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이니까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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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 4년 차를 맞고 있습니다. 2012년 아들을 데려와 혼자서 키우는 열혈 '워킹맘' 그러니까 일하는 엄마입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엔 남한 정착 9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올해는 일도 많고 웃기도 했지만 많이 울었고...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의 결론은 나를 웃고, 울고 하는 건 결국 나한테 달렸다. 환경이 아니다...

소연 씨가 굉장히 철학적인 얘기를 했네요. 출처는 분명치 않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모두 내 마음에 있다.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네요.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엔 빠르게 지나간 올 한 해, 2015년 마무리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소연 씨는 올해 잊을 수 없는 일로 중국에 가서 고향을 보고 온 것을 꼽았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소연 씨의 얘기, 계속 들어봅니다.

진행자 : 고향 땅이 보였습니까?

박소연 : 아... 보입니다. 단둥은 건너편이 신의주니까 거기가 북한 땅이구나... 마음이 심란한 정도였는데요. 무산 산줄기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우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 막 배속에서 끓어올랐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질 못했어요. 너무 울어서. 중국 땅에도 북한 보위부가 깔렸는데 거기서 괜히 내려섰다가 일이 날까봐 다들 제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셨어요. 그리고 내려서는 제가 고향을 볼 수 있게, 땅에 절 할 수 있게 저를 가려주셨어요... 그렇게 떠나와 그래도 무사히 다녀왔고요... 버스에 타고 2시간 동안은 멍하니 입을 헤 벌리고 있게 되더라고요... 저는 말로 입을 다물고 하는 성격인데요. (웃음) 어쨌든 그렇게 다녀왔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진행자 : 근데 참... 마음의 준비도 했을텐데 고향 집 딱 보였을 때는 그냥 무너졌겠습니다...

박소연 : 그랬어요. 정말.

문성휘 : 그래서 저는 외국에 안 나가요. 중국에 한 번도 간 적이 없어요. 흔히 사람들 같이 놀러 가자하는데 보이는 것, 발걸음 하나하나가 다 상처를, 마음을 후비어 팔 것 같고 그래서 가기를 두려워합니다.

박소연 : 그래요. 안 가는 것이 안 보는 것이 나을 뻔 했습니다. 아직도 고향집 지붕이 눈 앞에 어른거리고 강에서 빨래하는 여자들, 애기들. 나도 북한에서 살았다면 저기에 빨래 함지를 이고 나와 앉았겠구나... 향수도 있지만 언제가 돼야 저 사람들이 다 세탁기로 빨래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어느 일정한 구역은 전혀 사람이 없는 겁니다. 그 구역은 못 내려오게 하고 일정 구역만 빨래를 할 수 있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럼 저희는 알죠...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저쪽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 집 앞에 강가로 못 내려가고 그 무거운 빨래 함지를 이고 한참을 가야하지 않습니까? 빨래가 젖으면 얼마나 무거운데요. 30-40킬로 되는 함지를 또 머리에 이고... 그래서 북한 여자들이 키가 안 큽니다! 너무 안쓰럽고 원통한 생각까지 들었어요.

문성휘 : 보통 상처는 시간이 약이라고 하는데요. 제가 보기엔 이산의 아픔, 슬픔이라는 건 시간이 갈수록 헤집어 지는 것 같습니다. 저희도 명절이면 통일 전망대나 임진각 같은 데 가서 망원경으로 북쪽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조상님에게 절도 합니다. 그럴 때는 그냥 저게 내가 살던 땅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정작 가까이 가면 생각이 달라지는 겁니다. 휴전선 넘어 보는 것과 눈앞에 보이는 건...

진행자 : 손에 잡힐 듯하게 보이는 집인데요. 금방 건너갔다 올 수 있을 것 같고...

