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올해로 60년이 됐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북한 외교관 출신인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수석연구위원과 함께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 당국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를 점검해 봤습니다.

'고영환의 한국전쟁 이야기' 오늘은 그 두 번째 편으로 북한군과 미군이 처음으로 교전을 벌였던 오산 죽미령을 찾았습니다.
경기도 오산시 내삼미동 산70-6번지. 서울에서 남쪽으로 50km 가량 떨어진 이곳은 1950년 7월5일 미군과 북한군이 한국전쟁 사상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곳입니다.
박성우 기자와 함께 현장 취재에 나선 고영환 연구위원은 “전쟁 당시 북한군이 오산에서 미군을 상대로 큰 성과를 올린 걸로 북한에 있을 때 배웠다”면서 바로 그 현장을 둘러보고 있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기자: 60년 전에 이곳으로 북한군이 밀려오고 있었고, 그걸 ‘스미스 부대’라는 이름의 미군 부대가 처음으로 맞붙어서 싸웠는데요. 60년이 지난 지금은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네요.
고영환: 네, 전혀 그런 흔적이 없네요. 저도 여기 오기 전에는 여기에 산이 있을 줄 알았어요. 산 옆으로 도로가 있어서 북한군 탱크가 지나간 걸로 생각했는데요. 여기 와서 보니까 (죽미령은) 나즈막한 언덕이고, 6차선 도로가 있고, 사방이 아파트입니다. 산이라는 느낌이 전혀 안 드는데요. 6차선 도로를 가득 메우고 달리는 차밖에 안 보이고, 전쟁의 상처는 하나도 안 보이고, 여기서 북한군과 미군이 붙었다는 것 자체가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기자: 저기 유엔군 초전비가 있는데, 한 번 올라가 보시죠.
고영환: 네.
펄럭이는 유엔군 깃발을 마주보고 서 있는 ‘유엔군 초전 기념비.’ 높이 19.5미터의 이 기념비는 1982년 4월6일 건립됐습니다.
당시 전투에는 사실상 미군 부대가 참전했지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1950년 6월27일 결의에 따른 작전이었기 때문에 이곳 죽미령에 세워진 기념비의 이름도 ‘유엔군 초전기념비’로 지어졌습니다. ‘초전’은 첫 전투를 뜻합니다.
유엔군의 참전 결의에 따라 미군이 부산에 도착한 건 1950년 6월30일입니다. 1949년 6월29일에 500여 명의 군사고문단을 남기고 남한에서 모두 철수했던 미군이 북한군의 기습 침공을 당한 한국을 돕기 위해 1년여 만에 돌아온 겁니다.
부산으로 들어왔던 미 제24사단 21연대 1대대의 B.C 중대와 52포병대대 A포대의 장병 540명은 ‘특수임무부대’를 형성해 오산에서 남침하는 북한군과 맞서게 됩니다. 이 특수임무부대는 대대장이었던 스미스(Charles B. Smith) 중령의 이름을 따서 ‘스미스 부대’라고도 불렸습니다.
북한 당국은 1950년 7월5일 오산 전투에서 “스미스 특공대를 쳐부수는” 전과를 올렸다고 선전합니다. 하지만 이 전투가 미군과 북한군의 첫 교전이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습니다.
고영환 위원은 “6월25일 새벽에 미제가 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해온 북한 당국으로서는 10일이나 지난 7월5일 군사분계선에서 100km 넘게 남쪽에 있는 바로 이곳 오산에서 미군과 북한군의 첫 교전이 있었다는 걸 밝힐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기자: 위원님, 한국전쟁은 ‘미제’가 일으켰다는 게 북한 당국의 주장인데요. 이와 관련해서 위원님께서는 북한에서 어떤 교육을 받으셨습니까?
고영환: 북한에서 모든 역사 교육과 다큐멘터리들, 그러니까 기록영화들에 의하면 분명히 ‘미제가 직접 일으킨 도발 전쟁이다’라는 식으로 교육받았고, 북한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지요.
