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안녕하세요. <통일로 가는길>의 노재완입니다. 지난 7월 4일은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지 44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7.4공동성명은 분단 이후 이념 대결에 매달리던 남북이 처음으로 만나 작성한 합의 문건입니다. 그러나 7.4공동성명을 통한 평화적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남과 북 모두 7.4공동성명을 정치적으로 잠시 활용했을 뿐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7.4공동성명의 탄생 배경과 의미를 알아봅니다.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하루빨리 가져와야 한다는..."
1972년 7월 4일 오전 10시, 서울 중앙정보부 기자회견장.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습니다. 이 부장은 5월에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평양에 다녀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북한 박성철 제2부수상이 서울을 방문해 회담을 가진 사실도 공개했습니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 제가 박 대통령 각하의 뜻을 받들어 평양에 갔다 왔습니다. 갈라진 조국을 통일하는 문제를 협의하기 위한 회담이 있었습니다.
북한도 같은 시각 같은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영주 노동당 조직지도부장을 대신하여 제2 부수상 박성철이 동시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역사적인 '7.4남북공동성명'이었습니다. 7.4공동성명의 골자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입니다.
이후락 정보부장: 쌍방은 서로 상대방을 중상 비방하지 않으며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무장도발을 하지 않으며…
대한뉴스(72.7.8):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북한의 당 조직지도부장 김영주가 같이 서명한 이 공동성명은 우리나라의 자주적인 평화통일 원칙과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군사적인 충돌의 방지, 그리고 서울-평양 간 직통전화의 설치 및 운영 등 7개항에 합의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로써 남북한은 분단 27년간의 대화 없는 대결의 시대에서 대화 있는 대결의 시대로 접어들게 됐습니다.
7.4공동성명 발표는 신선함을 넘어 획기적인 일이었다. 당시 남한 사람들은 감동과 흥분에 젖었습니다. 거리의 시민들은 '해방 이후 가장 기쁜 일', '후련하고 가슴 뜨거운 보도'라며 반겼습니다. 통일의 희망도 피어났습니다. 신문마다 호외를 발행하며 '통일은 오는가', '산천도, 초목도 울었다' 등의 제목을 달았습니다.
대한뉴스(72.8.19): 7.4공동성명 지지 궐기대회 실황입니다.(만세삼창) 이북5도민회중앙연합회와 대한교육연합회 등 9개 사회단체 대표와 많은 시민은 궐기대회가 끝난 후 문산 자유의 다리 앞까지 가서 7.4공동성명이 성실히 수행될 수 있도록 북한 측에 다시 한 번 촉구했습니다.
남한 경제계도 기대가 컸습니다. 남북한의 경제협력으로 물류 산업이 성장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습니다. 정부 기관들도 앞다퉈 환영의 뜻을 내비쳤는데요.
김광인 코리아선진화연대 소장: 7.4공동성명이 발표된 직후에 남한 사회에서는 북한에 대한 용어도 달라졌습니다. 예컨대 '북괴' 대신 '북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며 북한 체제를 비방하는 것도 자제했습니다. 이는 7.4공동성명에서 '남북은 서로 비방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이를 이행하는 측면에서 나온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북방송에서도 북한을 비난하는 내용을 빼고, 때론 방송 자체를 그만두기도 했는데요. 그러나 북한은 대남방송을 계속 하는 등 약속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해외 반응도 뜨거웠습니다. 프랑스 국제 방송은 "닉슨 대통령이 베이징에서 이룬 것 같이 국제관계에 새로운 정의를 내리는 것"이라며 7.4남북공동성명을 높게 평가했는데요. 이 방송은 "우주인이 달나라에 제 1보를 내디딘 것에 비유될 만큼 한반도 통일을 위한 제 1보"라고 극찬했습니다.
