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 이야기] ‘강도 미찌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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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북한에는 이런 은어도 있습니다. ‘강도 미찌비시.’ 아주 막무가내로 놀거나, 남의 것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거나, 철면피하게 행동할 때 어린이들이 자주 쓰는 말입니다.

운동을 하다 반칙을 하고 상대편을 탓할 때도 ‘강도 미찌비시,’ 여동생의 아이스크림을 빼앗아 제 입에 넣는 여석을 보고도 ‘강도 미찌비시’라고 합니다.

어른들도 이런데 선 결코 자유롭지 않습니다. 애인의 예물까지 받고 약혼식을 한 사내가 딴눈을 팔거나 양다리치기를 할 때는 갈데없이 ‘강도 미찌비시’입니다. 도둑질을 하고도 남을 가리키며 도둑이야 하는 사람은 ‘강도 미찌비시 100’쯤 되죠.

강도를 가리키는 대명사로 ‘미찌비시’가 ‘당첨’된 것은 아마도 일제식민지통치의 영향 때문인가 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의 3대 대기업인 미쓰비시는 일제 강점기에 대한민국 사람들을 강제 징용한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하시마 섬 등에서는 비인간적인 대우와 급여체불도 많이 했다고 하네요. 전시에 미쓰비시가 주로 생산한 제품은 가미가제 폭격에 사용된 전투기와 잠수함을 비롯한 군용 장비와 군수품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를 요구하고 있으며 이에 일본인들로 구성된 인권단체가 가담하여 법정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남한의 대법원은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가 강제징용을 당한 피해자들에게 일본 기업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일제 강제징용피해 국민이 일본 기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네요.

1944년 9월 일본 정부의 강제 징용으로 일본 히로시마에 있는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 기계제작소와 조선소에 노무자로 배치돼 근무하다 1945년 8월 원폭으로 부상을 입고 광복과 함께 귀국한 89세 여모씨 등 8명은 강제징용과 원폭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다 미쓰비시중공업과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손해배상과 미지급임금 청구소송을 냈습니다.

이것이 원심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받았는데 대법원이 이를 깨고 사건을 부산고등법원으로 돌려보낸 것이죠. 1심과 2심에서는 청구권 소멸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원고들의 청구를 기각하기도 했답니다.

재판부의 판결근거는 이렇습니다. 우선 ‘원고들의 시효가 완성돼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피고들의 주장은 신의성실 원칙에 반하여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죠.

또한 ‘원고들이 일본에서 제기한 같은 내용의 소송에서 일본 재판소는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 사실이 있는데, 일본 재판소의 판결 이유에는 일본의 한반도 식민지배가 합법적이라는 인식을 전제로 해 일제의 국가총동원법과 국민징용령을 적용하는 것이 유효하다고 평가했다’며 ‘이런 일본의 판결은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 가치와 정면충돌하기 때문에 그 효력을 승인할 수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으로 인해 원고들의 미쓰비시중공업, 신일본제철에 대한 청구권이 소멸됐다고 볼 수 없다’며 ‘피고 회사들은 구 미쓰비시중공업 주식회사와 구 일본제철 주식회사와 각각 법적으로 같은 회사로 평가되므로 원고들의 청구를 거절할 수 없다’고 판결했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 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징용 피해자의 보상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완전히 해결됐다’는 것이 정부의 입장이라고 밝혔습니다.

외무상도 회견에서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개인을 포함한 청구권은 1965년 협정으로 완전하고도 최종적으로 해결이 끝났다’고 발언했죠.

일제식민지통치가 종식 된지도 반세기가 훨씬 지났지만 남북을 통틀어 한반도에서 그때의 그 상처를 말끔히 씻어낼 날은 과연 언제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