박소연 : 계속 집에다 연결을 하고 싶었어요. 그 시간에 물퉁재라도 지고 나오나 하고 싶었지만 연락이 안 닿았어요. 국경에서 막 전파를 쏘아서 중국쪽에서도 전화가 안 터졌습니다. 그게 정말 원통했는데 얼마 전에서야 고향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저쪽에선 그러면 알려줘야지! 막 그러고 저는 그러는 너는 왜 그 시간에 물 바케츠를 들고 강에 안 나왔냐... 둘 다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소리를 하며 전화에 대고 울었습니다. 이제는 너무 울어서 눈물도 안 나오네요... (웃음) 보고 왔다, 잘 있어라... 그랬습니다.

진행자 : 우리한테 허용된 것이 딱 거기까지인가요? 목소리 들을 수 있는 것?

문성휘 : 그래도 여기 왔으니까 중국을 통해서 그렇게라도 보고 올 수 있지 않겠습니까? 중국뿐이 아니라 미국이나 어디나 갈 수 있지 않습니까? 북한은 도에서 도를 가는 게 제가 지금 여기서 여권과 비행기를 떼고 가는 것과 똑같습니다.

박소연 : 아마 여기서 유럽 어느 나라 가는 것보다 북한에서 도에서 도 넘어가는 게 더 힘들 겁니다. (웃음)

문성휘 : 아유... 그나저나 한 해라는 게 정말 어떻게 지나갔는지 설명을 못 하겠네요.

진행자 : 진짜 금방 지나가죠?

박소연 : 그래요. 그렇지만 한 해 동안 지나간 일을 생각할 때 모든 게 슬프다고 생각하면 슬픔이지만 기쁘다고 생각하면 기쁨입니다. 그래... 고향을 멀리라도 볼 수 있어 기쁘다. 제가 생각하기 나름인 것 같습니다. 중국에 간 게 아들애가 수술하고 난 뒤 15일 뒤였습니다. 깁스를 아직도 하고 있을 때였어요. 아침부터 제 손이 꼭 필요한 때였지만 고향을 볼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갔습니다. 그래도 아들아이가 이해를 해줬어요. 아이는 한편으로는 엄마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은 생각도 있고 한 편으로는 엄마가 자꾸 오락도 못 하게 하고 잔소리를 하니 그걸 벗어나고자 하는 뜻도 있겠죠. (웃음) 그래, 슬프다고 생각하지 말자. 70년이라는 세월이 분단됐는데 나 하나가 슬프다고 주저앉는다고 통일이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한국에 온 덕에 멀리서 고향을 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자....

문성휘 : 지금 소연 씨가 아들을 주변에 맡기고 중국 국경에 갔다 왔다고 했는데 그게 바로 우리가 북한을 떠났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북한에서는 다 바쁜데 내 아들을 어디 그렇게 맡겨 놓을 수가 있습니까? 누구도 맡아주지 않습니다. 여기는 국가적으로 복지 기관이 있고 도우미들을 보내주기도 하고 교회나 공동체들이 도와주고... 이런 체계가 정말 잘 잡혀있습니다.

진행자 : 아버지가 심하게 혼내며 아들이랑 싸우면 잠시 떨어뜨려 놓아주기도 하고요? (웃음)

문성휘 : 네, 경찰이 와서...(웃음) 그게 남한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박소연 : 맞아... 첫해엔 제가 이 방송을 시작할 때만해도 많이 울었잖아요? 집이 그립다며...경제적인 여유는 찾았는데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상처로 남는구나... 했는데 해마다 다르네요. 북한식 표현으로 이제 쒀놓은 죽이잖습니까?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인데 가족을 생각하며 울면 뭐하겠습니까? 이제는 남한 생활이 정확히 3년 6개월, 횟수로 4년인데요. 아직은 서툴지만, 고향을 잊을 수는 없겠지만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으니까 그 애를 보면서 내가 힘을 내고. 추석 같은 명절은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날이 365일 중에 며칠이나 됩니까? 그리고 울고 있을 시간에 돈을 열심히 벌자. 거기서도 이제 중국에서 쌀이 들어와서 돈만 있으면 괜찮아요. 이제 울지 않습니다.

진행자 : 소연 씨에게 올해 답을 찾는 해였네요.

박소연 : 정말 그렇습니다.

