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한반도는 초토화 됐고 다시 나라를 재건하는데 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특히 한국전에서 남한을 도와 싸운 국제연합군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남한에 머물며 전쟁으로 상처받은 남한 국민들을 도왔습니다.
6.25 60주년 특집 노병의 이야기. 오늘은 휴전 직후 한국으로 들어와 남한 사람들에 대한 보건지원을 했던 미 육군 간호병 애나 스웝 씨의 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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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도 워싱턴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펜실베니아주 헐쉬. 이곳은 한국전 당시 미군병사들이 한국 어린이들에게 나눠주던 헐쉬 초콜렛의 원산지입니다. 이곳에는 또 한국전 직후 간호병으로 남한에 파병됐던 에나 스웝 씨가 살고 있습니다. 올해 88세의 백발 할머니인 스웝 씨는 전쟁이 휩쓸고 간 남한에 기아와 질병으로 고통 받던 남한 주민들을 돌보기 위해서 지난 1954년 한국으로 파병됐습니다. 미국 펜실베니아 주의 작은 마을에서 철물점 주인의 딸로 자라난 스웝 씨가 처음부터 간호사가 되려고 한 것은 아닙니다.
스웝
: 사실 저는 학교 선생님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모님은 6남매를 키우셨는데요. 우리를 모두 대학에 보낼 만큼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엇인가를 하고 싶었고 또 간호교육은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간호사의 길을 택하게 됐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아주 좋은 진로 선택 이였죠.
간호대학에 진학한 스웝 씨는 간호사관에 들어가 미 육군 간호병으로 입대하게 됩니다. 스웝 씨의 첫 임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레바논으로 건너가 전쟁 부상자들을 돌보는 것 이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제대를 한 스웝 씨는 간호 대학원에 진학했고 또 일반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스웝 씨는 친구와 함께 다시 군에 입대하기로 결심합니다. 군에 들어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서였다고 말합니다.
스웝
: 당시 우리는 워싱턴에 있는 육군병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 상관에게 해외근무 파견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유럽으로 가기를 희망했지만 군 당국은 우리를 한국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한국전이 끝난 바로 직후라 좀 걱정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명령을 따라야만 했죠.
한국으로 전출명령을 받았지만 스웝 씨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습니다.
스웝
: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났었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죠. 간호 대학에서는 생물과 화학, 의학 등 여러 가지를 배워야 하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역사에 대해 배울 시간은 없었습니다. 한국으로 발령을 받은 후 저는 책과 지도를 통해 한국에 대해 조금씩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1954년 4월 서울에 도착한 스웝 씨는 바로 부산으로 파견 돼 야전병원 수술실에서 근무를 시작했습니다. 비록 한국전이 휴전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전쟁의 위협은 계속되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스웝
: 전쟁이 끝나기는 했지만 공습경보가 울리면 반공호로 대피하거나 책상 밑으로 숨어야 했습니다. 하늘 위에 있는 비행기가 적군인지 아군인지 금방 알 수가 없었거든요.
이미 간호병으로 2차 세계대전에 파병됐던 스웝 씨이었지만 전쟁의 공포감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고 말합니다. 야전병원 수술실에서 근무한 지 2달이 지난 후, 미 군 당국은 스웝 씨를 국제연합 공공보건 팀으로 파견했습니다. 스웝 씨의 대학원 전공이 공공보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국제연합 보건 팀에 합류한 스웝 씨는 그 때부터 전쟁이 할퀴고 간 한반도의 모습을 직접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스웝
: 전쟁이 지나간 남한의 모습은 빈곤 그 자체였습니다. 건물들은 폭격으로 모두 망가져 있었고 정말 비참해 보였습니다. 한번은 어린 소녀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쓰레기통을 뒤지는 모습을 목격했는데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태어나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이었습니다.
