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은 사회주의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한 햇내기 입니다. 무산 출신으로 선전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인데요. 하나원 교육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근 일 년...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에는 남한 정착 7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근데 다 좋았는데... 저는 그 줄을 얼마나 섰는지 그 땡볕에 2시간을 넘게 줄을 섰습니다...

지난 추석, 아이를 데리고 유희장에 갔던 소연 씨는 지겹게 줄을 섰습니다. 놀이기구 1개에 2시간 줄을 서서 나중엔 아이들에게 끌려 다녔다는데요. 줄은 북쪽에서만 서고 남쪽에 오면 안 설 줄 알았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새삼스럽게 줄은 사회주의다...라는 시도 생각났습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 이 얘기 들어봅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문성휘, 박소연 : 안녕하세요.

진행자 : 조금 늦었지만 추석들 잘 보내셨습니까? (웃음) 소연 씨는 처음으로 맞는 추석인가요?

박소연 : 아뇨, 올해가 두 번째입니다.

진행자 : 뭐하셨어요? 가족이 멀리 있으니 쓸쓸하셨을 것 같은데요...

박소연 : 작년에 울었는데 올해는 웃었습니다.

진행자 : 아... 아드님이 왔네요. (웃음)

박소연 : 아들도 있고 또 그날 신부님이랑 수녀님이랑 두 분이 운영하시는 쉼터 아이들과 함께 용인 에버랜드에도 가고 임진각에도 다녀왔습니다.

진행자 : 어떻게 아시는 분들이에요?

박소연 : 하나원에 들어가면 자유롭게 원하는 종교 교회에 가라고 하거든요. 그때 저는 가톨릭 성당에 다녔는데 그때 알았던 분들이고 지금까지도 연계를 갖고 있어요.

진행자 : 에버랜드... 북쪽 식으로 말하면 유희장입니다. 규모가 아주 커서요. 동물원과 유희장이 함께 있어요.

문성휘 : 휴식일이나 이런 때 아이들은 굉장히 잘 가더라고요. 저는 만경대 유희장도 가보고 대성산 유희장도 가봤는데... 별로 그냥 그렇더라고요.

진행자 : 그럼 남쪽에 와서 유희장에 한 번도 안 가보셨어요?

문성휘 : 네, 저는 심장이 좋지 않아서 깜짝 깜짝 너무 놀라면 안 됩니다. (웃음) 실은 만경대 유희장에 갔을 때 이중원반도 재밌게 타고 그랬는데 왜 한국 에버랜드... 이런 데는 아이들만 가는 곳 같이 느껴져요. 물론 어른들도 많이 간다는 걸 알고 있지만 별로 가고 싶지 않습니다.

박소연 : 저는 만경대랑 대성산 유희장은 텔레비전에서만 봤습니다. 중앙 동물원도 못 가봤어요. 근데 이제 정반대네요. 저는 온지 삼년이 안 됐는데 서울에 있는 유희장이라는 유희장은 다 가봤습니다. (웃음)

진행자 : 문 기자와 소연 씨 같은 경험을 갖은 분들이 많을 겁니다. 남쪽에는 사실 유희장에 많이 가봤나는 어디에 사느냐 문제가 아니라 그 가정의 아이들이 몇 살이냐... 이게 큰 상관이 있죠. 아이들이 어린 가정들은 다 가보게 돼요. 소연 씨도 아이 때문에 간 거잖아요?

박소연 : 근데 저는 애는 구실입니다. 저는 혼자라도 갔을 것 같습니다. (웃음)

진행자 : 그렇게 재밌었나요?

박소연 : 네, 저는 휴대 전화만 발전한 줄 알았더니 놀이 기구도 발전했더라고요. 조종사가 없는데도 배가 제 길 따라 들어가서 벽에 부딪쳐서는 공지로 나가고...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근데 다 좋았는데... 그 줄을 얼마나 섰는지 몰라요. 그 땡볕에 2시간을 넘게 줄을 섰습니다!

문성휘 : 북쪽에선 사실 줄 안 선 곳이 없지만 만경대 유희장에서도 줄을 아주 길게 섰던 기억이 납니다.

진행자 : 추석 연휴 때 가셨다면서요? 그렇게 다 같이 쉬는 날엔 진짜 사람 많아요. 줄 서기 싫으면 그런 날은 피하셨어야 하는데...