문성휘 : 저는 올해는... 별로 생각이 없었는데 김영삼 대통령이 사망하고 난 뒤 추모 물결이라는 게 생각보다 대단했습니다. 그리고 돌이켜서 가만히 생각해보게 됐는데요. 우리를 탈북 길에까지 오르고 한국에 오게까지 만든 당사자들, 책임 있는 사람들은 이제 다 없더라고요. 김일성은 우리 탈북하기 전에 사망했지만 김정일이 사망했고요. 고의적이었던 비고의적이었든 우리에게 고통을 들씌운 사람들... 어쨌든 이제 다 갔습니다. 마지막 유훈이라도 책임 있는 듯한, 사과를 하는 듯 한 말을 남겼으면 했지만 그렇지 않았고요. 김영삼 전 대통령은 언론이 과대포장해서 보도를 했는지 모르지만 화해, 통합이라는 말을 남겼는데요. 북한에서 먼저 간 사람들도 사과를 하고 후대에게 우리 민족의 통일과 화합을 위해 무엇인가를 남겨야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것은 하나도 안 남기고 그대로 떠나가니까 참 그렇습니다. 그리고 김영삼 대통령 서거하면서 생각을 해보니까 이제 그 시대 정치인들은 정말 다 갔네요. 올 해는 정말.... 우리는 북한을 먼저 생각하지 않습니까? 숱한 간부들을 죽이고 했으니까 저기서 혹시 나와 혈연관계가 있는 사람들, 인연 있는 사람들... 다치지 않을까? 뭔가 불안감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올 해는 그런 면에서 불안했었고 아팠던 한 해였지만 그래도 저는 자리를 지키면서 잘 살아왔습니다. (웃음)

박소연 : 아, 정말 그랬군요. 저는 사람 문 기자처럼 저렇게 깊게는 생각 못해 봤습니다. 정착 연한이 짧아 그런지 제가 한계가 있어서 그런지 저는 그냥 88세면 아직 더 살아도 되는데... (웃음) 그렇게만 생각했어요. 솔직히 그랬어요. 그런데 문 기자가 지금 이런 말을 하니까 공감이 되네요. 저희들도 후대들이 분단 100년을 맞이한다면 뭐라 할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진행자 : 소연 씨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웃음) 저는 김영삼 대통령의 서거를 놓고 여러 생각이 들었는데 문 기자와는 조금 다른, 남한 사람으로 드는 소회들이죠. 한 세기가 지나가는 구나... 이런 생각은 들었고요. 그렇지만 그 시대의 유물이라는 것이 지금 다 사라졌느냐...

문성휘 : 많이 남아있죠. 그렇지만 남한은 그런 걸 대놓고 소리 높여 말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건 고쳐라! 정부에 대고 막 항의도 할 수 있고 인터넷이나 이런 곳에도 자신의 의견을 막 노골적으로 얘기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런 힘이 뭉쳐서 민주화라는 걸 이뤄내지 않았습니까?

진행자 : 그런데도 그런 생각이 듭니다. 2015년에 와서 우리는 아직까지, 그렇게 많이 변한 것도 아니지 않느냐?

문성휘 : 이자, 이 기자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저는 반대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북한은 아직까지... 3대에 이르기까지! (웃음) 변화라는 게 답답하고 느리고. 지금 세계는 빨리 변해야 하는데 북한은 저게 도대체 무엇이냐...

올해는 광복 70주년이었습니다. 북쪽에선 당 창건 70주년이라며 한껏 준비를 했었죠. 너무 들어서 머리에 박힐 정도였네요. 그러나 우리에게 광복 70주년, 당 창건 70주년은 축하보다는 반성의 시기가 됐어야 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광복이 70주년이나 됐건만 서로 헤어져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족은 남쪽에만 4만 명이 넘습니다. 하늘의 별따기라는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이제 20번을 했네요. 올해도 우리는 80대 노부부의 70년만의 상봉에 눈물 흘리며 2016년을 맞고 있습니다. 그래도...유명한 소설의 한 구절처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릅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다음 시간에는 내일의 태양에 대해 얘기해보죠. 두 사람의 새해 소망 얘기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였습니다. 다음 시간에 뵐께요.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