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이야기] '불끈 거리'와 끈 '불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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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친애하는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금은 전기사정이 좀 낳아지셨습니까? 요즘 여기 서울에서는 몇 시간의 전국적인 정전사태로 난리가 났습니다.

그 자초지종은 이렇습니다. 지난 15일 오후 3시, 정부가 지역별로 전기를 끄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50개의 대상선로를 돌아가면서 30분씩 단전을 시켰죠. 결과 저녁 6시 반 기준으로 전국적으로 162만 가구에 전력 공급이 중단되었습니다.

그로부터 5시간이 지난 8시경에 전력사용량이 줄어 단전조치는 마무리 되었습니다. 사태의 발생원인은 때 아닌 무더위로 냉방전력 사용량이 급증했고, 동시에 원전을 포함한 발전소 20여 곳이 예방정비를 받던 중이어서 공급량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사태의 책임을 지고 결국 전력공급의 컨트롤 타워역할을 하는 지식경제부 장관이 정전 3일 만에 사퇴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피해를 입은 대상들에 대한 국가적인 보상조치가 속속 이뤄지고 있습니다.

전기공급시간보다 정전시간이 더 많은 북한에서 살아온 저로서는 하루 종일도 아니고 30분간, 그것도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정전시켰는데 왜 이리 난리법석인지, 정말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며칠간 신문과 방송을 들으면서 많은 것들이 이해가 되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반도체회사인 삼성전자 생산라인에서는 형광등이 깜빡이는 정도의 순간정전이 발생해도 910만 달러이상(100억 원 이상)의 손실을 입는다고 합니다. 이유는 10억 분의 1미터의 나노미터 두께로 초 미세 가공공정을 거치기 때문에, 순간정전에도 반도체의 원료인 둥근 원판(웨이퍼)을 전량 폐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 간부의 말이 '일주일 전력공급이 차단된다고 하면, 회사 존립을 걱정할 정도의 타격을 입는다'고 합니다. LCD공장도 마찬가지고요. 좀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전기를 일주일 못 받거나 주파수가 불안정한 전력이 공급되면 세계적인 회사도 당장 망한다는 얘기죠.

화학업계도 천문학적인 손해를 본다고 합니다. 한국은행 지급결제 망은 자체 발전기로 이틀 버틸 수 있고, 증권 등 다른 금융기관전산망은 아예 다운된다고 합니다. 즉 우리가 이해하기 쉽게 통속적으로 이야기하자면 1주일 정도 전력공급이 안 되거나 불안정한 주파수로 공급되면 대한민국의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북한은 지방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평양시민들도 지금 모두 체험하고 있을 겁니다. 집집마다 낮은 전압 때문에 전등불은 수수떡 같고, 220V가 한 150-160으로 들어오나요, 그리고 그 전압을 높이기 위해 변압기를 2대, 3대씩 놓고 삽니다.

보통은 계기를 보면서 수동으로 전압이 변할 때마다 조절을 하죠. 그리고 외국 물이나 달러를 좀 만지는 유족한 사람들은 자동변압기를 놓습니다. 보통 집 주인들은 자동변압기가 쉴 새 없이 내는 주루룩, 주루룩 소리에 흐뭇해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름 없는 영웅들' 영화를 못 보는데 우리만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전기는 산업과 공장을 고사시키는 전기였습니다.

평양사람들은 보통강구역의 '붉은 거리'를 정전이 너무 잘 돼 '불끈 거리'로 부르고 있습니다. 이 '불끈 거리'의 불은 들어와도 전압변동이 너무 심하고 주파수도 제 마음대로 춤을 춥니다. 그런 전기라도 보내주면 장땡이죠.

대한민국은 가는 곳마다 불의 거리입니다. 저녁이면 현란한 네온사인과 온갖 전등, 거리를 메우는 자동차 불로 장관을 이룹니다. 저녁에 찍은 한반도 위성사진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북쪽은 평양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국이 새까맣고, 남쪽은 불야성을 이루고.

북한의 '불끈 거리'가 살기 좋을 가요, 아니면 30분간이라도 끄면 난리가 나는 남한의 '불 거리'가 좋을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