스웝 씨와 국제연합 보건 팀의 임무는 전쟁으로 완전히 무너진 남한의 보건체계를 다시 세우는 것 이였습니다. 임산부와 유아에 대한 치료와 영양공급 그리고 노인들과 어린 학생들에 대한 건강 검진과 식량 공급 등이 국제연합 보건 팀의 주요 임무였습니다.
스웝
: 가장 심각했던 보건문제는 남한 사람들의 영양상태였습니다. 결핵환자도 상당히 많았고 말라리아 환자 등 여러 가지 위생문제가 있었습니다. 또 홍역환자를 한국에 와서 처음 봤습니다. 우리는 환자들은 물론 환자의 가족들에게 까지도 전염병 예방을 위한 접종을 했습니다.
국제연합 보건 팀과 스웝씨는 남한사람들도 가기를 꺼려하는 나환자 촌까지 들어가 그들에 대한 의료지원을 했습니다.
스웝
: 육지에서 떨어진 섬에 나환자촌이 있었는데요. 당시 한국에서는 나병 환자들을 무조건 이 섬으로 보냈습니다. 의사와 간호사들이 의약품과 구호품을 가지고 섬 마을에 들어가면 환자들은 우리를 무척 반가워했습니다. 오래된 병으로 손가락이 떨어져 나간사람들 코가 없는 사람들 모두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반겼습니다. 제가 나환자를 본 것은 그것이 생전 처음입니다.
그렇지만 스웝 씨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전쟁고아들의 비참한 모습이었다고 말합니다.
스웝
: 부모를 잃은 전쟁고아들이 가장 불쌍했죠. 고아원에는 충분한 식량이 공급되지 않아서 아이들은 항상 배가 고팠고, 만성적인 영양부족으로 아이들의 배는 불뚝 튀어 나와 있었습니다. 또 어떤 고아원에는 입을 옷도 충분치 않아서 벌거벗고 있는 어린이들도 많았습니다. 허기에 지친 어린이들은 표정 없이 그저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죠. 이런 어린이들을 보는 것이 가장 가슴 아팠습니다.
스웝 씨는 한국의 이러한 딱한 사정들을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알렸습니다. 소식을 들은 스웝 씨의 언니와 형부는 한국에서 온 편지를 마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읽었습니다. 한국의 딱한 사정을 들은 스웝 씨의 마을 사람들은 전쟁으로 고통 받는 한국 사람들을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습니다.
스웝
: 저의 가족들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한국에 보내기 위한 옷을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마침 저의 언니와 형부는 그 마을의 우체국장이었는데 입던 옷과 새 옷, 아이들을 위한 장난감 등 많은 물건을 모아 커다란 자루에 넣어서 한국에 우편으로 보내 왔습니다. 저와 저의 동료들은 이 옷과 장난감들을 트럭에 싣고 나가서 마을 노인들과 어린이들에게 나눠 주었죠. 생활이 무척 궁핍했던 사람들은 입던 옷 이였지만 무척 만족해했습니다.
에나 스웝 씨와 고향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과 물자 지원은 스웝 씨가 한국을 떠난 1955년 7월까지 계속됐습니다. 비록 자원해서 간 한국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의 경험은 스웝 씨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말합니다.
스웝
: 한국에서의 경험은 저를 성숙하게 만들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나라가 미국처럼 윤택하고 행복하지 않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고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들을 위해 내가 적게나마 도움이 됐다고 생각하면 정말 흐뭇합니다.
한국에서 임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스웝 씨는 국내에서 남은 군 생활을 마치고 대학에서 간호학과 공중보건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고 펜실베니아 주 헐쉬에 살고 있는 에나 스웝 씨는 방송이나 신문에서 한국이 언급될 때 마다 60년 전 자신이 돌보던 어린이들이 생각난다고 말합니다.
스웝
: 꼭 한번 한국에 다시 돌아가 보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내 나이에 한국을 갈 기회는 없겠죠?
6.25 60주년 특집 노병의 이야기 오늘은 한국전쟁 직후 남한사람들의 보건지원을 했던 미 육군 간호사 에나 스웝 씨의 얘기였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