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여러분, 안녕하세요. <통일로 가는길>의 노재완입니다. 지난 6일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올림픽 개회식이 있었습니다. 분단국가인 한국과 북한이 이번에도 개회식에서 공동입장을 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는데요. 이번 주 <통일로 가는길>에서는 올림픽 남북한 공동입장의 추억을 떠올려 봅니다.
지난 8월 6일 미국의 한 매체가 2016년 리우올림픽 개막을 맞아 올림픽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 20개를 선정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매체는 2000년 시드니올림픽 개회식 때 남북 선수단이 공동 입장한 것이 올림픽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 중 하나라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번 리우올림픽 개회식에서는 남북이 각자 입장하면서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김광인 코리아선진화연대 소장: 해외에 나가게 되면 우리가 동포애를 더 많이 느끼게 되는데요. 기왕이면 올림픽 단일팀을 구성해서 나갔으면 좋았을 텐데.. 하다못해 손을 잡고 함께 입장했더라면 세계적인 감동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남북관계 경색으로 그런 논의조차 하지 못하고 각자가 따로 들어가는 아쉬운 장면을 연출하고 말았습니다.
2000년 9월 10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에서 열린 제111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기조연설에 나선 사마란치 IOC 위원장이 남북한이 시드니올림픽 개회식에 동시에 입장한다고 공식 발표합니다. 사마란치 위원장은 남북한 올림픽위원회가 한반도기를 들고 동시에 입장하기로 합의했으며 IOC가 이를 승인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 총회에 참석했던 남측 김운용 IOC 위원과 북측 장웅 IOC 위원의 말을 차례로 들어보시겠습니다.
남측 김운용 IOC 위원: 역사적으로 처음 들어간다는 게 중요한 거고..
북측 장웅 IOC 위원: 6.15공동선언 정신에 맞게 우리 체육에서도 해 나가야 않겠는가..
그리고 닷새 후, 남북한 선수단은 시드니 올림픽주경기장에서 열린 개회식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냅니다. 남북한 선수단 180명은 흰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가 그려진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200개 참가국 중 96번째로 입장했습니다. 남북 선수단은 북한의 박정철 유도 감독과 남한 여자농구 정은순 선수를 공동 기수로 앞세워 입장했는데요. 경기장을 찾은 12만여 관중들은 기립박수로 ‘코리아’의 입장에 환호를 보내주었습니다.
(올림픽 개회식 중계 현장음)
당시 텔레비전을 통해 남북한 선수단의 공동입장을 보던 한국 국민들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분단 뒤 47년 만에 이뤄진 역사적이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전 세계인 앞에 한민족의 저력을 보여줬다고 볼 수 있는데요. 당시 기수를 맡았던 정은순 씨는 “개회식이 진행되는 동안 감격에 겨워 경기장 안에서 눈물을 닦던 주위 남북 선수들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했다”고 회고했습니다.
정은순: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서 입장이 끝날 때까지 박수를 쳤어요. 입장을 마치고 왔더니 어르신들이 울고 계셨어요.
평화롭게만 보였던 공동입장이지만 올림픽 개막 순간까지 준비 과정은 숨 가빴습니다. 남북한 공동입장은 시드니 현지에서 결정됐기 때문에 단복 맞추는 것도 급하게 이뤄졌고, 기수도 뒤늦게 결정됐습니다. 남북 화해의 분위기 속에도 묘한 신경전이 있었습니다. 특히 선수단 고위 관계자는 한반도기를 잡을 때 북한의 남자 기수보다 손이 아래로 가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화합을 위한 올림픽 공동 입장에서도 보이지 않는 경쟁심이 작용했던 겁니다.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 남북한은 단일팀 구성과 공동 입장 등 합의하는 과정에서 문구 하나 갖고도 며칠 밤을 새우고 또 몇 번에 걸쳐서 정정하고 그렇습니다. 정말 까다롭고 어려운 작업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공동입장이라든지 단일팀 구성이 성사되는 겁니다. 화합이 그 목적이지만 사실은 그 뒤에는 경쟁이 자리 잡고 있는 겁니다.
시드니올림픽 이후에도 남북은 여러 국제대회에서 함께 입장했습니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 때도 어깨와 어깨를 맞대고 평화의 행진을 펼쳤습니다. 2000년부터 시작하여 10번에 걸쳐 진행됐는데요. 그러나 국제대회에서 남북한의 공동입장은 2008년 베이징올림픽 때부터 사라졌습니다.
