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위대한 북한의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벌써 김장철이네요. 연말은 북한에서 총화의 계절, 선거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조직별 선거 때마다 무조건 등장하는 단골메뉴의 말이 있죠. '집행부의 복안을 발표 하겠습니다'입니다.
선거 흐름을 보면 사회자가 먼저 후보를 몇 명으로 하면 좋을지 대중에게 의견을 구합니다. 그러면 미리 준비시킨 한 동무가 일어나 '규약 몇 조, 몇 항에 따라 5명으로 했으면 합니다,'라고 말합니다. 문장이 길지도 않은데 외우지 못해 힐끔 힐끔 내려다보면서 대본을 읽기가 일쑤입니다.
동맹원 박철동무로부터 이러이러한 의견이 제기됐으니 '찬성하는 동무들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라고 하면 약속이나 한 듯 모두가 손을 듭니다, 아니 무조건 손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대' 하면 당연히 한명도 없죠. 때론 졸던 사람이 손을 들어 한바탕 웃음판이 터지기도 하지만, 매번 구경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때는 청중을 보지도 않고 사회자가 '반대, 없습니다,'라고 자동으로 내리 읽기도 합니다.
다음은 지도부선거입니다. '어떤 동무들을 후보자로 추천할지 의견이 있는 동무들은 제기해주십시오,'라고 사회가 이어집니다. 이때가 총회의 절정입니다. 모두가 숨을 죽이고 누가 일어서는지, 그가 어떤 말을 하는지 귀를 기울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영철동무가 일어나 '집행부의 복안을 발표해 줄 것을 제기합니다,'라고 해마다 반복하는 레퍼토리를 반복합니다. 모두들 그가 무슨 말을 할지 뻔히 알기 때문에 서로들 마주보며 '그러면 그렇겠지' 하고 눈웃음을 짓습니다.
그러면 집행자도 수십 년간 반복하는 레퍼토리를 또 반복합니다. '김영철 동무로부터 집행부의 복안을 발표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다른 의견 없습니까?' 시간이 많이 지났을수록, 밤이 늦을수록 대답소리는 점점 커집니다.
'없습니다!'
'다른 의견이 없는 동무들은 손을 들어 표시해 주십시오. 반대. 없습니다. 그러면 집행부의 복안을 발표하겠습니다.' 이어 그들에 대한 찬반토론 있습니다. 말이 찬반이지 사전에 준비시킨 찬성토론만 이어집니다.
마지막으로 투표입니다. 선거위원회도 선출하고 비밀투표방식이지만, 실제는 한 줄로 쭉 서서 가리지도 않은 투표 통에 후보자가 적힌 투표용지를 그냥 넣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누구를 찍고 말고 할 것도 없지요. 단수의 후보들이니까요.
잠시 뒤 투표함을 확인했는지 안했는지, 선거위원회 위원장이 결과를 발표합니다. 100% 찬성입니다. 뒤이어 1차 위원회가 벼락 치듯 열리고 비서는 누구, 부비서 누구 이렇게 선출됩니다. 당위원회 시나리오대로요. 이것이 바로 북한 어디를 가나 꼭 같은 선거의 흐름입니다.
며칠 전 노동신문, 조선중앙TV는 남한에서 이뤄진 서울시장, 재보선 선거에 대해 요란한 논평을 냈습니다. 무소속후보의 서울시장 당선을 '남조선 인민들의 기개를 보여준 시민혁명,' '사대매국, 동족대결, 반인민적 악정과 부정부패 집권세력에 대한 심판,' '통일을 바라는 참다운 선택'이라고요.
다른 보충선거에서도 민주진영이 우세했고, 미국도 선거에 개입했지만 친미사대세력이 철추를 맞았다고도 평가했습니다.
이번 선거는 시민단체후보가 정당정치를 능가했다는 측면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서 얘기하는 것 같은 매국, 반인민적 세력에 대한 시민혁명, 통일을 바라는 참다운 선택이 아닙니다. 시민들이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기존정치에 염증을 느껴 바꿔야 한다는 생각에서 찍은 결과죠.
다른 재보선도 기초자치단체장 11곳 중 한나라당 후보가 8명 당선되었고, 북한이 말하는 민주애국세력이 민주당이라면 그들은 2곳 밖에 당선되지 못했습니다.
선거전 이명박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였지만 이것은 미국의 선거개입이 아닙니다. 사실 북한식 주장대로라면 현 집권당인 미국 민주당은 '보수패당'인 한나라당과 이명박대통령이 아니라 민주당을 지지해야 정상이죠.
북한의 주장 중 유일하게 맞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남한에서는 임기가 끝나면 어김없이 선거가 진행되고, 인민대중은 표로서 자기들이 원하는 사람을 시장이나 대통령, 국회의원으로 마음대로 뽑는다는 사실입니다.
0:00 / 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