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60주년 특집] 학사장교로 6.25에 참전한 에드가 터프츠 씨 "전쟁에서 부하병사를 잃는 것이 가장 고통스러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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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난 남한은 60년이 지난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뤄 지금은 북한 경제의 38배에 달하는 경제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남한이 이렇게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운 21개국 국제연합군 병사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이 마련한 6.25 60주년 특집 노병의 이야기, 오늘은 미 육군 보병사단 장교로 한국전에 참전한 에드가 터프츠 씨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 RFA VIDEO

에드가 터프츠 씨는 1930년 노스캐롤라이나 주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가 군에 입대하게 된 것은 대학교에서 ROTC 즉, 학사장교 훈련 단에 입단 하면서 였습니다.

터프츠: 학사장교훈련단에 입단한 것은 직업 군인이 되기 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입단한 이유는 여러 가지 이지만 그중 하나는 저희 아버지도 학사장교 훈련 단 출신 이라는 것입니다. 집안 전통이라고 할까요?

터프츠 씨의 가족은 미국의 남북전쟁 때부터 조상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집안이라고 합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그날 터프츠 씨는 학사장교 훈련 단에서 훈련을 받고 있었습니다.

터프츠

: 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학사장교들은 무척 긴장한 분위기였습니다. 아직 미국이 참전을 하기로 결정된 것은 아니었지만.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죠.

그로부터 1년 후. 터프츠 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입대합니다. 당연히 한국으로 파견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터프츠 씨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는 일인 만큼 담담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조상 대대로 군인을 배출한 집안이기는 하지만 아들이 전쟁에 나간다는 소식을 반기지 않는 것은 터프츠 씨의 가족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터프츠

: 저의 어머니는 당연히 걱정을 하셨죠. 저는 가족의 이름을 이을 유일한 독자였기 때문에 어머니께서는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도 무척 걱정을 하셨지만 제가 군에 입대하는 것에 대해 반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제가 조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고 생각을 했기 때문이죠.

3개월 동안의 장교 훈련을 마친 터프츠 씨는 곧바로 한국으로 파병됐습니다. 일본에서 부산으로 건너온 그는 야간 기차를 타고 서울 영등포에 있는 집병소로 향했습니다. 애국심으로 무장하고 자발적으로 군대에 입대했지만 처음 전쟁에 나가는 그의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터프츠

: 기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기 전에 여러 가지 주의 사항을 말해 줬습니다. 많은 게릴라 들이 철도 주변에 숨어있어서 기차가 공격을 당할지 모른다고 말하더군요. 저희에게 총은 지급이 됐었지만 총알은 없었기 때문에 모두 불안해했습니다.

다행이도 터프츠 씨가 탄 기차는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생전 처음 온 한국 이였지만 그는 한국의 지형에 친근감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터프츠

: 처음 본 한국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제가 자란 노스캐롤라이나도 산이 많았는데 한국에도 산이 참 많았습니다. 고향에 온 느낌 까지는 아니지만 참 친근감이 느껴졌습니다.

그렇지만 서울에 도착하면서 그의 생각은 바뀌었습니다.

터프츠

: 서울의 모습은 비참했습니다. 폭격으로 건물들은 모두 뼈대만 남아 있었죠. 한강 철교를 지나며 보니 많은 여성들이 다리 밑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생전 처음 보는 것 이였습니다. 그때서야 저는 한국 사람들이 전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 이해하게 됐습니다.

터프츠 씨와 그의 부대가 배치된 곳은 지금의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이었습니다. 미군들에게는 ‘펀치보울’이란 이름으로 더 친숙한 이곳은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입니다.

펀치보울 전투는 미군 제1해병사단과 남한 군 제1해병연대가 북한군 제1사단이 치열한 전투를 벌여 양측에 수 천 명의 사상자를 낸 격전지였습니다. 다행이도 터프츠 씨고 이곳에 도착했을 때는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였습니다.

터프츠

: 저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제가 10개월 동안 파견된 기간 중 저의 부대에서는 한명의 인명피해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떠난 2주 후 저의 부대가 전진 기지로 전출 나갔는데 10일 동안의 전투에서 28%의 사상자가 나왔습니다.

터프츠 씨는 전쟁터에서 전우를 잃는 것, 특히 부하병사를 잃는 것은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이었다고 말합니다.

터프츠

: 생사고락을 같이하던 전우가 죽어가는 것을 보는 것은 정말 감정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경험이었습니다. 제가 가장 가슴 아팠던 경험은 바로 다음날 고향으로 돌아갈 병사 한명이 중공군의 포탄에 맞아 전사한 것 이였습니다. 정말 비참한 죽음이었죠.

이런 비참한 전쟁 속에서도 터프츠 씨는 긍정적인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터프츠

: 제가 있었던 곳은 강원도 산악지역이었는데 봄철의 한반도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꽃이 피고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보면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내가 여기서 싸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혹독한 겨울이 온다고 하더라도 생명은 반드시 이어진다는 철학적인 생각이었죠.

터프츠 씨는 돋아나는 새싹들과 꽃들을 보면서 반드시 한반도에도 자유와 평화가 찾아올 것으로 믿었다고 말합니다.

터프츠 씨는 결국 10개월 동안의 임무를 마치고 무사히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에 대한 향수는 터프츠 씨의 가슴속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비참한 전쟁에 대한 기억보다는 한국에서의 아름다운 추억들만이 기억 속에 있다고 터프츠 씨는 말합니다.


터프츠

: 나쁜 기억은 없습니다. 좋은 기억뿐입니다. 그곳에서 만났던 좋은 친구들과 그곳에서 보낸 추수감사절 그리고 긴 전투 후에 부대로 돌아와 3개월 만에 했던 뜨거운 샤워. 이런 추억들 밖에 기억나지 않습니다. 나쁜 기억이라고는 혹독하게 추웠던 겨울 날씨 뿐입니다.

이렇게 한국에 대한 좋은 추억을 간직해온 터프츠 씨는 지난 2008년 50여년 만에 처음 다시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목격한 터프츠 씨는 그곳이 50년 전 자신이 싸웠던 같은 곳인가 의심했다고 말합니다.

6.25전쟁 60주년을 맞는 올해 터프츠 씨는 다시 한국을 방문할 계획입니다. 한국의 아름다운 모습이나 발전상을 보기위해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터프츠 씨의 이번 한국방문 목적은 한국에서 입양된 손녀딸에게 선물할 한복을 구하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6.25전쟁 60주년 특집 노병의 이야기 오늘은 한국전 당시 미군 보병사단 장교로 파병됐던 에드가 터프츠 씨의 얘기였습니다. 진행에 이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