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강 이야기] 하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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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은어와 유머를 통해 북한사회를 이해하는 '김광진의 대동강 이야기,' 국가안보전략연구소 선임연구원 김광진씨가 전해드립니다.

옛날 금강산 골 안에서 약초 캐며 살아가던 한 사람이 구월산에 온 일이 있습니다. 금강산 못지않은 명산이란 소문을 듣고 명산에야 응당 약초도 많으리라 하고 온 터였죠.

이 사내로 말하면 나이 예순 살이 되었는데도 흰 머리카락 하나 없는데다, 얼굴엔 주름살도 없고 혈색도 좋고, 기력 또한 좋아 서른 살 안팎으로 보이는 홀아비였습니다.

…구월산을 두루 돌아보며 희귀한 약초들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그는 아사봉 아래의 달천 기슭에 홀로 있는 집을 보고 다리쉼이나 할 생각으로 내려갔습니다.

'주인님 계신지요?' '누구세요?'라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나오는데 금강산홀아비는 그만 얼어붙은 듯 떡 굳어지고 말았습니다. 구월산의 보름달이 아무리 밝다 한들 이 여인처럼이야 환하고, 석담의 물이 맑다 한들 이 여인의 눈처럼 맑고 그윽할 수 있을까.

예순이 난 여인을 너무 젊어 착각한 것이죠. 겨우 물 한 모금 청해 마시고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다시 산으로 올라왔으나 그때부터는 풍치 구경이요, 약초 찾기요 하는 게 다 시큰둥해져 그저 굴속에 박힌 겨울 곰 인양 숲속에 웅크리고 앉아 그 여인만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젊구나, 아깝구나, 그래도 한번 청혼을 해봐, 하다가도 아서라, 먹은 나이야 어디 가랴, 한창나이 젊은 여인 앞에 너무도 염치없는 일이지 하고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고...

이렇게 며칠이 흘렀는데 문뜩 여인이 마당가에 나와 무너진 돌담을 쌓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이야 여인들이 할 일이 아니지 하는 생각에 금강산 홀아비는 숲을 나와 그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물 한 모금 신세집시다.' 하여 물 한바가지 얻어 마시고는 '신세를 졌으니 내 좀 도와드리리다.' 하고 동의하건 말건 성큼 일손을 잡고 큼직한 바위 돌 들을 공기 돌 다루듯 하며 척척 돌담을 쌓아나갔습니다.

…돌담을 다 쌓고 대접까지 받고 나서려니 벌써 캄캄한 밤이 되었습니다. 다행이도 여인이 그를 만류했죠. 그런데 말투가 곱지 않게 해라 투였습니다.

'날이 캄캄한데 이제 어딜 가겠소? 불편한대로 예서 쉬고 가오.'

…잠시 후 여인이 따스한 아랫목에는 홀아비의 자리를 펴고 윗목 쪽에는 제자리를 편 다음 아래 윗방 가르듯 그 사이에 겨릅등을 옮겨 놓고 자리에 눕는 것이었습니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금강산 홀아비는 가슴이 널뛰듯 하는지라 누워서도 여자의 거동과 체취에만 눈이 빠지고 코가 발름거리는 판이 되었습니다.

…금강산 홀아비는 '아이구, 더는 못 참겠구나,'하며 여인의 곁에 가 넌떡 누우려는데...이게 웬일인가, 잠들었던 듯싶던 여인이 벌떡 일어나 앉으며 호되게 뺨을 후려갈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여인의 입에서 천만뜻밖의 말이 쏟아져 나왔죠. '이 덜 된 여석! 꼭뒤에 피도 안 마른 여석이 제 어미 벌 되는 여자한테 이게 무슨 짓이고.'



알고 보니 둘은 구월산에서는 '새박뿌리,' 금강산에서는 '은조롱'이라고 하는 약초를 먹고 장수하는 노인들이었습니다. 의학고서 '의종손익'에는 하수오로 올라있는 이 약초 덕분에 이들은 부부 연을 맺고 잘 살았답니다.

'하수오'는 어찌하여 하얗던 머리가 까마귀처럼 거매졌는가 하는 고사에서 유래된 이름입니다. 의학고서에는 하수오의 약효를 풀이한 시까지 한수 들어있습니다.

'흰머리 검게 하고 얼굴색 좋게 하네, 정 불궈서 임신케 하고 오래 살게 한다오.'

지금까지 북한 기담패설집의 한 일화를 소개해 드렸습니다. 북한동포 여러분, 새해 2013년에는 더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