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송년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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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한 햇내기 입니다. 무산 출신으로 선전대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30대 중반의 여성인데요. 하나원 교육을 끝내고 본격적으로 남한 생활을 시작한지 이제 근 일 년...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에는 남한 정착 7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정말 분위기는 좋았어요... 북한에서처럼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술 먹고 즐기는 게 아니고 그냥 북한으로 말하면 아이들 빼배놀음 같아요.

소연 씨 직장에서 얼마 전 송년회를 했답니다. 남한에 와서 첫 직장, 첫 송년회인데 어째 소연 씨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멋지고 고급스러웠지만 술에 취해서 속 타는 얘기(속에 있는 얘기)까지 다 털어놓고 한바탕 싸우기도 하는 북쪽 송년회가 못내 그립다고요.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은 첫 직장 송년회 얘깁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요즘들 바쁘시죠. 연말이어서 한해를 마무리 모임 자리가 많아서 바쁘시던데 어떠세요?

문성휘 : 가는 곳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야해서 이게 참 문제예요.

진행자 : 남쪽은 이맘때 송년회, 망년회 이렇게 한해를 보내는 모임을 많이 하는데 특히 남자들 모이는 곳에 술이 빠지긴 힘들죠.

문성휘 : 근데 송년회랑 망년회 같은 의미가 아닙니까?

진행자 : 다 같이 모여서 한해를 보내며 한 잔하는 자리를 송년회라고도 하고 망년회라고도 하는데요. 한자의 의미는 약간 다릅니다. 송년은 한해를 보낸다는 뜻이고, 망년은 한해를 잊는다는 뜻으로 일본식 표현이라고 해요.

박소연 : 문 기자님, 북한에선 뭐라고 했죠. 우리도 망년회라고 했죠?

문성휘 : 망년회, 송년회를 다 썼죠.

진행자 : 소연 씨는 송년회 다녀오셨어요?

박소연 : 북한에서는 많이 갔지만 한국에 와서는 이번에 처음 갔죠. 북한에서는 대체로 집에서 했고요. 문 기자님은 어떠셨어요?

문성휘 : 우리도 역시 집에서 했죠. 대체로 우리 부서 책임자들, 기관장들 집에서 하잖아요?

박소연 : 그런데 여기는 멋있는 식당이나 분위기 좋은 곳을 미리미리 예약해놓고 와인도 마시고 하잖아요. 이번에 회사에서 송년회를 했는데 우리 회사에서 선배가 인터넷에서 식당을 찾았습니다. 제가 분위기가 뭐가 필요 하냐, 음식 맛있는 게 중요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야경이 좋고 분위기도 좋아야한다면서 서울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63빌딩을 예약했어요. 그래서 갔는데 정말 분위기는 좋았어요. 북한에서처럼 맛있는 걸 많이 먹고 술 먹고 즐기는 게 아니고 그냥 북한으로 말하면 아이들 빼배놀음 같아요.

진행자 : 빼배놀음이 뭔가요?

문성휘 : 소꿉놀이요.

박소연 : 술도 술잔에 가득 채워 안 주고 잔 밑에만 조금만 채워주더니 조금 있다가 작은 그릇에 죽 같은 걸 내오고, 빵도 조각을 내오고 여러 번 자주 음식이 나오더라고요. 마지막엔 5, 6번 꺾어 나오니까 배가 부르던데...

문성휘 : 암튼 그걸 다 먹으면 마지막엔 배가 불러서 못 먹습니다.

진행자 : 비싼 데 가서 드신 것 같은데요?

박소연 : 이 기자님! 예전부터 남한에선 송년회를 이렇게 하는 거예요? 분위기 좋은 곳에서?

진행자 : 아니요. 이건 직장마다 다른 것 같아요. 주로 제일 많이 하는 송년회는 삼겹살 굽는 거죠. (웃음) 돼지고기 구우면서 소주 한 잔!

박소연 : 저는 사실 그런 게 좋았어요.

문성휘 : 근데 내가 알고 싶은 건 옛날부터 이렇게 식당에 다니면서 송년회, 망년회를 했냐는 겁니다.

진행자 : 북에선 식당에서 뭐 드시기 힘드니까 집에서 주로 하시잖아요. 남쪽엔 예전부터 식당도 많았고 누구네 집으로 가면 좀 번거로우니까 식당으로 많이 갔죠. 제가 직장생활 시작했을 때부터 항상 식당을 갔고요. 저희 아버지를 생각을 해보면 밖에서 식사를 하며 반주를 한잔 하고 두 번째는 술집에서 소주 드시고 그리고는 모두 다 끌고 집으로 오죠. 엄마가 갑자기 한상을 마련해서 다 같이 드시다가 새벽에 집에 가셨던 기억이 나네요. (웃음)

박소연 : 그러니까 남한은 옛날부터 식당에서 했다는 얘기잖아요.

