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안녕하세요. <통일로 가는길>의 노재완입니다.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이 중요하듯 국가도 마찬가집니다. 지도자의 능력에 따라 나라 흥망이 결정됩니다. 얼마 전 독일 통일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바이체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통일을 위해 헌신했던 그의 노력과 열정은 지금도 독일인의 가슴 속에 식지 않고 남아 있는데요. 한반도 통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오늘 <통일로 가는길>에서는 바이체커 독일 전 대통령의 통일철학에 대해서 알아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번은 반드시 죽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변치 않는 진리입니다. 모두가 소중한 생명이지만, 위대한 사람들의 죽음은 더 안타까울 수밖에 없는데요. 지난 1월 31일에는 나치에 대한 책임과 반성을 촉구해 '독일의 양심'이라는 불리던 리하르트 폰 바이체커 전 독일 대통령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통일 독일의 초대 대통령을 지낸 바이체커는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을 선포하는 연설에서 "통합하는 것은 나눔을 배우는 것"이라면서 통일 후 서독 국민의 고통 분담을 요구했습니다.
바이체커가 통일의 기반을 다진 것은 198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서베를린 시장을 역임하면서 동독 정치인과 활발하게 교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국민 통합을 잘 이끌어 좌우파 모두로부터 신망을 얻었습니다. 바이체커의 사망 소식에 지금 세계는 애도하고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독일의 전 대통령이 아니라, '독일 통일의 아버지'였고, 그리고 더 나아가 '참 정치가'였기 때문입니다. 바이체커는 한국과의 인연도 깊습니다.
김광인 코리아선진화연대 소장: 1970~80년대에는 독일 지식인들과 함께 김대중 전 대통령 구명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등 한국의 민주화를 지원했습니다. 또 2000년대에는 독일 정부를 대표해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또 한국의 통일정책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 조언을 했는데요. 특히 북한 핵무기를 비판하는 등 우리 한반도 문제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습니다.
바이체커는 1920년 독일 귀족 집안의 후손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집안에서는 그뿐만 아니라 형과 동생도 정치활동을 했습니다. 바이체커는 괴팅겐 대학에서 법학과 역사학을 공부했고, 옥스퍼드 대학과 그로노블 대학에서도 공부했습니다. 1969년 연방의회 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으로 정치계에 입문한 바이체커는 연방의회 부의장, 베를린 시장을 거쳐 1984년 7월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이후 10년 동안 대통령직에 있으면서 독일 통일을 이루어냈습니다.
바이체커: 통일은 독일인 모두의 가장 소중한 바람이었습니다. 통일 전부터 자주 동독을 방문했는데요. 그곳에서는 민주적 권리를 찾고자 하는 주민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독에서 민주적 권리 쟁취가 가능할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11월 9일 독일, 특히 베를린에서 벌어진 일을 함께 경험한 사람에게 이 날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바이체커는 1985년 5월 8일 독일 패전 40주년이 되는 날, 정부와 각계 지도층 인사들이 모인 국회에서 '광야 40년'이라는 제목으로 기념연설을 했습니다. "오늘은 독일의 패전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슬픈 날이지만, 우리 독일민족이 히틀러 정권에서 해방된 날이다"로 시작되는 이 연설은 20여 개국에 번역됐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바이체커는 말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히틀러 정권의 최초의 피해국이 뽈스카(폴란드)였는데, 그가 대통령이 되어서 가장 먼저 한 일이 뽈스카를 방문한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뽈스카에서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접받으려고 간 것이 아니라, 뽈스카 국민에게 사과하러 간 것이었기에 뽈스카 국민들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바이체커의 이러한 행동은 결국 지금 독일이 유럽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가질 수 있도록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체커는 진정한 지도자였습니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 예는 반대당인 빌리 브란트가 수상이 되어서 이른바 '동방정책'이라는 것을 국회에 내놓았을 때였습니다. 야당인 바이체커가 속한 기독교민주동맹에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그것을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바이체커만이 민족문제를 먼저 생각해서 빌리 브란트를 지지했습니다. 그 일로 기민당은 바이체커를 협박하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며 회유책을 썼지만, 그는 끝까지 빌리 브란트를 지지하여 동방정책이 인준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결국 이 동방정책이 독일이 통일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 동서독이 통일되었을 때였습니다. 같은 정당에 속하면서도 콜 수상과 의견이 달랐던 바이체커는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바이체커: 동서독이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흡수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동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주고, 동포로서 대하는 것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헌법도 동독 사람들이 동의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동독 사람들을 못한다고 무시하거나 급이 낮은 국민으로 대하면 안 됩니다. 동독의 어려운 경제를 돕는 것도 정부가 정치적으로 해결하지 말고, 서독민의 애국심, 동포애로 해결하도록 해야 합니다.
바이체커는 정부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디까지나 국민적 공감대 위에 통일을 이루려 했습니다. 독일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성취하기까지 지도자로서 그가 지켜오고 실천해온 정치철학과 행동에서 한반도 통일에 도움이 있으리라고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 한반도에 있어 통일은 어떤 의미일까요? 남한의 경우 과거에는 통일을 정치적 관점에서만 생각했습니다만, 지금은 오히려 경제적 관점에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어쩌면 통일은 남북 모두가 살아남기 위한 마지막 희망의 끈인지도 모릅니다.
지금 북한은 무척 다급합니다. 인민생활은 엉망이 됐고, 주변 상황은 북한에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경제제재에다 최근엔 혈맹국인 중국마저 등을 돌렸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유엔 북한인권 결의안으로 어려움이 가중된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사면초가에 몰렸습니다. 그러다 보니 북한은 남한에서 '통일'이라고 하면 무조건 흡수통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김광인 코리아선진화연대 소장: 독일 통일과정에서 바이체커 전 대통령이 동독 주민들의 처지와 안위를 깊이 고려했던 것처럼 우리 한반도의 통일도 2천만 북한 동포들의 처지와 그들의 안위와 상황을 깊이 이해하고, 그들이 바라는 것을 해결해야 하는 방향으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한반도 통일은 남쪽이 북쪽을 먹거나 북쪽이 남쪽을 먹는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7천만 겨레가 하나가 되고 그렇게 해서 우리 민족이 미래로 세계로 나아가는 통일이 돼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1945년 광복과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이를 두고 미소 냉전 대립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탈냉전으로 남쪽은 민주화로 인해 많이 변했지만, 북한은 3대에 걸쳐 권력세습을 이뤘습니다. 세습은 공산주의 종주국이었던 소련과 중국에서도 없었던 일입니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이런 3대 세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김정은 북한 정권은 지금도 적대적 남북관계를 통해 내부체제 공고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전쟁에 대한 공포, 남북의 대결구조는 북한 주민들을 정권에 순종시키는 중요한 통치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북한은 주기적으로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를 했습니다. 북한이 2년 전 핵과 경제발전 병진노선을 밝히자 남한의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통일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켜 통일의 분위기를 형성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 무엇보다 한반도 통일이 동북아의 경제적 이익을 가져올 뿐 아니라, 주변 국가의 안보적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점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국제사회의 지지와 신뢰 속에 통일을 이룰 수 있고, 통일한국은 이웃 나라들과 어울리면서 함께 발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이후 통일문제와 관련해 줄곧 신뢰를 강조해왔습니다. 신뢰는 원래 한발 양보하고,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는 게 기본 조건입니다. 챙길 것 다 챙기면 믿음의 싹은 트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어내기 위해선 무엇보다 사과와 용서가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통일로 가는길>, 오늘 순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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