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60주년 특집] 고등학생으로 한국전에 참전한 빌 스콧 씨 "한국의 눈부신 발전을 보면 뿌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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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6.25전쟁이 발발한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6.25 전쟁은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수많은 외국인들도 한반도 국민들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이 마련한 6.25 60주년 특집 노병의 이야기 오늘은 고등학생 신분으로 군에 입대해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병사 빌 스콧(Bill Scott) 씨의 얘기입니다.

- RFA VIDEO

1933년 미국 오클라호마 주에서 태어난 빌 스콧 씨가 군에 입대한 것은 16살 때입니다. 사실 군에 입대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17살이 되어야 하는데 스콧 씨는 나이를 속이고 군에 입대 했습니다.

스콧

: 나이를 속였다기 보다 군에 가기위해 나이를 조정했다고 봐야죠?

가난한 시골에서 살던 스콧 씨와 그의 친구들은 늘 모험심이 넘쳤지만 작은 시골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고 말합니다.

스콧

: 당시 나 같은 시골 소년이 단 몇 푼이라도 벌기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군에 가는 일 밖에 없었죠.

그러나 시골 소년의 속임수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군 당국은 스콧 씨가 군대에 입대할 나이가 안됐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또 집에서도 스콧 씨가 몰래 군에 입대했다는 사실도 들통 나고 말았습니다. 스콧 씨가 군에 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부모에게 승인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스콧

: 저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무척 우려를 했습니다. 저의 외삼촌은 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였는데 노르만디 상륙작전에서 가장 먼저 상륙한 사람 중에 하납니다. 이런 사실 때문에 저의 부모는 제가 군에 가는 것에 대해 무척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스콧 씨는 결국 부모의 승인을 얻어 냅니다.

스콧

: 저는 당시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는데 졸업을 하자마자 징병당할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에게 나중에 징병당해 생판 모르는 사람들과 군대생활을 하는 것 보다. 고향 친구들과 함께 군에 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설득했죠.

희망하던 군에는 입대를 하지만 곧 이것을 후회할 일이 생깁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루이지아나 주에서 6개월 동안의 기본훈련을 마친 스콧 씨는 다시 일본 북해도에 있는 미군보병사단에 파병 되어 강도 높은 훈련을 받습니다. 한국전에 투입되기 위한 훈련이었습니다.

스콧

: 1951년 12월 한국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저의 사단은 한국전에 먼저 투입된 사단 병력과 교체 했는데 그들은 이미 엄청난 인명피해를 입었었고 사기가 땅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파병 되자마자 철원평야와 백마고지 등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남들은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을 나이에 육군 하사관이 된 스콧 씨는 평생 들어보지도 못한 나라까지 와서 전쟁의 잔혹함을 직접 경험하게 됩니다.

스콧

: 많은 사람들은 병사들이 전투에서 어떤 생각이나 기분이 드는 지를 궁금해 합니다. 전투에서는 다른 생각을 할 틈이 없습니다. 오로지 옆에서 싸우고 있는 전우들의 생명을 보호하는데 모든 집중을 합니다. 집에 있는 가족들이나 고향을 생각할 틈이 없습니다. 그 때 같이 싸우던 전우들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친 형제와 같습니다.

스콧 씨에게 당시 전투상황이 어떠했는지 물어 봤으나 잔혹한 과거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며 대답을 거절했습니다. 스콧 씨는 밀려오는 중공군과의 전투 이외에 또 다른 전투를 치렀다고 합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1951년 겨울 한반도에 온 스콧 씨는 한국전에서 병사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것은 살이 찢어질듯 한 추위였다고 기억합니다.

스콧

: 60년이 지난 지금도 꽁꽁 얼어붙은 발이 녹지 않았습니다(웃음) 정말 추웠습니다. 보초를 설 때도 오리털 담요를 뒤 집어 쓰고 있어야 할 정도로 추웠습니다.

스콧 씨와 다른 병사들을 힘들게 했던 또 한 가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었습니다.

스콧

: 하루는 커다란 보름달이 뜬 밤에 보초를 서고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몇 시간 뒷면 고향에 계신 어머니도 저 달을 쳐다보시겠구나 하는 생각이 이었죠. 그래서 하늘에 떠 있는 보름달에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편지를 섰죠. 그 이후부터 하늘에 떠 있는 달은 보며 어머니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스콧 씨는 60년이 지난 지금 아직도 기억나는 한국 사람이 있다고 말합니다. 스콧 씨 부대에 소속되어 있던 한국인 통역관입니다. 스콧 씨는 이 한국인 통역관을 통해 한국에 대해 알게 되고 또 한국인들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됐다고 말합니다.

스콧

: 변동찬이라는 친구였는데요. 남한 군에서 파견된 카투사 병사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학교 선생이었다고 합니다. 저는 변과 아주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에게는 아내와 두 딸이 있었는데 전쟁 기간 중 1년 반 동안이나 가족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군 당국은 결국 그가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줬습니다. 저의 전우들은 변이 가족과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이 너무 기뻤고 부대원 끼리 돈을 모아서 변에게 주었죠. 가족들이 살 수 있는 집이라도 마련할 수 있게 말이죠.

미군들의 한국 사람들에 대한 애정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한국에 파병된 병사들은 많지도 않은 월급에서 일부를 쪼개 한국전 고아들을 위한 보금자리도 마련했습니다.

스콧

: 저희가 한국에 있을 때 많은 전쟁고아들을 봤습니다. 그 중에는 아기들도 많았죠. 이 어린이들이 고통 받는 모습이 참 안타까웠습니다. 저희 사단에는 약 2만 명의 병사들이 있었는데 병사들은 월급의 일부를 때어서 고아원을 설립했습니다. 수녀들이 이 고아들을 돌봤습니다. 이 어린이들이 자라나서 남한의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마음이 뿌듯합니다.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한반도에서 임무수행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스콧 씨의 나이는 불과 19살 이였습니다. 전쟁은 모험심에 불타는 소년을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됐습니다.

스콧

: 한국에서 돌아온 저와 다섯 명의 친구들은 모두 고등학교로 복학해 졸업했습니다. 졸업 후 여섯 명 모두가 대학에 진학했습니다. 이렇게 공부를 하면서 그때서야 우리는 왜 한국전쟁이 일어나게 됐는지 알게 됐죠. 또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더 많이 알게 됐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스콧 씨는 한 장의 한반도 지도를 탁자위에 펼쳐 놓습니다. 몇 년 전 미국의 인공위성이 한반도 상공에서 밤에 촬영한 위성지도입니다. 지도에는 3.8선 이남의 한반도에는 환하게 불이 밝혀져 있고 이북에는 평양에만 하얀 점이 찍혀 있을 뿐 나라 전체에 암흑이 깔려 있습니다.

스콧

: 이 지도 한 장이 모든 것을 말해 줍니다. 이 지도의 휴전선 남쪽으로 환하게 밝혀진 불 빚을 보고 또 어둠에 싸여 있는 북한 땅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해 냈다. ‘남한이 오늘날 이렇게 번영하는데 우리 미군이 한 몫을 했다’라는 생각을 하면 정말 뿌듯합니다.

6.25 60주년 특집 노병의 이야기 오늘은 미군 보병사단에 일원으로 한국전에 참전했던 빌 스콧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진행에 이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