진행자 : 네, 사실 식당이 편하잖아요. 집으로 가면 차려야 되고...

문성휘 : 남한은 순서가 이래요. 처음엔 삼겹살에 술을 마시고 다 취한 다음에 무리지어서 2차로 맥주 집을 가서 맥주를 마시고 그 다음 3차로 노래방에 가서 정신없이 고함을 지르고 논다.

진행자 : 아... 진짜 모르는 말씀하시네요. 옛날엔 그랬죠.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남쪽 사람들도 송년회 하면 술이지만 요즘은 많이 자제하는 분위기입니다. 술도 막 권하지 말고 먹을 만큼 적당히 마시고 집에 가자는 분위기죠.

문성휘 : 근데 북한 망년회하고 한국 망년회는 진짜 차이가 큽니다. 한국 망년회는 왠지 별로 의미가 없는 것 같아요. 그저 항상 먹는 밥을 그 날에 모여서 같이 먹는다는 의미지 뭔가 새로운 게 없어요.

진행자 : 북한은 어떻게 하는데요?

문성휘 : 북한은 굉장히 의미가 깊죠. 왜냐하면 술을 매일 마시기도 힘이 들어요. 그리고 송년회 땐 없는 돈이라도 끌어 모아 고깃국이라도 끓이겠죠? 콩나물, 두부, 감자채 이렇게 반찬들도 합니다. 그렇게 푸짐히 먹어보는 게 1년에 기껏해야 한 두 번이에요. 그러니까 송년회는 진짜 기대되죠.

진행자 : 아... 잘 먹는 날이라는 의미가 있군요.

문성휘 : 그러니까 한번하면 기억이 남죠. 지난해 송년회 땐 이런 걸 먹었는데...

진행자 : 주로 먹는 것, 마신 것 기억하시는군요. (웃음)

박소연 : 먹는 것 말고 뭘 기억하겠어요.

문성휘 : 한국은 참 재미없어요. 우선 식당에 가서 먹는 문화 너무 재미없어요. 식당에서 먹고 꼭 나와야 하니까요.

진행자 : 그러니까 망년회 장소가 맘에 안 들고 북쪽보다 술을 덜 먹어서 남쪽 송년회가 싫다? (웃음)

문성휘 : 네, 기왕 송년회 가면 쓰러질 때까지 마시고 줄을 쳐서 문밖에 나가서 집 마당 앞에서 오줌을 누고 거뜬하게 들어와서 또 마시고 마지막에 정신을 못 차리면 술상 옆에 쓰러져 자고 그리고 아직 좀 더 놀아야겠다 싶은 사람들은 방안에 모여서 오락회를 하고 노래방에도 갈 필요가 없지 않아요? 집에서 송년회를 하면 취하면 그 자리에서 뻗어 자도 되고... 한국에선 술 마시고 집까지 가야하는데 싫죠. 그리고 재밌는 일도 많습니다. 이맘 땐 술에 취한 사람이 많아서 항상 보안원들이 순찰을 돕니다. 취해 길에서 쓰러진 사람은 얼어 죽으니까 보안원들이 발견해 역전 안에라도 막 끌어다 놓습니다. 그 때보면 이미 장갑이며 신발은 다 사라졌죠. 지어는 동복까지 좋으면 다 벗겨가요. (웃음) 송년회를 치르면 그런 얘기들 정말 많죠...

진행자 : 송년회를 치르면서 1년 치 놀림거리를 만드시는군요.

문성휘 : 그렇죠! (웃음)

박소연 : 우린 송년회를 하면 항상 남자들이랑 싸워요. 송년회 준비로 남자, 여자가 토론을 하거든요. 한 사람당 얼마씩 걷어 콩나물, 고기 등등 사자... 근데 남자들은 술만 많이 사라고 하니까 화가 발끈합니다. 야, 우리 입은 입이 아니냐! 그럼 남자들이 그럽니다. 여자들은 씰로스(러시아 말로 풀김치)라도 배부르지만 남자들은 술을 마셔야한다... 북한 여자들이 악담이 우세하잖아요. 그래서 송년회 안 하겠다 막 그러면 여자들 입 막을라고 사탕이나 과자 한 킬로씩을 따로 챙겨줍니다. 그래도 술값의 절반도 안 들어가는 거라 너무 공평치 못해요.

문성휘 : 남자들은 될수록 술이 많아야 해요. 어쩌다 마시는 거라 진짜 쓰러져서 일어 못 날 때까지 마셔야 하거든요. 그게 송년회 목표예요.

진행자 : 여자들은 망년회가 그렇게 재밌을 것 같진 않은데요.

박소연 : 저희 집에서 한번 망년회 했는데 사발에 이가 다 나갔어요. 남자들이 술만 먹으면 쇠 젓가락으로 밥사발, 국 사발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러요. 그래서 엄마가 다시는 우리 집에서 망년회 하지 말라고 했어요.