기자: ‘미제가 6월25일에 침략해 들어왔다’고 배운다는 말씀이시죠?
고영환: 그렇죠. ‘미제가 6월25일 새벽 5시에 남조선 괴뢰군과 같이 북침했다’고 교육하는 거지요.
기자: 그런데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기록들을 보면, 북한군과 미군이 처음으로 전투를 벌인 곳이 바로 이곳 오산이잖아요. 전쟁 발발 후 10일이 지난 7월5일에 이곳 오산에서 전투가 벌어진 건데요. 북한 주민들은 이걸 알고 있습니까?
고영환: 북한 주민들은 다른 자료가 없고, 북한 당국이 그렇게 선전하니까, 그런 걸 잘 알지 못하는데요. 제가 여기 (한국에) 와서 많은 기록들을 뒤져보고, 특히 구(舊)소련의 문서를 뒤져보면서 알게 된 것은 미군과 북한군의 첫 접촉은 전쟁이 일어난 지 10일만에 오산의 바로 이 자리 죽미령에서 ‘스미스 부대’와 북한군 부대와의 교전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북한이 ‘처음부터 미군이 6월25일 새벽에 남조선 괴뢰군과 같이 분계선을 넘었다’고 하는 말은 100% 거짓말이지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열려서 유엔군의 참전을 결의했고, 일본에서 휴식하고 있던 미군 24사단을 긴급히 투입하기로 했고, 24사단에서는 ‘스미스’라는 이름의 중령에게 북한군의 전력을 알아보라는 임무를 줘서 북한군과 바로 이곳 죽미령에서 마주친 거지요. 북한에서는 ‘스미스 특공대를 까부셨다’고 말하는데요. 특공대는 말 그대로 특수 훈련을 받고 펄펄 나는 싸움꾼들로 만들어진 부대인데요. 그런데 ‘스미스 특공대’는 말 그대로 하면 ‘스미스 특수임무 부대’입니다. 미군 24사단에서 한 개의 대대 병력을 한국 전선에 보내서 북한군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찰하라는 게 특수 임무였고, 그래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라는 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그 부대의 540명이 북한군 ‘105 탱크 여단’과 북한군 4사단을 여기서 맞닥뜨린 겁니다.
기자: 그게 7월5일이었다는 거지요?
고영환: 네, 7월5일 아침 8시부터 오후 2시30분까지 북한군과 교전이 있었던 거지요. (기념비 옆 안내판을 보며) 여기 자료를 보시면, 여기도 나오는데요.
1950년 6월25일 기습 남침을 시작한 북한군은 7월3일 아침에 한강 도하에 성공한 후 당일로 영등포를 점령하고 다음날에는 수원까지 점령하였으며 그 여세를 몰아 7월5일 새벽에 오산으로 내려옵니다.
오산을 노리던 북한군의 주력 부대는 소련이 제공한 최신형 탱크로 무장한 105기갑사단의 107전차연대와 4사단의 16 및 18연대였습니다. 한국의 ‘국방군사연구소’가 1993년 11월에 발간한 <한국전쟁전투사>에는 당시 오산 전투에서 북한군은 33대 이상의 전차를 동원했고, 병력은 4,000명 가량이었던 걸로 기록돼 있습니다.
북한군의 기습 남침이 시작된 지 5일 뒤 부산에 도착해, 그로부터 다시 5일 후 오산에서 이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던 스미스 부대의 병력은 540명에 불과했습니다. 이들이 갖고 있던 무기 중에는 대전차용 105mm 곡사포가 있었지만 그 숫자가 6문에 불과했고, 대전차용 고폭탄 역시 6발 뿐이었습니다. 당시 한국에는 대전차 지뢰도 전무했습니다.
객관적 전력에서 열세에 있던 스미스 부대는 오산 전투에서 540명 중 190여 명이 전사하거나 행방불명됩니다. 반면 북한군은 탱크 4대가 완파되고, 3대는 반파됐으며, 전사 42명, 부상 85명의 인명 피해를 입은 걸로 알려졌다고 <한국전쟁전투사>는 기록했습니다.
