거 아닙니까?
박소연 : 그 정도가 아니라 뼈가 아예 부러져서 불거진 상태였어요. 조금만 더 늦게 왔으면 뼈가 신경을 눌러서 전신 마비가 올 뻔 했다고요. 이 목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하다네요. 그 말을 듣는 순간에 아들을 축구단으로 불러준 감독님이 그렇게 감사하더라고요. 안 그랬으면 모르고 넘어갈 뻔 했습니다. 정말 조금만 늦었으면 큰 일 났었을 것 같고요.
진행자 : 너무 늦지 않게 발견된 게 다행입니다. 그럼 그 목뼈를 고정 시키는 수술을 받은 것인가요?
박소연 : 네, 3번과 4번 뼈 사이에 인공뼈를 만들어 넣어주고 금속 핀을 박아 고정을 시켜주는 수술이었습니다. 불거져서 휘어버린 뼈를 바로 세우고 뼈 사이에 인공뼈를 만들어 넣어주는 것이니까 결국 수술을 하고 난 뒤엔 3-4번이 통뼈가 돼버리더라고요. 목에선 1-2번뼈가 80%이상의 일을 하기 때문에 수술을 안 한 것보다는 못 하지만 그래도 축구도 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문성휘 : 그건 정말 다행입니다.
진행자 : 뼈에 핀 그러니까 못을 박는다는 얘기잖아요? 쉬운 수술 같진 않네요.
문성휘 : 그렇죠.. 저희 집 사람도 남한에 와서 허리에다 나사를 박는 수술을 했습니다. 우리 북한 사람들 허리 디스크가 많지 않아요?
진행자 : 왜들 그러신 거죠? 탈북자들보면 정말 허리 병이 많아요.
박소연 : 배낭을 자꾸 메고 다녀서 그러죠. 무거운 것을 많이 들고 다녀서...
문성휘 : 물퉁재가 얼마나 무거운데요. 15킬로는 됩니다. 그걸 어렸을 때부터 이고 매고 다니니까 허리 병이 올 수밖에 없어요. 이자, 소연 씨 아들처럼 어느 날 딱 아파서 문제가 되는 것보다 서서히 오니까 남한에 와서 다 아는 겁니다. 북한에선 아파도 잘 모르고요.
박소연 : 그래서 남한에 와서 수술을 하신 겁니까?
문성휘 : 그렇죠. 실은 집사람은 수술 잘 돼서 아무렇지도 않게 잘 다닙니다.
진행자 : 허리 디스크... 북쪽에서도 똑같은 병명으로 부르는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척추 협착증이라고 하는데요. 척추 뼈 사이를 채우고 있는 디스크가 빠져 나와서 신경을 누르거나 뼈 사이가 좁아져 거의 붙어 버린 상태입니다. 보통 수술은 이렇게 협착, 그러니까 붙어 있는 뼈 사이를 벌려서 나사로 고정을 시키는데요. 그런 수술을 하신 건가요?
문성휘 : 그렇죠. 쇠심을 박는 수술이죠. 이게 목이냐 허리냐가 다르지 소연 씨 아들과 똑같은 수술이라고 봐야죠. 지금 못 봐서 그렇지... 근데 소연 씨 그 사진을 보지 마세요. 저는 수술한 뒤에 1년이 지나니까 엑스레이를 촬영해서 그걸 보여주는데... 아 정말, 절대 보지세요. 집사람은 오히려 담담한데 제가 끔찍했습니다. 뼈에 박은 나사 모양이 그대로 보입니다. 나사 4개와 ㄷ형으로 고정된 철심까지 그대로 보여요. 이 철심이 사람 몸에 들어갔는데 참 희한하죠? 아프지 않답니다. 아마 댁의 아들도...
박소연 : 전 벌써 봤죠. (웃음) 수술이 끝나고 바로 CT 실로 들어가서 찍어 보여주더라고요. 제대로 수술이 됐는지 확인을 하는 것이죠. 이자 보니까 나사 목 형태가 그대로 알려요. 근데 문 기자님은 아내분이 수술하러 들어갈 때 괜찮으셨어요?