7.4공동성명의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국제질서의 변화를 알아야 합니다. 1971년 키신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 극비리에 베이징을 방문하고 곧바로 그해 10월 유엔총회는 중국의 유엔 가입을 승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는데 이런 분위기 속에서 북한이 1971년 남북회담을 제안했고 남한 정부가 이에 화답해 9월 20일 비밀리에 남북 적십자회담이 개최되었습니다.
김광인 코리아선진화연대 소장: 당시 시대 상황도 중요하다고 봅니다. 60년대까지 동서 냉전이 고조됐지만, 70년대 들어 화해 분위기로 바뀝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과 중국의 국교정상화입니다. 그런 영향이 한반도에도 미쳤다고 봐야 하겠죠. 따라서 7.4공동성명도 그런 분위기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이런 내용은 최근 비밀이 해제된 미국 국무부 문서에서도 확인이 되고 있습니다.
7.4공동성명은 남북한 모두 권력 강화 차원에서 나왔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7.4공동성명을 통해 통일의 분위기를 형성한 박정희 정권은 그해 10월 17일 비상계엄령 발동과 함께 유신 헌법을 발표합니다. 북한의 권력은 영구한데 남한은 선거로 인해 대통령은 물론 국회 권력까지 바뀔 수 있어 남북 대화와 통일을 위해 유신헌법 개정이 불가피했다는 겁니다. 정권 강화와 체제유지 위해 7.4공동성명을 이용한 것은 북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김일성 주석도 그해 12월 사회주의 헌법을 채택하면서 세습 정권의 틀을 마련합니다.
김광인 코리아선진화연대 소장: 7.4공동성명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남북의 정치체계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예컨대 북한은 1972년 12월 사회주의 헌법을 통해 수상제가 주석제로 바뀌고 김정일을 후계자로 삼는 등 북한도 독재권력 강화를 위해 7.4공동성명을 사용하게 됩니다.
7.4공동성명에 있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통일 원칙은 북한에서 먼저 제시한 겁니다. 당시 김일성 주석은 이후락 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남북 간 상호 비방을 중지하고 이산가족 상봉, 남북 간 인적 물적 교류 및 정치회담을 진행하기 위한 남북조절위원회 구성을 제의하게 되는데.. 남북은 7.4공동성명에 따라 그해 11월 '남북조절위원회 구성 및 운영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하고 남북조절위원회를 공식 발족시킵니다.
대한뉴스(72.10.14):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1차 회의가 10월 12일 판문점 자유의 집에서 열렸습니다.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된 뒤 100일 만에 처음으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는 서울 측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 김치열 차장, 정홍진 대한적십자 회담 사무국협의 국장이, 평양 측에선 북한 제2 부상 박상철, 노동당 조직지도부 차장 유장식, 노동당 책임지도위원 김덕현 씨가 나와 비공개로 4시간 25분간 진행됐습니다. 이날 회의에선 7.4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을 재확인하고 합의사항을 성실히 이행하고 남북 간의 오해와 불신을 풀기로 했으며…
7.4공동성명 이후에도 남북 간에는 수많은 대화가 진행됐지만 통일을 위한 원칙 확인만 반복할 뿐 그 실천 강령에 있어서는 서로 다른 해석을 내놓아 구속력을 잃게 됩니다. 이 같은 결과는 남북대화와 합의는 그 자체로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 해결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방안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김광인 코리아선진화연대 소장: 7.4남북공동성명은 남북 간의 최초의 공식적인 합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후 1990년 남북기본합의서와 2000년 6.15공동성명과 같은 역사적인 합의의 토대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그것을 지켜려 하지 않았고 어쩌면 처음부터 지킬 의사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남북 간에는 합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합의를 지켜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북의 가족과 헤어진 실향민들은 그날의 감격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말합니다. 고향 땅을 밟을 것으로 기대했던 게 벌써 44년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강산이 변해도 네번이 변했을 세월이지만 남북관계는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열리던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중단되고 남북교류마저 끊겼습니다. <통일로 가는길> 오늘 순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노재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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