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올해로 60년이 됐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북한 외교관 출신인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수석연구위원과 함께 한국전쟁에 대한 북한 당국의 주장이 과연 옳은지를 점검해 봤습니다. <고영환의 한국전쟁 이야기> 오늘은 마지막 편으로 한국전쟁 당시 중국과 북한이 만든 연합사령부에서 김일성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봅니다.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답곡리 산56번지. 서울에서 자동차로 1시간 반 남짓 달려 도착한 이곳엔 이른바 '적군 묘지'가 있습니다. 1996년 7월에 조성한 이곳의 정식 명칭은 '북한군-중국군 묘역'입니다. 원래는 야산이었는데, 이젠 묘역 앞에 4차선 도로가 뚫려 있고 멀리 농가 몇 채가 보입니다.
이곳 적군묘지에 안치된 유해 중에는 한국전쟁 중 사망한 북한군 350여구와 중공군 80여구가 포함돼 있습니다. 박성우 기자와 함께 취재에 나선 고영환 연구위원은 "적군의 유해도 함부로 다루지 않고 이렇게 묘역을 만들어 관리하는 한국이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고 말합니다.
기자: 여기가 '적군묘지'입니다. 무덤이 참 많은데요. 여기 묻혀 있는 사람은 북한 군인이거나 중공 군인입니다. 직접 와 보시니까 어떠세요?
고영환: 제가 서울에 온 지 참 오래됐는데, 여기는 오늘 처음 와 봤고요. 여기 들어오는데 '북한군 및 중공군 묘역'이라고 씌여있고, 묘지가 있고, 이름이 있는 무덤이 있고, 무명인이 있고, 군번이 있는 게 있고, 벌초가 잘 돼 있고. 여기서 처음 느낀 감정은요. (한숨) 이게 남과 북의 차이가 아닌가 생각되네요. 북한에서는 남한군과 유엔군 희생자들의 묘를 만들어 둔 게 한 곳도 없거든요. 그런데 여기서는 적군이라고 할지라도 일단 하늘 나라로 간 사람들이니까 유골을 찾아서 이렇게 무덤을 만들어줬잖아요. 누가, 어느 제도가, 어느 나라가 더 인간을 중시하고, 인간을 사랑하는지… 그런 느낌이 제일 먼저 들고요. 60년이 지났는데, 이걸 보니까 참 마음이 아프네요.
기자: 알겠습니다. 이 묘지에 와 보면 한국전쟁에 중공군도 참여했다는 걸 새삼 알 수 있거든요. 위원님,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공군의 희생자 규모가 참 컸지요?
고영환: 제가 자료를 많이 뒤져 봤어요. 여기 오기 전에도 자료를 많이 봤는데요. 중국에서 실지로 (군대가) 들어온 날짜는 1950년 10월19일, 그리고 첫 전투가 있었던 날은 10월25일입니다. 그래서 그 날을 '중국 인민지원군 참전의 날'로 정하고 중조우의 행사를 하는데요. 중국 사람들이 들으면 굉장히 섭섭해 하는데요. 중국 사람들이 굉장히 많이 들어와서 싸우다 죽었지만, 북한에서는 이걸 왜곡해서 북한군 혼자서 세계 최강인 미군을 때려부순 걸로 선전을 하거든요. 그런데 중국 측에서 발표한 중국의 사상자 숫자만 해도 15만2천명입니다. 아마 이것보다 2-3배는 더 많이 죽었을 겁니다. 10월25일 싸움을 벌였을 때 중국군의 규모는 26만명 가량이었거든요. 1951년과 1952년에는 서부와 중부 전선에서는 거의 중국군이 싸웠어요. 중국 군대가 많이 죽었고, 그 시신들의 일부가 여기 뭍혀 있는 거네요.
한국의 군사편찬연구소가 2002년 12월에 발간한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에 따르면, 1950년 9월15일에 맥아더 장군이 단행한 인천 상륙작전으로 수세에 몰린 김일성은 1950년 9월28일 조선노동당 중앙정치국 회의를 통해 소련과 중국에 추가 지원을 요청하는 결정을 내립니다.
소련의 스탈린은 10월1일 북한 주재 소련 대사였던 슈티코프에게 보낸 전문에서 "원조를 제공하는 가장 좋은 형태는 지원군을 파견하는 것이며, 이 문제는 우선적으로 중국과 의논해야 할 것"이라는 뜻을 전합니다.
소련의 이 같은 입장을 통보받은 김일성은 중국의 의사를 타진하게 되고, 모택동은 10월8일 김일성에게 전보를 보내 중국이 파병을 결정했음을 알립니다. 중국은 팽덕회를 총사령관으로 하는 인민지원군을 결성했고, 1950년 10월19일부터 1차로 26만 명의 병력이 압록강을 건너 한국전쟁에 개입합니다.
