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3년에 걸친 남북 간의 피비린 내 나는 전쟁. 6·25는 숱한 전투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기구한 사연들 가운데는 전쟁 기간 북쪽 인민군과 남쪽 국군을 모두 경험하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도 있습니다.
평안북도 벽동 출신의 실향민 김동수 씨도 바로 그 주인공인데요.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은 김 씨의 이러한 기구한 사연을 2회에 걸쳐 방송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김 씨가 인민군으로 참전해 국군이 되어 살아남기까지의 험난했던 여정을 듣겠습니다.
서울에서 노재완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6.25전쟁 무렵 김 씨는 학업 때문에 고향을 떠나 평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전쟁 나기 바로 일주일 전 김 씨는 평남 개천에서 인민군에 징집돼 일주일간 간단한 훈련을 받고 전쟁에 바로 투입됩니다.
김동수: 그 때서야 전투가 벌어진 것을 알았지.. 전쟁이 났구나 생각했죠. 남침한 우리는 개성으로 해서 (수색을 거쳐) 연세대로 나왔어요.
김 씨는 전쟁 초기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할 때까지 거의 파죽지세로 내려왔다고 전했습니다.
김동수: 개성에 오니까 미군 막사가 텅텅 비어 있더라고.. 그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이후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있을 때까지 김 씨의 부대는 대부분 서울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에 성공하고 서울로 진군하면서 내금강쪽으로 퇴각했고, 결국 국군에 잡혀 김 씨는 포로가 됩니다. 김 씨가 인민군 복장을 하고 참전한 지 불과 3개월 만입니다. 내금강에서 김 씨와 함께 붙잡힌 포로만 20여 명이 넘었습니다.
한 국군의 도움으로 포로생활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김 씨와 인민군 장교는 또 다시 어디론가 갔으며, 그 날 밤 어디인지 알지도 못하는 허름한 헛간에 갇히게 됩니다. 새벽 4시 경 누군가 오더니 인민군 장교는 내버려두고 김 씨만 깨워 갔습니다.
김동수: 나오라는데 안 나갈 수 있어. 나갔지. 그때 나만 총살시키는 줄 알았지. 근데 그게 아니야. 취사반에서 일하래.. 그때 취사반장이 누구냐 하면 권해일이라는 사람인데, 안동 권 씨 집안 사람이야. 얼마 전에도 대강 연락이 왔다갔다 했는데, 요즘 연락이 끊겼어요. 죽은 모양입니다.
권해일의 도움으로 백골부대 수색대 취사반에 들어간 김 씨는 그 때부터 운명이 바뀌게 됩니다. 포로나 다름없었던 김 씨가 인민군에서 국군으로 옷을 갈아입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까지만 해도 김 씨는 정식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백골부대가 이동할 때 마다 같이 움직인 그는 한때 함경북도 부령까지 북진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공군이 참전해 후퇴하는 바람에 부산으로 내려오고, 얼마 있다가 안동 부근에서 간단히 군사훈련을 받고 정식 백골부대 수색대원이 됩니다.
김동수: 훈련을 받고 있는데, 중대장이 나와 선임 하사를 부르더라고. 불러서는 나 보고, 오늘 부턴 현역 군인이니까 혼자서 일하라고 했지.. 그러니까 그 때부터 백골부대 수색대 정식 대원이 된 거이지.
김 씨는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다며 내금강에서 포로로 잡혀 살아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깝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 와중에 고향 선배를 만날 수 있으며, 또 살아남아서도 백골부대 수색대원이 돼 나중에 훈장까지 받고 6.25전쟁 참전용사가 됐다는 사실... 김 씨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절대 살 수 없었다”며 기자에게 그 옛날 제대증을 보여주었습니다. 제대증은 김 씨에게 있어 생명의 징표와 같았습니다.
기자: 여기 보니까 병과 보병이고, 계급이 이등상사인가요?
김동수: 그렇지. 이상이 이등상사지..
기자: 군번이 0721761이네요.
김동수: 응, 그렇지..
당시 가족들은 김 씨의 행방을 모른 채 월남했다가 기적처럼 연락이 돼 만났다고 김 씨는 말합니다.
김동수: 1.4후퇴 때 국군이 벽동 우리 집에 와서 잘 때 중대장이 우리 아버지한테 말했대. 이젠 이남에 내려가야 사니까 그렇게 알고 있으라고 해서 짐 꾸려서 월남한 거라고 하더라고요.
한창 강원도 양구에서 전투가 벌어질 때 김 씨는 뜻하지 않게 가족들의 편지를 받게 됩니다.
김동수: 인사계에서 저한테 편지가 왔다고 했지만, 당시 난 도저히 믿겨지지 않아 오히려 인사계 사람한테 따져 물었지. 식구가 나 혼자인데 우리 식구가 어디 있느냐고 말야. 그런데 인사계 담당자는 영등포역전 벽동여관에서 온 편지라고 하더라고...
그랬습니다. 김 씨가 원주 일대에서 전투를 벌일 때 6.25전쟁 전에 원주 치악산쪽에 내려와 살고 있던 고향 사람에게 편지를 부탁했는데, 나중에 그 편지가 운 좋게 가족들에게 전달된 것입니다.
이후 김 씨는 제대 무렵 고향에서 알고 지내던 여자와 결혼합니다.
2남 2녀의 자녀를 둔 김 씨는 “자식들이 건강히 잘 자라 준 것만으로 감사할 따름”이라며 자녀들의 근황도 알려주었습니다.
김동수: 현재 큰 딸과 작은 딸이 미국의 LA와 텍사스에 각각 살고 있으며, 우리 큰 아들은 캐나다에 살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만 여기 한국에 살고 있어요.
10년 전 부인과 사별한 김 씨는 현재 둘째 아들과 함께 천안에 살고 있습니다. 기자가 김 씨 집에서 얘기를 끝내고 인사를 나누려는 순간 김 씨는 대뜸 이런 말을 했습니다.
“기자 양반~!! 60년 전 인민군 포로가 될 때 난 이미 죽었을 몸이야. 그래서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는데, 그래도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죽기 전에 고향 땅 한번 밟아보는 거지.”
김 씨는 집 밖으로 나온 기자에게 백골부대 휘장이 달린 모자를 자랑하듯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환환 미소와 함께 햇살에 비친 백골부대의 휘장이 강렬하게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노재완 기자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