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안녕하세요. <통일로 가는길>의 노재완입니다. '남남북녀'라는 말이 있듯이 이번 인천 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축구는 남측이 여자축구는 북측이 각각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물론 남녀 축구 모두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며, 누가 이겨도 이상할 게 없는 그런 경기 내용이었습니다. 남측 국민들은 모처럼 치러진 남북대결을 바라보며 가슴을 졸이기도 했고, 결과에 환호하고 서로를 격려하기도 했는데요. 이번 주 <통일로 가는길>에서는 남북 축구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오 통일 코리아~! 오 통일 코리아~!”
지난 2일 인천 아시아경기대회 남자 축구 결승전. 한국과 북한이 결승전에서 맞붙었습니다. 전후반 90분 동안 열심히 뛰었지만, 두 팀 모두 득점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선수들에게 있어 남북대결은 늘 부담되는 경기입니다.
이날 경기는 남측이 약간 우세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막상막하였습니다. 남측 선수들이 북측의 철통 같은 방어를 뚫지 못한 겁니다. 경기는 승부차기까지 갈 것으로 예상했지만, 연장 후반 종료 직전에 남측이 천금 같은 골을 넣으며 기나긴 승부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비록 운동장에서는 한 치 양보 없는 경기가 펼쳐졌지만 관중석만큼은 하나였습니다. 남이건 북이건 멋진 모습이 나오면 박수로 격려하고, ‘대한민국’ 대신 ‘통일조국’을 구호로 두 팀에 힘을 실어줬습니다. 선수들도 넘어진 상대팀 선수를 일으켜 세워주며 우애를 과시했습니다.
경기 종료 후 북측 선수들은 남쪽 응원단 쪽으로 와서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이때 관중석에서는 “우리는 하나다” 목소리가 더 높이 울려 퍼졌습니다. 축구 경기장 안은 자연스럽게 통일이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관람객 : 이것이 비록 하나의 경기라고 하더라도 두 팀으로 나뉘어 승부를 내야만 하는 것이 아쉬운 일이고요. 지금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국이 우리나라 아닙니까. 하루라도 빨리 통일이 되어서 정말 단일팀을 갖고 세계인과 경기를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지금처럼 대한민국이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니 하는 다른 국호를 갖고 이렇게 승부를 겨룬다는 게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지난 4일 아시아경기대회 폐막식이 열리던 날, 북한에서는 황병서 군 총정치국장 등 최고위급 인사 3명이 인천을 방문해 남측 고위급 인사들을 만났는데요. 고위급 인사들의 첫인사도 축구 얘기였습니다.
김양건 대남 비서 :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이번 인천아시안 경기 대회는 우리 조선 민족의 명예와 힘을 세계에 과시한 아주 뜻깊은 대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최룡해 근로단체 비서 : 모든 부분에서 체육인이 대규모 선수단이 거의 20일 이상 온 것으로 보나, 또 인민들이 사심없는 응원으로 보나, TV로 보니까 구호도 부르고 통일기도 흔들며 응원하는 것을 보고 체육이 다시 말하면 조국통일에서 앞섰구나 하는 자부심을 갖게 됐습니다.
축구가 남북을 화해로 이끈 건 1990년입니다. 당시 10월 11일과 23일 두 차례에 걸쳐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열렸는데요.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체육교류였습니다. 1929년부터 남북분단 전까지 경성축구단과 평양축구단이 서로 장소를 바꿔가며 가졌던 ‘경평축구대회’를 복원하자는 의미에서 시작된 겁니다.
1990년 9월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참가를 앞두고 남측의 장충식 선수단장과 북측의 김형진 선수단장이 9월 29일 공동기자회견을 열고 ‘남북통일축구대회’를 갖기로 합의했습니다. 양측은 각각 4박 5일 동안 평양과 서울을 상호방문하여 축구경기를 가졌는데요. 당시 선수들의 축구복에는 태극기와 인공기가 아닌 한반도기가 그려졌습니다.
1차전은 1990년 10월 11일 평양 5·1경기장에서 15만 명에 이르는 관중이 운집한 가운데 열렸는데요. 이날 경기에서 북측이 2대 1로 이겼습니다. 하지만 승패는 중요치 않았습니다. 분단과 대립의 살얼음판 위에서 처절하게 벌어지던 남북간의 대결은 그 때만큼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축구를 통해 남북이 하나된 순간이었습니다.
남북 축구는 10월 23일 서울의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재회했고, 이번에는 남측이 1대 0으로 이겼습니다. 두 차례의 상호방문 경기에서 양측은 서로에게 뜨거운 응원을 보내 모두가 한 민족임을 과시했습니다.
남북 축구는 또 이산가족의 상봉도 이뤄냈습니다. 1차전 때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 감독을 지낸 남측의 이회택 감독이 고문자격으로 동행했는데요. 1966년 잉글랜드 월드컵 때 북한을 8강으로 이끌었던 북한 축구의 영웅이죠. 박두익의 주선으로 평양에서 꿈에 그리던 아버지 이용진을 만났습니다. 부자는 울음을 터트리며 40년의 한을 풀었습니다. 하지만 이들 부자는 통일만을 기약한 채 또다시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남북은 또 이듬해 제6차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단일팀을 구성해 세계 8강이라는 기적을 이뤄냈는데요. 당시 남북은 단일팀 구성에 앞서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평가전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대한뉴스 : 탁구에 이어 축구에서도 남북 단일팀이 구성됐습니다. 판문점을 거쳐 서울에 온 북측 선수들이 남측 선수와 섞여서 홍팀과 백팀으로 나뉘어 한 차례 평가전을 가졌습니다. 5월 8일 평양에서 남북의 젊은이들은 또 한 차례 평가전을 갖고 남북 양측에서 9명씩 모두 18명의 선수를 뽑아 단일팀을 구성하게 됐습니다. 남북 단일팀 구성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의 한마당이 될 수 있도록 성원해달라고 북한 관중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2000년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경평축구대회 정례화에 대해 합의를 이뤘으나, 실제로 경기는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나서 2002년 9월과 2005년 8월 남북통일축구대회가 서울 월드컵경기장에서 두 차례 열렸고, 2007년 4월에도 경남 창원종합운동장에서 남북노동자 통일축구대회가 열렸습니다.
이용득 한국노총 위원장 : 남과 북의 노동자들이 함께 하지 못하는 분단의 현실 속에서 통일을 위해서 노동자들이 함께 하면서..
하지만 2008년부터 남북관계가 냉각되면서 남북 간의 체육교류는 다시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어찌 보면 이번 인천 아시아경기대회를 통해 다시금 그 열기가 살아난 것 같습니다. 한반도기를 앞세운 관중들은 아리랑과 ‘오~ 통일 코리아~!’를 연호하며 남북대결을 통일축제로 승화시켰습니다.
김경석 세계평화교류연구소 이사장 : 저도 중국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아시안게임을 봤는데요. 경기장마다 북한을 응원하는 한국 국민들이 참 많더라고요. 그건 뭐냐 하면 경기 자체보다는 선수들을 좋아하는 한국 국민들의 따뜻한 마음이 아니겠어요.
과거 냉전시대 동서독이 체육 교류를 통해 통일의 밑거름을 만들었습니다. 동독과 서독은 1974년 체육교류에 대한 의정서를 채택한 후 체육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했습니다. 물론 남북한도 1990년 축구교류를 통해 남북교류의 기반을 마련했지만, 역시 문제는 지속성이었습니다.
<통일로 가는길>, 오늘 순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