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60주년 특집] 미 공군 병사로 6.25에 참전한 루이스 이버트(Lewis Ebert)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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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한반도 전쟁이 발발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전쟁이 가져다준 상처는 컸지만 남한은 그 고통을 딛고 일어나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습니다. 남한이 이렇게 놀라운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의 자유를 위해 싸운 21개국 국제연합군 병사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이 마련한 6.25 60주년 특집 노병의 이야기, 오늘은 한국전 당시 미 공군 병사로 한반도에 파견됐던 루이스 이버트 씨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1931년 미국 버지니아 주에서 태어난 루이스 이버트 씨가 공군에 입대한 것은 한반도 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949년 여름이었습니다. 그는 올해 80입니다.


이버트

: 그 해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방황했습니다. 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일자리를 구할 수도 없었죠. 그래서 그해 6월 미국 공군에 자진 입대했습니다.

기본 훈련을 마친 이버트 씨는 콜로라도에 있는 공군기지에서 보급 병으로 일하게 됩니다. 보급 병으로 일한 지 수개월 후 이버트 씨는 일본에 있는 미군공군기지로 전출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떠나기 전 1달 동안의 휴가를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휴가를 마치기도 전에 이버트 씨는 군으로 즉각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습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터진 것입니다.

당시 상황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을 하는데요. 그 날은 일요일이여서 교회에 다녀왔는데 교회에서 돌아와 보니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다는 라디오 뉴스가 나오더군요. 그리고는 휴가 중인 모든 장병들이 군으로 복귀하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버트 씨는 가족들과의 작별도 제대로 못하고 워싱턴에 있는 에드워드 공군기지로 달려가 샌프란시스코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배를 타고 그가 전출명령을 받은 일본으로 향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버트 씨는 자신이 한반도로 가는지 몰랐다고 합니다.

이버트

: 그 때는 1950년 9월 이었습니다. 일본에 도착한 저와 몇몇 미군들은 기차를 타고 일본 남쪽에 있는 공군기지로 향했습니다. 기차로 가는데 무려 44시간이나 걸렸습니다. 기지에 도착한 우리는 창고에서 이틀 동안 대기하다가 비행기를 타고 대구에 있는 공군기지로 향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는데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바로 직후였습니다.

한반도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이버트 씨는 고된 업무에 들어갔습니다.

이버트

: 정말 눈코 뜰 세 없이 바빴습니다. 일주일 내내 쉬는 날도 없이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쉬지 않고 일했습니다. 저는 전투기에 탄약을 장전하는 일을 담당했는데요. 정말 엄청난 양의 총탄과 폭탄을 사용했습니다.

이버트 씨 말에 따르면 한국전쟁에서는 치열한 지상전투 이외에도 치열한 공중전이 있었다고 합니다. 한국전은 사상처음으로 제트기가 실전에 투입된 전쟁으로 미국의 첫 제트 전투기인 F-80이 첫 선을 보인 전쟁이라고 합니다.

이버트: F-80 전투기는 슈팅스타라고도 불렸는데요. 전쟁에 투입된 거의 모든 비행기가 피해를 입었습니다. F-80 이외에 ‘썬더제트’라는 F-84 전투기도 투입이 됐었는데 그 비행기들도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 북한군은 러시아로부터 제공받은 미그 15와 미그 17을 전쟁에 내보냈는데 미 공군은 그들의 비행기에 대적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버트 씨가 일하던 공군기지는 전방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지만 전쟁 중에 안전한 지역은 없었다고 말합니다.

이버트

: 우리 기지에서 가깝게는 8킬로미터 까지 적들이 밀고 들어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밖에도 적들은 기지에 몰래 접근해 수류탄을 던지는 등 기습공격을 해오기도 했죠. 전쟁터에서 적들과 육박전을 치르지는 않았지만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쁘고 긴장이 연속되는 근무였지만 이버트 씨 역시 고향에 두고 온 가족들의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나마 전방에서 싸우던 보병들과 달리 후방에서 일하던 공군은 고향에 있는 가족들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버트 씨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 있었던 또 한 가지는 그의 취미 생활이었습니다. 그는 미국을 떠날 때 사진기를 가져왔는데, 시간이 날 때 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그가 난생 처음 보는 진귀한 장면들을 사진에 담기 시작했습니다.

이버트 씨가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사진첩에는 폭격으로 잿더미가 된 건물들과 적들의 총격을 맞아 구멍이 숭숭 뚫린 전투기를 비롯해, 전쟁 통에 살아가던 한국 사람들의 모습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그의 사진 속에는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오갈 때 없는 고아들의 모습과 전쟁 중에도 폐허가 된 건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선생님들의 모습, 그리고 폐허가 된 농토에서 몇 줌의 벼라도 얻기 위해 거름지개를 힘들게 나르는 농부의 모습 등 한반도 전쟁 중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나를 생생히 엿볼 수 있었습니다. 이버트 씨는 이 사진들을 통해 한국의 문화를 배워가고 한국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갔는지를 이해 할 수 있었습니다.

이버트

: 여기 재미있는 사진이 있는데요, 하루는 부대에 있는 차를 타고 들판으로 나갔는데 사슴 몇 마리가 들판 위를 뛰어다니고 있어서 그 사슴들을 잡아왔습니다. 우리는 그 사슴고기를 인근에 있는 고아원 나눠주고 저희도 푸짐하게 먹었죠.

이버트 씨는 60년이 지난 지금도 이 사진첩을 소중하게 간직하며 그 때를 회상한다고 말합니다. 이버트 씨는 아무 탈 없이 한반도에서의 10개월 동안의 고된 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환 했습니다. 그가 미국 땅에 도착했을 때 한국전에서 돌아온 군인들을 반기는 환영식은 없었습니다.

이버트

: 배로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했는데 항구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습니다. 현수막에는 ‘장병들을 환영합니다. 수고 했습니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 글을 보고 미국인들이 우리를 기억해 줬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현수막은 2차 세계대전부터 걸려 있었다고 하더군요.

이버트 씨는 집으로 무사히 귀환한 것만으로도 만족했다고 말합니다. 이버트 씨는 군에서 제대한 뒤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지방 신문사에서 광고담당 편집인으로 일했습니다.

이버트 씨는 다른 한국전 참전용사들보다 더 생생하게 한국전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비결은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매일 들여다보며 당시의 일들을 회상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버트 씨는 한국전쟁에서 겪었던 가장 소중한 경험이 무엇이었냐는 질문에 그 때 만났던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비록 한반도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고 한국전에 참전했지만 그곳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의 가슴속에 살고 있다고 그는 말합니다.

6.25 60주년 특집, 노병의 이야기 오늘은 미 공군 보급 병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루이스 이버트 씨의 얘기를 들어봤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이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