이 같은 결과를 놓고 북한 당국은 1950년 7월5일 이곳 오산에서 북한군이 미군을 ‘한 방 먹인’ 걸로 선전한다고 고영환 연구위원은 말합니다.
하지만 오산 전투의 의미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고 고 위원은 지적합니다. 오산 전투와 그 후속 전투에서 미군은 한국군과의 연합 작전을 통해 북한군의 남침 속도를 떨어뜨렸고, 이를 통해 유엔군은 총 연장 240km의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영환: 이때 처음으로 북한군은 미군과 맞딱드렸고, 미군이 참전한 사실을 알았어요. 그래서 북한군이 여기서 주춤거립니다. 여기서 (오산에서) 대전까지 110km인데, 대전이 함락된 날이 7월20일, 그러니까 여기서부터 110km를 가는데 15일이 걸렸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결국은 여기서 미군은 북한군의 전력을 제대로 알 수 있었고, 10여일이라는 시간을 얻어서 ‘낙동강 교두보’를 만들 수 있었던 거지요. 낙동강 교두보를 통해 북한군의 진공을 저지하게 되고, 9월15일 맥아더 원수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해 북한의 주력군이 포위망에 갇히고, 그래서 북한군이 뒤로 물러가게 되는 거지요. 그러니까 한국전쟁사에서 오산 전투는 양쪽에 상당한 의미를 갖는 전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산 전투가 미국 측에 끼친 영향도 컸습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이 미국 정부의 문서고에서 찾은 자료에 의하면, 오산 전투를 통해 미군은 북한군의 전력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됐고, 이는 미군의 대규모 파병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7월9일 미 합동참모본부에 보낸 전문에서 “북한군은 소련의 지도 및 기술적 지침과 중공의 지상군적 요소를 결합한 성격을 점점 더 띄고 있으며, 비록 북한군 깃발을 사용하지만 이들은 더이상 북한군만으로 구성된 무력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This force more and more assumes the aspect of a combination of Soviet leadership and technical guidance with Chinese Communist ground elements. While it serves under the flag of North Korea, it can no longer be considered as an indigenous North Korean military effort)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맥아더 장군은 “이미 징발한 병력에 덧붙여 최소 4개 사단을 지체없이, 모든 유용한 수송 수단을 이용해 보내 줄 것을 강력히 촉구”(I strongly urge that in add to those forces already requisitioned, an army of at least four divisions, with all its component services, be dispatched to this area without delay and by every means of transportation available)합니다.
맥아더 장군의 이 서한은 미국이 한국전쟁 기간 동안 모두 48만 명의 병력을 파견하게 되는 시발점이 됐습니다. 그리고 맥아더 장군이 이 서한을 작성한 배경에는 기습 남침을 감행한 북한군의 전력을 파악하기 위해 희생을 무릅쓴 스미스 부대가 있었습니다.
그 부대를 이끌었던 스미스 중령은 1967년 미 육군 준장으로 예편했고, 2004년 5월 미 애리조나주 피닉스시에 있는 자택에서 88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그가 1981년 12월7일에 남긴 회고문에는 “나의 부대는 적의 공격을 불과 몇 시간밖에 지연시키지 못하였지만, 이 전투는 ‘미국은 싸워보지도 않고 우방과 동맹국의 파멸을 결코 방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경고하는데 기여했다”(My small group of officers and men from the US 21st infantry regiment and 52nd field artillery battalion delayed the attackers for only part of a day, but it did serve notice that the United States was not about to permit the destruction of a friend and ally without a fight)고 기술했습니다.
미군과 북한군의 첫 교전지, 오산. 하지만 북한 당국은 여전히 오산을 ‘북한군이 미군을 한 방 먹인 곳’으로만 선전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취재에 박성우 기자와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수석연구위원, 진행에 이예진, 제작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서울지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