당시 남북은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단일팀을 추진했지만 선수 구성 문제로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이어 북한의 핵실험 등이 터지면서 결국 무산됐습니다.
MBC 뉴스보도(2006.10.10): 북한의 핵실험은 남북 스포츠 교류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급물살을 타던 2008년 베이징올림픽 단일팀 구성도 불투명해졌습니다.
남북 단일팀 구성이 무산되고 공식적인 남북공동 응원도 이뤄지지 않았지만 경기장에서는 남과 북의 한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한국에서 온 응원단이 북한 경기가 있을 때마다 찾아가 북한 선수들을 힘차게 응원했습니다. 북한 응원단도 끝까지 선수들을 응원해준 남한 동포들에게 감사함을 표했는데요.
북한 응원단: 저것이 유일팀 깃발이니까 북과 남이 하나로 유일팀으로 나갈 때 들었던 깃발 아닙니까. 분명 우리 동포라고 생각합니다. 북과 남이 다 열심히 응원하니까 분명 이긴단 말입니다. 저쪽에서 우리 북조선이 이기라고 응원하니까 우리도 좋고 어쨌든 우리는 한민족입니다.
올림픽을 통해 남북이 하나 되는 노력은 분단 이후 지속적으로 이뤄져 왔습니다. 그 시작은 1963년 도쿄올림픽 남북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이었습니다. 이 회담에서는 공동기와 공동국가, 선수 선발문제 등이 논의됐는데요. 회담 진행 과정 중 양측의 입장 차이로 결렬됐습니다. 이 회담은 비록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후에 남북 체육교류의 기본틀을 제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던 1972년, 뮌헨올림픽을 앞두고도 북한이 단일팀 구성을 제의했지만 결실을 맺는데는 실패했습니다. 이어 1984년 LA올림픽을 앞두고는 남한에서 단일팀 구성뿐만이 아닌 교환경기 개최, 국제체육 행사의 상호초청, 체육인 상호왕래 등을 함께 논의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냉전체제에서 동구권의 LA올림픽 불참 결정에 북한이 동조하면서 단일팀 논의도 중단됐습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대회 때는 분산개최 등이 논의되는 등 4차에 걸쳐 회담이 진행됐으나 역시 서로에 대한 신뢰 부족과 정치적 입장 차이로 인해 회담이 결렬됐습니다.
김경성 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 사실 남북한의 체육 실무회담은 1960년대부터 꾸준히 있었습니다. 올림픽 등 국제 체육행사가 있을 때마다 이뤄졌는데요. 그러나 그때 당시에는 남북 간의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안돼서 회담으로만 끝났습니다.
올림픽 공동입장에 앞서 남북은 단일팀을 구성하기도 했는데요. 1991년 탁구 단일팀과 청소년 축구 단일팀입니다. 특히 탁구 단일팀의 경우 여자탁구에서 중국을 이겨 우승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청소년 축구 단일팀은 강호 아르헨티나를 꺾는 파란을 일으키며 세계 8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는데요. 그때도 한반도기가 단일팀을 상징했습니다.
(91년 세계청소년 축구대회 경기 중계 현장음)
조인철 북측 선수: 저는 제가 골을 넣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북과 남의 축구 선수들이 힘을 모아서 달리고 또 달렸기 때문에 이긴 것이지 제가 잘해서 이겼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당분간 남북관계가 호전될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또 정치라는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좋아질 수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그 첫 시도는 늘 체육 분야에서 이뤄졌습니다. 91년 탁구 단일팀 남측의 현정화 선수의 얘기를 들어보시겠습니다.
현정화: 스포츠는 서로 간에 이기고 지고 하는 것이지만 이권은 없어요. 우리가 승패를 통해 나중에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스포츠 현장에서 일어나는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 빨리 스포츠 교류가 이뤄져야 한다고 저는 생각해요.
남북은 그동안 체육교류를 통해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순간들을 연출해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체육교류는 남북을 화합의 장으로 만들었는데요. 때로는 얼어붙은 남북관계를 푸는 돌파구로, 때로는 남북관계를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수행해왔습니다. 2년 뒤 열릴 한국의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는 손을 잡고 남북한 선수들의 공동입장이 이뤄지길 기대해 봅니다. <통일로 가는길>, 오늘 순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