박소연 : 솔직히 북한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줄 서는 겁니다. 저는 한국에 오면 줄을 안 설 줄 알았어요. 근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북한에선 옛날에 줄을 많이 섰어요. 배급을 타러 줄서고 또... 문 기자님도 기억하실 겁니다. 우리 어릴 때는 기계 방앗간에서 떡을 많이 해먹었습니다. 소랭이에다 옥수수에 밀을 갖고 가서 하루 종일 줄을 서서 떡을 빼와서 먹었죠. 이 줄은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점점 줄었고요. 대신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면서는 딴 줄이 생겼습니다. 전기가 없어서 윗동네에 물이 안 와요. 아랫동네 물 나오는 집이 수도에서 호수를 하나 빼주면 물을 받아가려고 물퉁재(물퉁지)를 들고 끝이 안 보이게 줄을 서죠. 물퉁재 하나 받겠다고 오전에 2-3시간 씩 줄서고... 전 정말 줄에 질렸습니다. 그래서 정말 한국 가게 되면 이제 줄 없는 세상에서 살 것이다 그랬는데... 다행히 즐거운 줄이네요. (웃음)

진행자 : 즐거운 줄이지만 줄 서긴 역시 싫죠? (웃음) 소연 씨는 놀이기구 앞에서 2 시간 줄 서면서 북한 생각 많이 하셨나보네요.

박소연 : 많이 했습니다. 북한 생각... 또 줄 서는 것도 참 극과 극이구나 생각도 했고요.

문성휘 : 북한에 있을 때 그런 시가 있었어요. 소련이 붕괴하던 시기, 사회주의를 비난하는 시였는데 이제 시 전체는 기억나진 않네요. (웃음) 시 제목이 '줄'이었습니다.

줄은 곧 사회주의다 사회주의는 줄이다 배급소에 가도 줄, 식당에 가도 줄, 열차를 타려해도 줄...

박소연 : 아, 정말 안겨오네요.

문성휘 : 아닌 게 아니라 북한에 요즘 줄이 많이 사라졌네요. 결국 줄이 없어졌다는 건 사회주의가 그만큼 사라졌다는 증거가 되겠습니다. 우리 학교 다닐 땐 줄을 지어서 학교도 다니고... 제가 늘 기억나는 게, 여기 오기 얼마 전에 자강도 강계 시부터 만포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어요. 그 앞에 줄이 정말 길게 늘어섰는데 친구 2명과 함께 어디 끼어들어야지 이렇게는 안 되겠다 싶어서 눈치를 이렇게 봤습니다. 그리고 젊은 여성과 늙은이들 사이에 슬쩍 끼어들었죠. 처음부터 우리 자리인 것처럼 태연하게 서 있고 여자들은 놀랐지만 감히 말을 하진 못해요. 북한은 주먹이 날라 갈 수도 있으니까... 근데 갑자기 어디서 '야, 임마!' 추상같은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까 별을 단 군관 아저씨가 서있어요. 북한에선 군대들하고 누구도 못 맞서요. 막 혼나고 다들 지켜보는데 도망치고... 너무 창피해서 버스를 못 탔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진행자 : 줄서기에 대한 기억은 하나씩 있으시겠군요. (웃음) 소연 씨는 기억나는 일 없어요?

박소연 : 아, 저는 그날 에버랜드에서 줄 서 있는데 갑자기 같이 오던 친구 생각이 났습니다. 걔는 줄이 줄어드는 게 제일 무서웠대요.

문성휘 : 무슨 말이래요, 그게?

박소연 : 중국에서부터 함께 온 아이인데 북송을 두 번 당했대요. 잡히기는 연변에서 잡혔는데 단동으로 해서 신의주로 들어갔데요. 보위소 집결소 마당에 들어갔는데 30명을 조르르 줄을 세웠고 자기는 스물 몇 번째였답니다. 한번 북송 당한 경험이 있으니까 얼마나 매를 맞을지 미리 알고 있었대요. 매라는 걸 맞는 정도가 아니랍니다... 그렇게 때리고 취조를 해서 이쪽 감방에 넣고 넣고... 점점 줄이 줄어서 자기 차례가 되는 게 너무도 무섭고 불안했다고요. 줄이라는 것도 이렇게 반대의 의미가 있네요... 그 애, 인천에 갔는데 어떻게 살고 있는지 연락해봐야겠습니다.

진행자 : 남쪽에는 줄이라고 해봤자 식당 앞에서 밥 먹는 줄, 유희장 가서 서는 줄, 버스 타는 줄, 물건 사는 줄 정도인데 북쪽에는 또 그런 줄이 있군요.