진행자 : 남쪽도 합니다... 두만강 푸른 물에... (웃음)

문성휘 : 대신 편하잖아요. 그 자리에 앉아 쓰러져 잘 수도 있고 방에 들어가서 놀 수도 있고 문만 열면 대(大) 노천 화장실이니 화장실도 문제없어요.

진행자 : 근데 북쪽은 같은 직장이면 다 걸어갈 수 있는 거리, 근처 살지만 남쪽은 평균 한 시간, 한 시간 이상씩 통근하는 사람도 있고 집이 다들 얼마나 멀어요.

박소연 : 택시가 있잖아요.

진행자 : 12월 말에 모임이 많을 때는 택시 잡기도 힘들고 밤에는 더 비쌉니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편하자고 회사 근처 식당을 잡는 거죠.

박소연 : 이번에 남한에 와서 처음 송년회를 했잖아요? 북한처럼 돼지고기 부글부글 끊여서 한 사발 넘어지게 먹고 싶은데 분위기를 따지니 처음엔 좀 싫더라고요. 그리고 음식이 조금씩 들어오는데 이게 뭐야, 괜히 비싼 돈 주고... 근데 잠깐 창밖을 보니 경치가 예술이에요.

진행자 : 63빌딩이면 63층까지 있는 건물이잖아요?

박소연 : 맞아요. 59층에 있는 식당이었어요. 이래서 분위기가 중요하구나 싶지만요. 그래도 아직까지는 북한식 망년회가 좋습니다. (웃음)

문성휘 : 저도요.

박소연 : 문 기자님 말씀이 맞아요. 북한 사람들은 망년회 날 1년 목에 때를 벗긴다고 해요.

진행자 : 굉장히 중요한 자리군요.

박소연 : 너무 중요하죠. 그날 못 먹으면 안 되요.

문성휘 : 북한에 송년회, 술과 관련된 유머 정말 많아요. 여기는 화장실이 가는 곳마다 다 따로 있는데 북한은 공동변소에 겨울에 변을 보면 얼어서 봉우리를 이룬다고 금강산이라고 해요.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간다는 게 변소문 앞에 신발을 착착 벗어두고 들어가 금강산을 끌어안고 잤대요. (웃음) 그런 식의 너무 끔찍한 얘기들 많아요. 그게 북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전혀 거리낌 없는 우스개 소리거든요.

박소연 : 남한엔 비슷한 현상 없어요?

진행자 : 사실 많죠. 예전에는 송년회 모임이라는 게 요란했는데 그리고 제일 중요한건 경기가 안 좋은 탓도 있는 것 같아요. 옛날에 경기가 호황일 때는 술집들이 모여 있는 유흥가는 진짜 엄청 났었어요. 사람들이 도로 중간까지 나와서 택시를 잡았어요. 요즘엔 상당히 자제하는 분위기인데 전반적인 경제에 대한 걱정도 한 몫 하는 것 같아요

문성휘 : 경제 불황의 여파군요...

박소연 : 북한 남자들은 술만 많이 먹으면 속 타는 소리(속에 있는 얘기)가 시작돼요. 남한 말로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이 끝이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마지막엔 꼭 많이 싸워요.

문성휘 : 대체로 송년회 날 많이 싸워요. 북한말로 술 마시면 용기가 나는 걸 용도끼를 낸다고 해요. 그렇게 주먹질까지 하고 나면 풀리는 게 있어요. 그리고 싸우지 않아도 내 속 타는 소리를 할 수 있어요. 나 너한테 진짜 노엽다 하면 스스럼없이 받아들이기도 해요. 내 앞으론 안 그럴게 너도 이런 걸 고쳐라.. 생활총화에선 거짓말 총화를 해도 그땐 진짜 생활총화가 되는 거죠. 그렇게 많이 화해분위기가 조성 되요.

진행자 : 듣다보니까 그런 망년회 자리도 괜찮을 것 같네요.

문성휘 : 네, 진짜요.

박소연 : 저도 진짜 그리워요.

술도 많이 마시고 한 해 동안 쌓였던 속에 있는 얘기도 탈탈 털어버리고 그러면서 주먹질도 하지만 결국은 잊고 다음 해를 다시 시작하게 하는 북쪽의 뜨거운 송년회를 생각하면 남쪽이 참 차갑게 느껴지기도 할 것 같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 올해 송년회는 무사히 잘 보내셨습니까?

이제 달력이 넘어가면 남한 정착 2년째를 맞는 소연 씨... 올해 송년회를 보내면서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다 잊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답니다. 그만큼 너무 많이 일이 있었다는 건데요. 이 얘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가야겠습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은 여기까집니다. 청취자 여러분,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