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무산 출신 박소연 씨는 2011년 11월, 남한에 도착해 올해 남한 생활 4년 차를 맞고 있습니다. 2012년 아들을 데려와 혼자서 키우는 열혈 '워킹맘' 그러니까 일하는 엄마입니다.
<세상 밖으로> 이 시간엔 남한 정착 9년차, 자강도 출신 탈북 기자 문성휘 씨와 함께 박소연 씨의 남한 적응기를 하나하나 따라 가봅니다.
INS - 일도 많고 웃기도 했지만 많이 울었고...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의 결론은 나를 웃고, 울고 하는 건 결국 나한테 달렸다. 환경이 아니다...
소연 씨가 굉장히 철학적인 얘기를 했네요. 출처는 분명치 않지만 이런 말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모두 내 마음에 있다.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달력이 달랑 한 장 남았네요. 빠르게 지나간 올 한 해, 2015년 마무리해봅니다.
진행자 :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습니까?
박소연 : 안녕하세요.
문성휘 : 변함없이 잘 지냈습니다. 근데 날씨가 엄청 추워졌습니다. 오늘은 출근하다가 집에 다시 돌아가서 옷을 바꿔 입고 나왔습니다.
진행자 : 그래요. 날씨가 많이 추워졌습니다. 두꺼운 동복 잘 입으셨네요.
문성휘 : 그런데 제가 보니까 이게 영양 관계인지 모르겠는데 북한에서 제일 추운 지방에 있다 온 우리 같은 사람들이 더 추위를 타요. 남한 사람들보다 더 추워하거든요.
박소연 : 동감합니다!
진행자 : 북쪽에서 저 윗동네는 겨울이면 영하 20도까지 내려가지 않나요?
문성휘 : 그러니까 말입니다. 서울이면 겨울에도 비가 오는 날이 많다고 해서 끄떡없겠다 했는데 웬걸... 조그마한 추위에도 못 견딥니다. (웃음)
박소연 : 저도 그런데... 저는 헛가다 때문에 그러죠. 북한에 겨울 식재 얼어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제가 딱 그 경우입니다. (웃음) 여기는 겨울옷도 허리가 들어가고 아주 맵시 나게 입습니다. 북쪽에선 다들 장사를 하니까 겨울엔 옷을 일곱 개, 여덟 개 껴입고 꼭 곰이 걸어 다니는 것처럼 입어요. 이렇게 옷을 많이 입었으니 그나마 추위를 덜 느꼈는데 남한에 와보니까 다들 긴 양말, 걸개바지를 입고 다녀요. 저도 빠지기 싫더라고요. 그러니까 저는 식 내다 얼어 죽는 셈이죠. (웃음)
문성휘 : 아,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그렇게 식을 내면서도 우리보다 추위를 덜 탄다니까요!
박소연 : 맞아! 전혀 안 타요!
문성휘 : 그러니까 이게... 어렸을 때부터 잘 먹어야 돼!
박소연 : 내 말이 그 말이에요! 공감합니다. 남한 사람들은 몸이 든든하다는데요.
진행자 : 이건 제가 공감을 못 하겠습니다. (웃음) 그것도 다 사람 나름이죠. 저는 추위 엄청 탑니다.
박소연 : 전체적으로 북쪽에서 온 우리들보다 훨씬 덜 탄다는데요...
진행자 : 어쨌든 남쪽도 겨울은, 춥습니다!
박소연 : 겨울은 겨울이에요. (웃음)
진행자 : 이제 남쪽도 김장을 거의 다 했고... 한 해를 마무리하는 그런 때인데요. 어떠셨습니까? 올 한 해...
박소연 : 저는 올 한 해... 아, 그런데 제가 이 얘기를 하기 전에 이 얘기를 먼저 하고 싶어요. 그래도 여기 온 덕에 이런 생각을 해보는구나 싶네요. 여자들은 이 맘 때엔 여맹 결산 때문에 밀린 돈을 계산하고 겨울 날 준비를 해야 하고... 근심도 많고 힘든 시간인데 남한에서 이 맘 땐 자연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요. 내가 이러 이러한 일이 있었고 그런 일들을 어떻게 겪고 넘어갔구나. 참, 잘 보냈다...
진행자 : 한 해를 뒤돌아볼 시간이라도 생긴다 이 말씀인가요?
박소연 : 네, 그리고 다음 해엔 어떻게 바꿔야 하겠다는 생각도 할 수 있는 것이 행복한 일입니다.
진행자 : 그래서 올 한 해는 어떠셨어요?
박소연 : 일도 많고 웃기도 했지만 많이 울었고... 여러 가지 일이 있었지만 지금의 결론은 나를 웃고, 울고 하는 건 결국 나한테 달렸다. 환경이 아니다. 올 한 해 깨달은 겁니다. 철 들었죠? (웃음)
진행자 : 제가 아는 것만도 소연 씨가 허리도 아프고 아들도 수술하고 일이 많았죠?