전쟁에 투입된 중공군의 총 규모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조사 기관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하지만 대략적으로 연인원 60만 명 이상이었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습니다. 이 중에서 최소한 15만 2천 명이 사망했다는 게 중국 당국의 발표였습니다.
기자: 위원님, 중국이 한국전쟁에 개입한 이유는 뭐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까?
고영환: 그때 시대 상황을 좀 설명하면,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이 국공 내전에서 국민당을 물리치고 정권을 잡았고, 국민당은 대만으로 쫓겨가서 조그만 섬을 하나 가졌지요.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6월25일 새벽에 기습 공격을 해서 낙동강까지 밀고 갔다가 다시 후퇴하게 되고, 미군과 한국군이 쫓아 올라갔지요. 그때 중국 사람들은 미군이 압록강을 넘을 것이라는 우려를 했고, 그렇게 되면 대만이 다시 힘을 얻어서 본토를 공격하지 않을까 걱정한 거지요. 그래서 결국은 '한국전쟁은 우리의 전쟁이다'는 식으로 생각을 해서 대량의 중공군을 파견한 것으로 자료에 나와 있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군은 개입 초기 북한군과의 협력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상당한 애로를 겪습니다. 양측의 지휘 체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1950년 10월25일과 11월2일 팽덕회는 모택동에게 보낸 전보에서 "중국과 북한 사이에 협조가 부족하고, 언어가 서로 다르며, 북한의 군대와 인민들이 퇴각하면서 도로를 봉쇄하는 등 중국 인민지원군의 군사 작전을 방해하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
중국 지도부는 북한군과의 유기적 군사작전을 위해선 연합사령부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기자: 위원님, 중공군의 개입 초기에 북한군과 손발이 안 맞는 일이 많았다면서요?
고영환: 저는 여기 (한국에) 와서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북한에 있을 때는 '조중 연합사령부'가 있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어요. 중국군 따로, 북한군 따로 싸운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서 자료를 뒤져보니까, 처음에는 서로 말도 틀리고, 싸움하는 방법도 다르고 하니까 서로 자기네들끼리 사격을 하는 일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자기가 먼저 전투에서 지휘권을 쥐겠다며 다투는 일도 있고, 그렇게 알력 다툼이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기자: 그러면 중공군과 북한군이 연합사령부를 형성했다는 걸 북한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다는 말인가요?
고영환: 그때 전투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거의 생존해 있지 않고요. 살아 있던 사람들도 그 이야기를… 북한의 선전 당국이 '조선인민군이 세계 최강인 미군과 싸워서 물리쳤다'고 선전하고, 그와 반대되는 말을 하면 자꾸 비판을 하니까, 그 사람들도 입을 다문 것이죠. 저는 전쟁이 끝나는 해에 태어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저는 중공군과 북한군이 싸우긴 했는데, 연합사령부를 설치했다는 건 전혀 몰랐고요. 더 지나서 지금 (북한의) 신세대는 어떻게 판단하고 있느냐면, 조선인민군이 기본 주력이었고, 중국군은 후방 병참부대나 한 정도로, 조금씩 참가한 걸로, 주객이 전도된 상태로 이해하고 있지요.
연합사령부의 형성과 관련해 모택동은 처음엔 북한뿐 아니라 소련의 참여도 희망했습니다.
1950년 11월3일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보낸 전보를 통해, 팽덕회와 김일성 그리고 군인 출신인 소련 대사 슈티코프가 공동 지휘부를 구성하여 "군의 조직편성, 작전, 후방 침투 등 군사 작전의 수행과 관련한 제반 정책들의 결정을 맡기고 상호간의 의견 조율을 통해 일치 단결하여 수월한 전쟁 수행을 도모할 수 있기를 바란다"면서 "우리는 지금 이 특별 전보를 통해 당신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소련은 중국이 지상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이상 연합사령부의 구성원은 중국과 북한이어야 한다는 의견을 통보합니다.
소련이 이 같은 입장을 표명한 상황에서 김일성은 12월3일 북경으로 가 모택동과 회담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스탈린은 전보를 통해 중국군과 북한군 사이에 반드시 통일된 지휘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중국 인민지원군이 전투 경험이 풍부하기 때문에 중국 동지들이 핵심이 되고, 북한 동지들은 이에 협조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조선로동당 정치국 회의는 이에 대해 이미 찬성했다."
이로써 모택동은 팽덕회를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추천했고, 김일성은 김웅을 부사령관으로, 박일우를 부 정치위원으로 각각 추천합니다. 이후의 연합 명령은 팽덕회와, 김웅, 박일우 3인의 서명에 의해서 집행될 수 있도록 결정합니다.
연합사령부가 성립된 다음, 작전 문제 및 전방 전선과 관련한 모든 활동은 일체 연합사령부의 관할 하에서 해결하도록 했으며, 후방에서의 동원, 훈련, 군사행정, 경비 등의 사항은 북한이 직접 관할하도록 하고, 연합사령부는 이러한 사항들에 대해서 권고나 건의를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주은래의 군사활동기사'(周恩來軍事活動紀事)에 따르면, "연합사령부의 건립은 대외적으로 비밀에 부쳐졌으며, 단지 내부적으로 문서를 통해 이에 대해 언급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는 기술했습니다.
