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이야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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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경애하는 북한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한의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지금 2만 여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후쿠시마원자력발전소 붕괴에 이르기까지 헤아릴 수 없는 고통과 희생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30만의 희생자를 낸 2004년의 인도네시아 쓰나미(지진해일), 25만의 생명을 앗아간 지난해 아이티의 지진참상에 이어 발생한 이번 일본대지진은 진도 9로 사상 5번째의 강진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이번 사건은 자연재앙이 얼마나 파괴적이며 그리고 인간이 자연의 힘 앞에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다시 한 번 보여주었습니다. 일본열도가 동쪽으로 2.6m, 유라시아대륙의 한쪽 끝에 위치한 한반도도 5cm 동쪽으로 옮겨갔다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지진으로 발생한 쓰나미는 20m가 넘는 파고와 최대시속 800km의 제트기 속도로 해안도시와 마을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습니다. 정박해 있던 선박들은 장난감처럼 나뒹굴었고 집과 건물들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쓰나미 속도가 얼마나 빨랐는지 질주하던 자동차도 이를 피해 달아나다 따라 잡혀 파도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정도였습니다.

지진이 몰고 온 재난은 이뿐이 아닙니다. 일본 전력의 29%를 차지하는 원자력발전소에 큰 사고가 발생하여 일본이 대량 핵 피폭의 위험에 노출되게 된 것입니다. 후쿠시마에 가동 중이던 원자로가 몇 기 파괴되면서 현재 일본은 물론 전 세계가 촉각을 세우고 위기관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땅이 갈라지고 물바다에 불바다, 핵 방사능 공포까지 덮친 2중, 3중의 대 재앙 속에서도 인류는 희망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일본인민들이 발휘하고 있는 절제와 침착함, 인내와 희생정신입니다.

극단의 위기 속에서도 질서를 잃지 않고 믿지 못할 정도로 냉정을 유지하면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모습에 세계가 놀라고 있습니다. 한 외신은 '진화된 인류'라는 표현으로 극찬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세계에 지금과 같은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일본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쓰나미 초기 마을사람들을 대피시키기 위해 마지막까지 방송을 하다 실종된 어느 한 동사무소 여성의 감동적인 이야기. 중국인 연수생 20명을 먼저 대피시키고 자신과 전 가족이 행방불명된 수산물가공회사 전무의 살신성인 스토리. 쓰나미 파도가 닥치기 바로 전까지 마을 골목길을 막아선 소방차. 그들의 희생정신과 아름다운 감동의 이야기는 끝이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 이것은 우리의 소임이다'고 하면서 정년퇴직을 몇 달 남기지 않은 채 원자로를 살리기 위한 생사판가름의 결사전에 뛰어든 발전소의 한 직원과 50명의 결사대원들, 전국각지에서 모여든 자발적인 지원자들의 목숨을 건 사투는 세계에 인간의 위대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세계 언론이 '최후의 결사대,' '이름 없는 영웅들'이라고 부르는 이들의 자기희생을 보면서 북한에서 늘 들어왔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라는 집단주의 구호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한다는 북한에서, 그리고 집단주의가 최상의 가치로 선전되는 북한에서 과연 이 구호가 어떻게 실천되고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이미 오래전부터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는 사라지고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만 남아 있습니다.

오히려 지금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영웅적 희생들이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라고 해야겠죠. 북한에서 강요되는 희생은 모두 수령을 위한 희생, 일개인을 위한 희생입니다.

불붙는 '구호나무'를 껴안고 죽어야 영웅이 되고 불속에서도 가족이나 생명이 우선이 아니라 김 부자 초상화를 먼저 살려야 영웅이 됩니다. 가라앉는 배에서도 가장 '위대한 행동'은 김 부자 초상화를 비닐에 싸 가슴에 품는 것입니다.

온 나라가 3대째 김 씨 집안의 노예로 살아야 하는 '사회주의 북한'에서의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의 희생정신, 당장 죽음이 닥쳐와도 이웃과 집단, 다수를 위해 묵묵히, 이름 없이 자기 책임을 다하는 자본주의 일본에서의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의 인간애, 이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오늘의 두 이웃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