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은 무상

0:00 / 0:00

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북한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시장화에 맛 들어 '후불은 행불'에 이어 '외상은 무상'이라는 말을 많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둘 다 그 자리에서 돈을 받지 않으면 절대로 돈을 받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움직이는 핵심원리 중의 하나는 신용입니다. 특히 주식을 발행해 사회에서 자본을 조달하고, 은행들로부터 대규모 대출로 기업을 운영해야 하는 회사들로서는 신용을 잘 지키는 것이 생명이나 같습니다.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신용카드를 쓰는데 이 신용카드 사용실적에 따라 개인들의 신용도가 결정됩니다. 즉, 빚을 내서 돈을 먼저 쓰는 원리인데 그 빚을 얼마나 정기적으로 잘 갚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신용이 결정되는 셈이죠.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생명인 신용도 결국은 담보를 기초로 합니다. 북한주민들이 하는 유머 '외상은 무상'이 좀 야박해 보여도 그 원리는 신용의 원리와 같다는 것이죠.

우리가 중학교 교과서에서 배우는 신용장(LC, letter of credit)도 짐에 대한 권리 증권을 담보로 발행되며, 개인들에게 허용되는 신용카드 한도도 그 사람의 월급, 지금까지의 카드사용내역에 따르는 신용도를 담보로 결정됩니다.

대출은 더 말할 것도 없죠. 기업이 가지고 있는 자산, 수입, 과거 은행과의 거래실적 등 모든 것이 고려돼 결정됩니다.

'외상은 무상'의 뜻은 결국 공짜 신용은 없다는 뜻과 같죠. 그렇다는 의미에서 북한주민들은 더욱 더 시장에 익숙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운영에서 재미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무임승차(free riding)입니다. 1965년 맨슈어 올슨이라는 사람이 쓴 책에서 유래되었는데요, 협력이나 공공재를 제공하는데서 가장 큰 도전이 무임승차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내용입니다.

즉, 공공재는 그것을 창출하는데 동참하지 않은 사람일지라도 그것의 수혜를 배제할 수 없는 한편, 합리적인 개인이라면 '손을 안대고 코를 푸는 것'이 자연스러운 선택이기 때문에 결국 대가는 지불하지 않고 결과만 누리겠다는 경향을 누구나 보일 수 있다는 겁니다.

특히 공공재의 생산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커질수록 무임승차의 유혹은 커지고, 일단 무임승차자가 출현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너도나도 협력할 의욕을 잃게 되어 결국 공공재의 공여는 실패하게 된다는 주장이죠.

물론 반론도 있습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이 이론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거의 모든 생산 활동이 공공재와 연계된 사회주의, 공산주의 체제, 특히 수령절대주의, 집단주의를 강요하는 북한에서는 이 무임승차의 폐해가 사회와 경제를 망친 주범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희생해도 차례지는 것은 별 차이가 없고, 오히려 소수 지배계층이 혜택을 독식하는 구조에서 누구나 다 무임승차를 하려고 하지 않을까요? 즉, 갚지 않는 외상을 하려고요.

결국 외상은 무상이고, 무상은 외상이며 무임승차이네요. 대동강이야기의 김광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