기자: 연합사령부의 총사령관은 팽덕회였습니다. 부사령관은 북한의 김웅이었습니다. 연합사령부의 지도부에 김일성의 이름이 없는데요. 이걸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고영환: 김일성이 전쟁 초기에는 최고사령관이었던 게 분명합니다. 당시 박헌영 남조선 노동당 당수가 북한에 가서 부수상이 됐는데, 그때 김일성과 이야기 한 게 있습니다. '3일이면 남한 해방한다. 인민군이 들어오기만 하면 전체 봉기가 일어나서 무너진다'고 했거든요. 그 말을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이야기했고, 모택동에게 이야기 했고, 그래서 모택동도 지원해 주기로 하고, 스탈린은 신형 무기를 줬는데요. 그걸 가지고 쭉 내려왔다가 낙동강 전선에서 저지되고,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패배해서 전략적 후퇴를 하는데요. 김일성이 청천강에 차를 버리고 도망갈 정도로 급하게 패주합니다. 그때 이런 일화도 있어요. 황순희라는 북한의 모든 사람이 다 아는 빨치산 여인이 있는데요. 그 남편이 '105 탱크 사단장'을 했던 류경수입니다. 그 여자가 저와 같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저에게 했던 이야기가 있어요. '산에서 모닥불을 피워놓고 고구마를 구워먹으면서 김일성이 이제는 전쟁 끝났다, 우리는 졌다, 산에서 빨치산을 해야 한다, 중국 동지들이 도와주지 않으면 힘들다'는 말을 김일성이 당시 그 자리에 앉아 있던 인민군 최고사령부 성원들에게 했다는 거지요. 그럴 정도로 (김일성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니까, 모택동과 스탈린이 화가 난 것 같고요. 그래서 '당신은 빠져라'고 하고, 팽덕회를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하고, 김웅을 부사령관, 그리고 박일우를 부정치위원으로 임명한 조중 연합사령부가 형성돼서, 그것이 정전될 때까지 계속 유지됩니다.
기자: 김웅과 박일우는 자주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거든요. 어떤 사람들입니까?
고영환: 북한 사람들에게 이렇게 설명하면 금방 알 겁니다. 김웅과 박일우는 김일성 저작 선집에 나와요. '반당 종파 분자'로 아주 나쁘게 나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중국에서 싸운 역전의 용사들입니다. 국공 내전에서 10년씩 싸운, 전투를 잘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 사람들이 전쟁을 거의 다 하다시피 했는데, 김일성이 전후에 그 사람들을 모두 '연안파'로 몰아서 숙청해 버립니다. 그래서 '반당 종파 분자'로 돼 있죠.
한국전쟁 발발 초기에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김일성이 북한군의 총사령관으로 활동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중공군이 개입한 1950년 10월 이후부터는 북중 연합사령부가 작전통수권을 행사했으며, 그 총사령관은 중국의 팽덕회였습니다.
김일성은 팽덕회를 보좌했던 김웅과 박일우를 1956년에서 1958년 사이 '연안파'로 몰아 숙청합니다. 따라서 한국전쟁 당시 김일성의 역할을 김웅과 박일우의 입을 통해 들을 수는 없게 됐습니다.
이런 가운데 북한 당국은 김일성이 "미제와 그 추종국가들의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조국해방전쟁을 승리에로 조직 령도하시여 력사에 영원 불멸할 혁명 업적을 쌓으시였다"고 지난 반세기가 넘도록 선전해 왔습니다.
이로써 북한 주민들은 '한국전쟁은 미제와 그 추종자들의 북침이었고, 김일성이 이들을 물리쳤다'고 믿게 됩니다.
고영환: 북한에 있는 거의 절대 다수의 주민들은 아직도 6.25전쟁이 북침이라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역사적 자료들, 그러니까 구(舊)소련이 해체된 다음에 나온 자료들과 미 국무부에서 비밀이 해제된 자료들을 보면, 남침이었다는 게 분명한 역사적 사실로 나오거든요. 아직도 많은 북한 사람들이 한국전쟁을 남측에 의한 북침으로 생각하는 게 마음이 아프고요. 이렇게 속이고 있는 북한 당국도 야속하고요. 역사적 책임을 져야 할 인물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미국 측의 통계에 따르면 한국전쟁 중 60여만명이 사망했습니다. 그 중 일부가 묻혀있는 바로 이곳 적군묘지를 바라보며 고영환 연구위원은 안타까운 마음을 달랩니다.
지금까지 취재에 박성우 기자와 국가안보전략연구소의 고영환 수석연구위원, 진행에 이예진, 제작에 RFA 자유아시아방송 서울지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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