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60주년 특집] 백골부대 요원이 된 인민군 포로① "고향이 그리울땐 압록강으로 달려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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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에 걸친 남북 간의 피비린 내 나는 전쟁. 6.25는 숱한 전투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기구한 사연들 가운데는 전쟁 기간 북쪽 인민군과 남쪽 국군을 모두 경험하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평안북도 벽동 출신의 실향민 김동수 씨도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은 김 씨의 이러한 기구한 사연을 오늘부터 이틀 간 2회에 걸쳐 방송합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김 씨의 애틋한 고향 얘깁니다.

서울에서 노재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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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간 북쪽 인민군과 남쪽 국군을 모두 경험하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김동수 씨. (RFA PHOTO-노재완)

지난 6월 4일 서울 구기동에 위치한 이북5도청. 이 날 이북5도청에선 6.25전쟁 60주년 기념 특별 안보강연회가 있었습니다.

정낙현(강연자): 그 다음에 중국으로 탈북한 조경숙 씨라는 사람이 하는 말입니다. 내 소원은 조국이 빨리 통일돼서 중국에서 가장 못 사는 나 만큼 살았으면 좋겠다..

이날 안보 강연회는 평북 출신의 실향민들의 모임인 평안북도 중앙도민회가 주최했습니다. 안보 강연회를 듣기 위해 온 실향민은 어림잡아도 200 명은 족히 넘어 보였습니다.

사회자: 평안북도 도민회가 승승장구 영원히 발전하기를 우리 모두는 기원하면서 오늘 저희들에게 안보강연을 해주신 정낙현 회장님께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 내용 또한 우리 실향민 1세, 2세로서 충분히 이해하셨으리라 믿습니다.

이북5도청은 사람들의 발길이 적은 북한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어 평소 땐 아주 조용한 편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행사가 있고 모임이 있는 날에는 전국에서 온 이북 실향민들로 청사 전체가 시장처럼 북새통을 이룹니다.

현재 평북중앙도민회 부회장을 맡고 있는 김동수 씨. 김 씨는 올해로 여든 한 살(81)입니다. 충청남도 천안에 살고 있는 김 씨는 귀가 잘 안 들려 강연 내용을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강연 내내 진지한 모습이었습니다. 이북5도청에서 모임이 있는 날에는 김 씨는 고향 사람들을 만나다는 기쁨과 설레임으로 일부러 남들 보다 일찍 나옵니다.

기자: 이북5도청에 자주 오십니까

김동수: 자주 나와요. 와서 사람들 얼굴도 보고 그렇습니다.

기자: 천안에서 여기까지 오시는데 몇 시간 걸리세요?

김동수: 한 2시 30분 정도 걸리죠.

기자: 그렇게나 많이 걸려요.

주변 사람들은 김 씨 만큼 고향 사람들을 챙기고 고향을 그리워하는 사람도 드물다면서 애향사업에 대한 그의 남다른 열정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동료: 다 마찬가지겠지만, 유난히 고향 사람들을 만나러 와요. 저를 대동해서요.

김 씨의 고향은 평안북도에서도 가장 동북부에 위치한 벽동입니다.

기자: 오늘 오신 분들 가운데 벽동군 고향 분도 있습니까?

김동수: 없어요.

기자: 그러면 벽동군은 선생님 혼자세요?

김동수: 네, 오늘은 저 혼자네요.

고향 벽동은 압록강을 국경으로 중국과 마주하고 있어 중국 땅에서도 쉽게 육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 씨는 고향 생각이 날 땐 가끔 중국에 다녀온다고 합니다. 김 씨는 기자에게 중국 압록강변에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고향 얘기를 해주었습니다.

김동수: 이리로 가면 옛날 일본 신사가 있었고, 또 여기엔 당시 고향에서 가장 부자였던 최씨 집이 있던 곳인데, 그 곳도 다 헐고 강냉이 밭이 돼 버렸어.

기자: 아, 그러면 강냉이 밭이 옛날엔 사람이 살던 곳이라는 말씀이죠?

김동수: 지금은 인민군들이 보초 집으로 이용하고 있지..

1950년 6.25전쟁 무렵 김 씨는 인민군에 징집돼 평남 개천에 있는 훈련소에 입소하게 됩니다. 그 때가 꽃다운 나이 스무살 청년이었습니다.

내일은 김 씨의 6.25전쟁 때 기억 속으로 들어가 내금강에서 국군한테 포로로 잡힌 이야기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다시 국군의 백골부대 요원이 된 사연을 들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노재완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