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이야기] 생활조절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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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친애하는 북한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한에는 이런 말이 있죠. '도둑질 빼고는 다 해봐야 한다.' 또는 '지랄 빼고는 뭐든지 다 해봐라,' 이렇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한창 자랄 때 주변에서 많이 듣던 얘기죠.

의미는 이것저것 많이 해보고 경험을 쌓으면서 인생의 지혜를 터득하라는 뜻입니다. 근데 언제부턴가 북한사람들은 금기시하는 도둑질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마치도 인생을 살면서 무조건 체험하고 통과해야 하는 관문이 된 셈이죠.

보통 첫 경험은 대학생들은 교도대훈련, 청년들은 군 복무시절에 시작됩니다. 그보다 더 빠른 친구들은 붉은 청년근위대 시절이겠죠.

고사포 훈련을 기본으로 하는 교도대의 경험을 말씀드리면 맨 먼저 해보는 것이 식당 하식기재 보충하기입니다. 저녁 근무서면서 중대 하식기재를 통째로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중대장의 불호령이 떨어지죠. 온 중대에 비상이 걸립니다.

무조건 이를 보충해야 밥을 먹죠. 분노는 주변 중대에로 번집니다. 그러다나면 도미노 훔치기 현상이 일어나죠. 이쪽에서 가져가면 다른 데서 보충하고, 계속 반복됩니다. 포를 보호하기 위해 씌우는 방수포도 중요한 대상입니다.

한번 이력이 트면 도둑질의 품목도 점점 늘어납니다. 중대에 갑자기 도로포장 임무가 떨어지면 중대장은 각 소대별로 이를 분담합니다. 언제까지 끝내고 어느 소대는 시멘트, 어느 소대는 모래를 맡으라는 식의 과업이 떨어지죠. 포탄 고를 건설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각 소대, 분대별로 주변어디에 무엇이 있으며, 어떻게 해결할지를 토론한 다음 야심한 밤에 작업을 나갑니다. 필요한 자재를 훔쳐오는 일이죠.

그리고 이 일을 합리화하기도 합니다. 도둑질이 아니라 어차피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불가피한 일로 위안하고 합리화하면서 말이죠. 그래서 '조절'한다고 표현합니다. 한 쪽에 많거나 필요 없는 것을 꼭 필요한 다른 곳으로 조절한다는 의미죠.

북한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국가배급, 공급이 대폭 축소되면서 이 말은 승화되어 '생활조절,' '생활조절위원회'로 변했습니다. 유족하게 사는 부분의 자원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조절하여 재분배한다는 뜻으로 쓰였죠.

어찌 보면 집단생활에서 배운 사소한 도둑질이 사회정의와 재분배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생활 조절위원회'의 활동은 활발해졌습니다. 생일이나 명절 때면 부족한 식량, 고기를 농장 탈곡장을 털거나, 축산 반을 습격하여 해결하군 했죠. 영화 '임꺽정'에서 나오듯이 양반들, 간부들의 재산을 털기 위해 산속에서 '길막봉이' 역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마을 주재원의 자전거를 조절하기도 하고, 평양에서는 길 가던 간부의 명함시계를 빼앗아 대동강에 던져 버리기도 했습니다. 보위원이나 당 간부들을 표적으로 삼은 조절활동도 확산 되었고요.

여기 자본주의사회에서는 다른 방법으로 조절을 요구합니다. 요즘 미국의 월가에서 시작된 '월가를 점령하라'와 같은 시위로 해결하죠.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의 활동이 극대화 될수록 자산배분의 양극화가 심화되는 것은 법칙인 것 같습니다.

과거에는 중산층이 두터워 사회의 20-30%를 차지했다면 지금은 이들이 무너져 하위 소득계층으로 전락했고, 부는 점점 상위 1%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대형은행이나 증권사, 금융업자들은 이에는 아랑곳 하지 않고 탐욕에 젖어 해마다 수백, 수천만 달러의 이익금을 나누어 가지기도 하죠. 그래서 이들을 비판하고 사회개혁을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는 전 세계로 번졌습니다.

독특한 자본주의식 '생활조절위원회' 활동이죠. 북한처럼 전체주의 사회와는 달리 자유세계에서는 선거와 표, 시위라는 개개인의 합법적 의사표시로 사회의 불의와 모순을 해결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대단히 위력합니다. 왜냐면 뭐든지, 누구든지 사회구성원의 반수이상의 동의를 꼭 얻어야 되니까요.

북한에서의 '생활조절위원회'활동도 곧 합법화되기를 기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