박소연 : 그랬죠. 저는 북한에서 떠나올 때는 그랬어요. 남조선에 가면 남한 사람들이 우리한테 고급 승용차 주고 고급 빌딩 주고, 색안경 쓰고 놀러 다닐 줄 알았습니다. 이제 제가 남한에 온지 햇수로 4년, 정확하게는 3년 6개월 입니다. 지나고 보니 그런 생각을 했던 내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내가 사는 방식은 똑같다, 환경이 변했을 뿐이라는 걸 올해서야 깨달았네요. 내년부터는 여기는 환경이 좋으니까 열심히 노력하며 살면 되고 대신 환상은 버려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진행자 : 소연 씨만 해도 2010년 이후 북한을 떠나지 않았나요? 알만큼 알고 오셨다고 생각했는데요. 남한에 대한 환상이 있었습니까?
문성휘 : 솔직히 환상이 없다면 남한에 왜 오겠어요? (웃음) 환상은 참 대단했어요. 남한에 오면 별천지에 살 것 같은 생각이요. 북한에서 남한 드라마도 보고 남한에 대한 얘기를 하는 것 보면 딱 북한에서 선전하는 공산주의처럼 생각합니다. 잘 먹고 잘 살고 일도 안 하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여행만 다니고.
진행자 : 자본주의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웃음)
문성휘 : 남한 드라마를 보면 그런 장면만 나오거든요. (웃음) 할 일이 없어서 사랑싸움을 하고 말이에욧!
박소연 : 맞습니다!
문성휘 : 그러니까 우리도 저 땅에 가면 저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죠.
진행자 : 드라마로 현실을 배우면 이렇게 되는 군요.
문성휘 : 맞죠. 그러다가 중국에 나가면 사람이 사는 세상은 어딜 가나 일을 하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느끼죠. 한국에 와보니까 또 중국에서 듣던 것처럼 험하진 않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욕을 합니다.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깍쟁이들인지 사과도 하나를 통째로 먹는 법이 없고 사과를 조각조각 내서 이쑤시개로 집어 먹는다고... 와보니까 집에 손님이 왔는데 통째로 주는 법은 없고 집 식구들도 사과 하나를 다 못 먹게 되더라고요. (웃음)
진행자 : 그 장면이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군요.
박소연 : 저는 남한에 와서 제일 좋은 게 인권이 있어 좋아요. 저는 인권이라는 게 굉장히 거창한 것인 줄 알았는데 상사에게 불만을 제기하는 것도 인권이래요. 근데 너무 좋아요. 북쪽 같으면 하늘같은 높은 사람에게 어떻게 말을 해요. 아르바이트로 시간제 일 할 때도 정직원이 아르바이트생에게 일을 더 시킨다고 막 항의를 했습니다. 그걸 말할 수 있다는 게, 내가 부정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문성휘 : 아주 나쁜 것도 있습니다. 며칠 전에 날을 잡고 아들 데려다 놓고 혼을 냈습니다. 이제 제 아들, 딸 또래를 키워보시면 알게 됩니다. 정말 아이들 하는 것이 다 거슬립니다. 맞는 것 같지 않고요. 그래서 벼르다가 정말 이렇게 살 것이냐 막 혼을 냈는데 글쎄... 누가 문을 두드려 나가보니 경찰이 왔습니다. (웃음) 위층이나 옆집이나... 하여튼 어느 집에서인가 신고를 했답니다.
진행자 : 싸우는 것 같아서 신고를 한 것이군요.
문성휘 : 네, 경찰이 와서 다짜고짜 경찰서로 가자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아들을 교육 시키는 중이었다, 잘 못 된 것인가? 그랬더니... 이렇게 교육하시는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교육하시면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소란스럽고 자식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나? 그리고 이렇게 나가다간 자칫 폭력으로 번질 수 있으니 아들하고 잠시 떨어지는 게 좋을 것 같다...
진행자 : 그렇게까지 얘기합니까?
문성휘 : 그렇더라고요. 접근금지 가처분이라고 하던가? 하여튼 그런 것 비슷했습니다...
박소연 : 경찰이 너무 한 것 아닌가요?
진행자 : 그런데 얘기를 듣고 보니 그날 상당히 하셨나 봅니다. 주변에서 걱정이 돼서 신고할 정도였으면요. (웃음)
문성휘 : 우리 북한 사람 워낙 목소리가 크지 않습니까? 그리고 제가 여기서 아이를 때리겠어요? 뭐하겠어요? 그냥 목소리만 계속 커졌던 것이죠.
박소연 : 아버지는 혼낼 수 있지만 아들아이가 아버지에게 소리치면 안 되지 않나요?
