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수백만이 넘는 사람들이 희생되고 분단의 아픔은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6.25전쟁에서는 남북한 사람들 뿐 아니라 수십만 명에 이른 외국인들도 희생됐습니다. 들어 보지도 못한 아시아의 한 작은 국가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달려온 유엔군의 희생 때문에 오늘날 남한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경제 대국으로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6.25전쟁 발발 60주년 특집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미군병사들의 얘기를 모았습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한국전 당시 간호사로 파병돼 부상당한 북한군 까지도 치료해 주었던 줄리아 벡스터 씨의 얘기를 들어봅니다.
- RFA VIDEO/차은지 인턴기자
줄리아 벡스터 씨 1920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가 육군 간호장교로 입대하게 된 계기는 오빠가 태평양 전쟁에서 전사하게 된 것입니다. 보통 집안에서 전사자가 나오면 전쟁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하지만 벡스터 씨는 전쟁터에서 쓰러지는 병사들이 자신의 오빠나 동생처럼 느껴져 간호병으로 입대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렇지만 곧바로 간호장교로 입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줄리아 벡스터 씨의 얘기입니다.
<저의 오빠는 필리핀에서 전사했습니다. 당시 저는 고향에 있는 병원 수술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는 간호 보조사였기 때문에 간호장교로 입대할 수 없었습니다. 같은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가 저를 워싱턴 인근에 있는 병원에서 일할 수 있게 추천했고 그곳에서는 뉴욕에서 간호대학원을 다닐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습니다. 졸업 후 저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 군에 입대했습니다.>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오늘날 같지 않았던 당시. 딸이 군대에 입대하겠다는 소식을 반기는 부모들은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벡스터 씨의 부모는 딸의 입대 소식을 좋게 받아드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벡스터 씨 어머니의 반응은 의외였습니다.
<저도 딸을 가진 엄마에 입장에서 이 문제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해 봤는데요. 저의 어머니는 제가 입대하고 싶다는 의견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군에 가는 것에 대해 전혀 반대의사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했죠.>
육군 소위로 입대한 벡스터 씨의 첫 임무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유럽으로 건너가 전쟁 피해자들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전쟁이 할퀴고 간 유럽이었지만 그곳에서의 생활은 그리 힘들이 않았다고 벡스터 씨는 기억합니다.
<저는 독일로 파견되어 프랑크푸르트와 베를린에서 각각 1년씩 일했습니다. 그곳에서도 수술실에서 간호사로 일했죠.>
벡스터 씨는 이후 워싱턴에 있는 월터 리드 육군병원에 발령을 받아 그곳에서 일하다 또다시 도쿄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파견 나갑니다. 바로 그때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집니다. 일본생활에 적응도 되기 전에 벡스터 씨는 한국으로 가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당시 벡스터 씨는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발령받은 곳은 부산에 있는 한 야전 병원이었습니다. 미국 사람들 사이에서는 MASH(Mobile Army Surgical Hospital)로 알려진 이 병원에 도착한 벡스터 씨는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수술실로 달려가 부상병들을 돌봐야만 했습니다. 그동안 무난했던 군대생활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병원에는 물이 없었습니다. 문 닫은 학교건물을 병원으로 사용했는데요. 가구도 없는 낡은 2층 건물에 숙소를 만들어 놓고 그곳에서 생활 했습니다. 얼마 후에야 목욕실을 만들어 주었는데요. 그것마저도 남자 의사들과 같이 사용해야만 했습니다. 수도가 없었기 때문에 언덕 넘어서 물을 길어다 사용해야 했고 음식도 군인들이 먹는 음식을 같이 먹어야 했습니다. 무엇 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8시간 회전 근무였는데요. 8시간을 근무하고 8시간을 휴식한 뒤 다시 8시간을 근무하는 것입니다. 옷을 갈아입거나 목욕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정이었습니다. 결국 우리는 상관에게 요청해 12시간 회전근무로 바꿨습니다. 8시간 회전 근무보다는 훨씬 쉬웠죠.>
그러나 벡스터 씨를 힘들게 했던 것은 육체적인 노동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오빠를 잃은 벡스터 씨는 부상당해 병원으로 실려 오는 병사들 하나하나가 모두 자신의 형제로 느껴졌다고 말합니다.
<부상당한 병사가 병원으로 실려 들어 올 때 마다 마치 오빠의 얼굴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방으로 올라가 한참 울다가 눈물을 닦고 수술실로 내려가곤 했습니다. 수술실에서 일을 하려면 정신적으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수술실에서 눈물을 흘릴 수는 없었죠. 병원에 누워있는 병사들이 모두 제 형제처럼 느껴졌습니다.>
전쟁이 점점 더 치열해지면서 벡스터 씨가 눈물 흘릴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수술실 밖에는 부상당한 병사들이 줄을 서 있고 어떤 경우에는 한 번에 여러 명의 병사들을 함께 수술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눈코 뜰 세도 없이 바쁜 와중에도 미군은 부상당한 북한군들에 대한 치료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연히 침묵을 지키고 있었죠. 피와 흙으로 뒤범벅이 된 그들의 모습은 아주 공포에 질린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영어를 할 줄 몰랐지만 우리가 그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켜야 했습니다. 저희는 그들에게 아주 좋은 대우를 해 줬습니다. 특히 수술실에서는 미군 부상자들과 똑같은 대우를 해 줬습니다.>
이렇게 치료를 받은 북한군들은 거제도에 있는 포로수용소로 이송됐습니다. 미군은 포로수용소에도 미군간호병들을 파견해 북한군들은 돌봤다고 벡스터 씨는 말합니다. 5개월 동안의 임무를 마치고 벡스터 씨는 다시 일본에 있는 육군병원으로 돌아왔습니다. 일본에서도 한국전쟁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돌보는 일은 계속됐습니다. 전쟁이 치열해 지면서 부상당한 유엔군들은 일본으로 까지 실려와 그곳에서 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벡스터 씨가 한국에 머물렀던 시간은 불과 5개월 이었지만 그 시간은 5년처럼 느껴졌다고 합니다. 또 수술실에서의 고된 근무 이외에 한국에 대한 다른 기억은 없습니다. 부상당한 병사를 돌보고 야전침대에서 새우잠을 자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는 반복되는 고된 일과로 다른 일에 관심을 둘 시간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흔 살이 된 벡스터 씨는 남편과 함께 워싱턴 인근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한국전 이후 한국을 방문할 기회는 전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가끔 텔레비전을 통해 발전한 한국을 보면 그곳이 내가 5개월 동안 머물렀던 그곳인가 의심될 정도라고 말합니다.
60년이 지난 지금 벡스터 씨의 한국과의 인연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벡스터 씨는 한국인이 운영하고 있는 미장원에 단골손님이라고 합니다. 기회가 될 때마다 벡스터 씨는 그곳에 놀러가 미장원 주인과 자신이 겪었던 한국에 대한 얘기를 나눈다고 합니다.
6.25전쟁 60주년 특집, 노병의 이야기 오늘은 한국전에 간호병으로 참전했던 줄리아 벡스터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진행에 이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