박소연 : 이런 소리까지 해도 되겠는지 모르겠지만 태국에서 한국 가는 거 기다릴 때도 고향이 다른 몇 백 명의 사람들이 한 방에 모여 있으니 별별 사람들이 다 있습니다. 그러니 줄을 안 세우면 운영이 안 돼요. 3백 명씩 한 방에 들어가 있는데 화장실이 엄청 작고요. 총반장이라는 여자가 막 고아대며 줄서라고 했더니 일흔 되는 어른이 와락 일어나더니 '그래, 너는 줄이나 세울라고 여기에 왔니? 그럴 라면 김정일에게 가라! 우린 그게 싫어서 여기에 왔는데!... 사람들이 막 와... 그러고 총반장이라는 여자가 아무 말도 못했어요. 우리가 얼마나 줄이 지겨운 줄 아시겠죠?

문성휘 : 정말 어디나 줄이었던 것 같아요. 고난의 행군 이후에는 줄이 많이 파괴됐는데 그 전에는 문 밖을 나오면 학교 갈 때부터 올 때까지 항상 줄을 서 있어야 하니까 저희 인식에는 참... 줄이라는 게 좋지 않은 거예요.

박소연 : 우리는 유치원 때부터 줄을 서요. 김일성, 김정일 누런 과자, 사탕주면서도 아이들을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줄을 세워두고...

문성휘 : 아, 맞아요. 소년단 연합단체대회라고 했지... 우리 어릴 때 줄을 서서 서너 시간씩 했어요. 마지막에 열병식처럼 앞에 깃발 들고 행진을 했어요.

박소연 : 그것도 줄이잖아요.

문성휘 : 손발을 딱딱 맞춰서 한 달 전부터 연습을 했습니다...

진행자 : 자자... 줄 얘기가 끝이 없습니다. 근데 줄 얘기하니까 제가 할 말이 없네요. (웃음)

문성휘 : 여기야 기껏해야 버스 정류장이나 에버랜드나 줄을 서죠. 또 한국은 줄을 처리하는 시간이 굉장히 빨라요.

박소연 : 그보다도 보면 남한에선 사람들이 알아서 줄을 섭니다. 줄 서면 일 처리가 빨리 되니까 자각적으로 서는 거예요. 줄 서는 게 싫은 게 아니라 사실 그게 강제라는 게 싫었던 겁니다.

진행자 : 남한도 그렇게 자발적으로 줄 서는 문화가 생기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박소연 : 아, 제가 남한에 와서 승용차를 탄 적이 있었는데 도로가 꽉 막혔어요. 도로 옆을 보니까 차 한 대 지나갈 자리가 비어있는 거예요. 운전기사보고 저쪽으로 빨리 가면 안 되냐고 물었더니 거기는 바쁜 차만 통과하는 도로래요. 북한 같으면 그 도로 차로 꽉 찼어요. 어떻게 하면 이런 사회 수준이 되나...

문성휘 : 아이고 소연 씨... 운전 안 하죠? (웃음)

진행자 : 그건 고속도로나 내부 순환도로에 갓길이라고 비상차량 가는 도로를 하나 비워놓은 거고요. 그 길로 차 막힌다고 지나갔다는 벌금이 큽니다!

박소연 : 내가 오해했구나...(웃음)

문성휘 : 한국은 진짜 자동차 줄 하나는 정말 짜증나죠. 차가 너무 많아요.

진행자 : 대단하죠. 저도 도로에 서있는 차 줄은 정말 싫습니다. (웃음) 근데 남한에 차 많은 건 에버랜드에서도 느껴져요. 소연 씨, 에버랜드 주차장 가보셨어요?

박소연 : 저는 너무 커서 비행장에 온줄 알았어요. 차를 찾지를 못해요.

진행자 :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에버랜드 유희장 입구까지 버스를 운영하고 있으니 얼마나 큰 지 아시겠죠. 걸어서는 못가요.

문성휘 : 그렇게 커요?

박소연 : 그냥 한 개의 도시입니다...

소연 씨의 남한 유희장 가본 자랑이 계속 되는데요. 유희장이랑 좀 안 어울리지만 이날 가서 족자(가훈)도 써왔답니다. 추석이라서 무료로 족자 - 남쪽에선 가훈이라고 하는데요... 써주는 행사가 있었는데 소연 씨도 한 장 부탁해 썼답니다. 네 글자, '보고싶다'... 이렇게 적었습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어요?

이 얘기, 다음 시간에 이어 가겠습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 여기까집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