문성휘 : 아니, 아들은 한 마디도 안 하고 소 잡아먹은 귀신처럼 입을 닫아서 제가 더 화가 났던 것이고요. 머리를 숙이고 아무 말도 안하고 있으면 잘 못 했다는 건지, 잘 했다는 건지 모르지 않습니까? 어쨌든 저를 조금 떼어놓고 있다가 조금 후 아이를 차에 태워서 가서 깜짝 놀랐습니다.
박소연 : 큰일 났구나...
문성휘 : 왜 데려가느냐 했더니 걱정 마시라, 오늘 밤은 떨어져 계시는 게 좋을 것 같다. 우리 집 아주 가까이에 쉼터라는 게 있더라고요. 거기서 상담사와 상담을 했고 상담사가 편히 자라고, 내일 아버님 화가 내려가시면 그 때 집에 가라고 해서 하룻밤 잘 자고 왔다고 하네요. (웃음)
박소연 : 연말에 뜻 깊은 일이 있으셨군요. (웃음)
문성휘 : 그러게 말입니다. (웃음)
박소연 : 저는 올 한 해를 총화 지으면서 제일 큰 사건은... 아들이 수술 한 것. 그리고 북중 국경에서 고향을 보고 온 것. 북한 주민들은 잘 모를 수 있는데요. 천주교라고... 임수경이 왔을 때 문규현 신부가 있는 종교가 천주교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이렇게 설명해야 아실 겁니다. 천주교 신자로 처음으로 판공성사를 받았습니다.
진행자 : 중국에 다녀오셨죠?
박소연 : 네, 고향 집 지붕을 보고 왔습니다. 제가 얼마나, 어떻게 울었는지 기억이 잘 안나요. 막 몸부림을 쳤던 것 같습니다. 고향 건너편 땅에서 절을 하고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저 앞에 보이는 저 골목길로 가면 15분이면 우리 집 가는데 대문 열고 아버지, 어머니 얼굴만 보고 나오겠다. 그러면 당신네들이 여기 기다렸다가 받아 달라... 그러면서 제가 하여튼 추태를 부렸죠...(웃음) 같이 다녀오신 분들을 며칠 전에 만났는데 한 여자 분이 충격을 받으셨더라고요. 그걸 보고 같이 울어서 눈 혈관이 다 터졌었다고. 저는 제가 하도 울어서 옆에 분들도 그리 울었는지 전혀 몰랐네요... 그리고 며칠 전에 판공성사도 받았습니다. 또 울었어요. 그런데 왜 울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죽을 데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해를 총회를 짓는 것인데 말을 주섬주섬 섬기면서 제가 제 마음을 다스릴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 힘을 좀 주세요... 그랬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우는 것으로 올해는 마쳤습니다... 울보죠? (웃음)
진행자 : 중국은 어떻게 가신 겁니까?
박소연 : 어느 한 단체에서 북-중 국경 답사가 있었는데 답사 노정에 무산 건너편을 지난다고... 아시는 분이 가이드, 안내원 역할로 소개해주셨어요. 그런데 저희 일행이 한 20명이 됐는데 중국 공항에서 저만 잡혔습니다. 20분 있다가 다시 여권을 돌려주긴 했는데 망설여지더라고요. 남한으로 돌아올까? 그래도 고향을 보고 싶어서 떨려도 갔습니다.
진행자 : 강에서 고향이 보입니까?
박소연 : 아... 보입니다. 단둥은 건너편이 신의주니까 거기가 북한 땅이구나... 마음이 심란한 정도였는데요. 무산 산줄기가 나타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우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것이 막 배속에서 끓어올랐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질 못했어요. 너무 울어서. 중국 땅에도 북한 보위부가 깔렸는데 거기서 괜히 내려섰다가 일이 날까봐 다들 제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 주셨어요. 그리고 내려서는 제가 고향을 볼 수 있게, 땅에 절 할 수 있게 저를 가려주셨어요... 그렇게 떠나와 그래도 무사히 다녀왔고요...
모든 상처의 가장 좋은 약은 세월이라고 했는데 고향을 떠나온 아픔, 가족과 떨어져 만날 수 없는 이산의 아픔은 세월이 갈수록 더하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소연 씨는 마음을 바꾸기로 했답니다.
고향을 코앞에 두고 못 가서 가슴 아프다가 아니라 고향을 멀리서라도 볼 수 있어서 감사하다... 우는 시간에 힘을 내서 한 푼이라도 모아 고향에 보내겠다는 현실적인 결심도 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은 2015년 어떠셨습니까?
<탈북자 박소연의 세상 밖으로>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지만 2015년을 돌아보는 두 사람의 얘기는 다음 시간에도 계속됩니다. 청취자 여러분도 저희와 함께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 뵙죠. 지금까지 진행에 이현주 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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