문성휘 : 나보다는 애들이 더 긴장했었어요. 저도 몹시 긴장은 했어요. 그런데 애들은 무서워서 어디 갈 바를 몰라 하더라고요. 저는 남한은 의술이 발달돼서 괜찮을 거다 그랬는데요... (웃음) 근데 예정된 수술 시간보다 1시간 이상 경과되니까 안절부절 못하게 됐어요. 수술은 잘 됐다고 의사가 나와서 그러니까 그때 안심을 했죠. 간호사들이 피를 막 갖고 들어가고 했을 때는 무슨 일인가 엄청나게 걱정했습니다. 그래도 수술하고 나서 침대가 나오는데 의식이 약간 있어서 손을 잡아주면서 괜찮아 그렇게 얘기해주고... 저보다는 아이들이 많이 울었습니다. 그때 북한에서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인데 아빠가 있어도 아이들의 기둥은 엄마죠... 제가 이렇게 얘기해도 아마 소연 씨의 심정은 또 달랐을 것 같습니다. 저는 부인이지만 소연 씨는 아들의 일이 아닙니까? 사진보면 눈물 많이 울었을 것 같은데...
박소연 : 그러게요... 제가 아이를 데리고 북한에서 탈북하기 전에 북한에서 수술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나름 대수술이었어요. 제가 그때 수술실에 들어가서 옷 입은 채로 무게를 뜨니까 42 킬로더라고요. 배 속에 주먹만한 혹이 몇 개나 있었는데도 42킬로였으니까 아마 제가 40킬로도 채 안 나갔다는 얘기겠죠. 아이가 막 아장아장 걸을 때였는데 아이가 어렸는데도 정말 저는 살고 싶지 않았어요. 너무 기운이 없었고... 그때 수술실에 들어가기 전에 동생하고 친구 손을 잡고 내가 죽으면 아이를 꼭 좀 키워달라고 그랬던 기억도 나네요. 수술을 하고 나왔는데 여기처럼 밀차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냥 간호사들이 나를 들고 옮기는데 걷는 신발 뒤축 따다닥닥 소리가 들렸어요. 그 때 애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때고 그래서 울지도 않고 가만히 있었어요. 이번에 제가 그 아이의 수술에 동의서를 서명했네요. 그 동의서에 사인을 하고 수술은 10일 있다가 했는데 그 10일이 수술보다도 힘들었습니다. 아이는 수술을 하면 그렇게 원하는 축구를 못 한다고 너무 실망을 했습니다. 밥도 안 먹고 학교도 안 가겠다고 하고. 옆에서 한국 분들이 조언을 해주시더라고요. 여기저기 병원도 많이 다녀보고 물어보고 결정을 해라. 근데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방송 프로그램을 같이 하던 대표님이 자기가 잘 아는 의사를 한 분 소개해 주시겠다고, 순 국가대표들을 보시는 분이라고요.
진행자 : 운동선수들은 전문으로 보시는 의사이군요.
박소연 : 네, 맞습니다. 근데 저는 진짜 기대를 안 했습니다. 남한에 와서 이게 정말 안 좋은데요. 여기는 빽이나 뇌물이 필요 없어요. 다 절차를 밟아야 하더라고요. 우리는 급하면 원장님한테 고양이 담배 한 갑 찔러주면 렌드겐도 1번으로 찍을 수 있었는데 여긴 그게 안 됩니다. 그래서 별로 기대를 안 했는데 그 분이 정말 말씀을 잘해주셨더라고요. 탈북민이다, 엄마 혼자 아이를 키우는데 축구를 좋아한다고. 아침 7시 반에 전화가 왔더라고요. 환자 보는 시간 전에 봐주시겠다고. 제가 솔직히 물어봤습니다. 어렵게 온 아이라서 축구가 하고 싶다면 하게 해주고 싶다, 할 수 있는지 솔직히 말해 달라. 선생님이 아들에게 컴퓨터를 보여주면서 설명을 해주시더라고요. 목뼈부터 척추까지 죽 연결이 돼있는데 목뼈가 잘 못 되도 축구를 못하진 않는다, 밑에 30개가 받쳐 주기 때문에. 그리고 뼈가 두 개가 합쳐지기 때문에 경과가 좋고 재활을 잘 하면 더 좋아질 수 있다고. 그때부터 아이가 웃더라고요.
문성휘 : 세상에 축구가 그렇게 좋았답니까? 축구에 열정이 대단하네요.
진행자 : 축구공을 안고 잔다잖아요. (웃음) 수술을 하는 것보다 그래서 아픈 것보다 제일 걱정 됐던 것이 축구를 못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군요.
문성휘 : 정말 다행이네요...
우리, 말은 그렇게 하죠. 사람의 생명보다 소중한 건 없다... 그렇지만 돈이라는 현실 앞에서 이런 말이 참 허망해질 때가 있는데요. 소연 씨는 이번에 불행 중 다행이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됐답니다. 만 달러가 훌쩍 넘는 큰 수술비였지만 다행히, 잘 해결됐습니다. 가장 다행인 건 수술한 곳이 남한이었다는 것이라네요. 어떤 심정인지 아시겠죠?
이 얘기는 다음 주 이어가겠습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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